美 대통령 ‘공개 저격’한 이스라엘 극우 막후 실세···휴전협상 최대 ‘걸림돌’로
“조 바이든은 이스라엘의 전쟁 노력을 방해하고 있다. 우리에겐 트럼프 당선이 낫다.”
이스라엘 내각의 한 장관이 이스라엘의 ‘최대 지원국’인 미국 대통령을 공개 비판했다. 미국의 방위 지원에 크게 의존할 뿐더러, 가자지구 전쟁 이후 군사·외교적 지원이 절실한 상황에서 이스라엘 장관이 미 현직 대통령을 대놓고 비판한 것은 이례적이다.
다만 발언 주체를 들여다보면 그닥 놀랍지 않은 얘기다. 이 발언의 주인공은 이스라엘 국가안보장관이자 연정 내 대표적인 극우파인 이타마르 벤그비르(47). “팔레스타인인 없는 가자지구”를 주장해 이미 유명세를 탄 극우 인사다.
이번 전쟁 발발 전부터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한 폭력 선동으로 악명을 떨쳐온 그는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를 더 오른쪽으로 몰고 가는 ‘막후 실력자’로 이스라엘 정계에서 영향력을 키우고 있다.
미 대통령 ‘공개 저격’ 벤그비르, 속 타는 네타냐후?
벤그비르는 4일(현지시간) 보도된 월스트리트저널(WSJ) 인터뷰에서 조 바이든 정부가 이스라엘의 전쟁을 ‘방해’하고 있다며 “그는 우리를 전면적으로 지원하지 않고 (가자지구에) 인도적 구호 물자와 연료를 주느라 바쁘고, 이는 결국 하마스로 간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트럼프가 집권했다면 미국의 행동은 완전히 달랐을 것”이라며 오는 11월 미 대선에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승리를 기원했다.
그의 ‘선 넘은’ 발언에 이스라엘 야당 정치인들은 일제히 비판하며 진화에 나섰다. 전시 내각에 참여하고 있는 야당 지도자 베니 간츠 전 국방장관은 벤그비르가 “이스라엘의 전략적 대외 관계, 국가 안보, 전쟁 노력 모두를 해치고 있다”고 비판했다. 제1야당 예시 아티드를 이끄는 야이르 라피드 전 총리도 “국제사회에서 이스라엘의 입지를 해치는 일”이라며 “그는 대외 관계에 대한 이해가 없다”고 꼬집었다.
네타냐후 총리의 반응은 미묘하게 달랐다. 그는 내각회의에서 “이스라엘의 가장 중요한 동맹” 미국에 대한 감사를 표하면서도 때로는 미국의 요구를 거부할 것임을 암시했다. 그는 “국가 안보를 위험에 빠뜨리면서도 무조건 미국의 요구에 ‘네’라고 답하고 해외에서 칭찬 받으려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서 “주권 국가로서 우리는 미국이 동의하지 않는 부분도 스스로 결정을 내려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야당은 벤그비르를 징계할 것을 네타냐후 총리에 촉구했으나, 그는 벤그비르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은 채 “이스라엘과 동맹국의 관계를 방해해선 안 된다”고만 말했다. 이스라엘 정치권에선 네타냐후 총리가 연정 내 극우 정치인들에게 휘둘리고 있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팔레스타인인과 싸우라’며 유대인에게 총 나눠준 극우 정치인
지난해 네타냐후 내각의 국가안보부 장관으로 임명된 벤그비르는 팔레스타인 땅인 가자지구와 요르단강 서안지구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을 몰아내야 한다고 주장해 논란을 일으킨 인물이다.
전쟁 발발 후 전후 구상이 논의되는 와중에도 그는 가자지구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을 이주시키고 유대인 정착촌을 재건해야 한다고 주장해 미국 정부의 공개 경고를 받았다.
https://www.khan.co.kr/world/mideast-africa/article/202401031327001
그는 가자지구 내 팔레스타인인들에게 ‘현금 인센티브’를 지급해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전 세계로 이주하도록 권장”한다고 밝혔으나, 이미 이스라엘 건국으로 살던 곳에서 쫓겨난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이는 또 다른 ‘나크바(재앙)’이자 이스라엘의 ‘재점령’과 다름 없는 구상이다.
‘나크바’는 1948년 이스라엘 건국 당시 자행된 강제이주 조치로, 75만명이 넘는 팔레스타인인들이 살던 땅에서 쫓겨났다. 이 과정에서 500개가 넘는 팔레스타인 마을이 파괴됐고 수천명이 목숨을 잃었다.
팔레스타인 땅이 곧 이스라엘 땅이라는 그의 집요한 ‘신념’은 서안지구에서 유대인 정착민들을 무장시키는 것으로 나아갔다. 국제사회가 이미 ‘불법’으로 규정한 서안지구 내 유대인 정착촌 확대를 주장해온 그는 이스라엘 정착민들에게 팔레스타인인들과 싸우라며 소총을 지급하는 캠페인을 벌여 왔다. 가자지구에서 전쟁이 발발한 이후 이렇게 무장한 정착민들에 의해 서안지구 팔레스타인 주민들이 공격 받고 살해당하는 사례가 급증했다.
그는 이번 전쟁 발발 이전에도 ‘사병 조직’이란 비판을 받아온 ‘국가경호대’ 신설을 네타냐후 총리에게 압박해 논란을 빚었다. 벤그비르 장관 본인 직속인 국가경호대가 아랍계 이스라엘인이나 서안지구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탄압하는 용도로 쓰일 것이란 관측이 나왔고, 벤그비르 역시 “국가경호대는 아랍인 지역에만 예외적으로 파견될 것”이라며 이를 부인하지 않았다.
https://www.khan.co.kr/world/mideast-africa/article/202304032204015#c2b
이스라엘서 세 확장 중인 극우…‘연정 붕괴’ 빌미로 네타냐후 압박
아랍계 주민에 대한 인종차별 및 폭력 선동, 테러 지지로 2007년 유죄 판결을 받은 바 있는 벤그비르는 각종 논란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정치권에서 세를 확장해 나가고 있다.
국제사회는 물론 미국 역시 반대해온 그의 ‘가자지구 재점령’ 주장 역시 힘을 받고 있다. 최근 헤브루대학 여론조사에서 이스라엘 응답자의 35%가 ‘가자 합병 및 유대인 정착’을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과거 소수 의견에 그쳤던 극우세력의 주장에 이스라엘인의 3분의1 가량이 동조하고 있다는 의미다.
이념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영향력이 커지고 있다. 하마스 기습 공격 이후 지지율이 급락한 네타냐후 총리는 벤그비르가 이끄는 오츠마 예후디트(유대인의 힘)의 원내 의석수 6석을 잃으면 연정 붕괴로 실권하게 된다.
최근 여론조사 결과 조기 총선이 열릴 경우 제1여당인 리쿠드당은 현 32석 의석이 19~27석으로 줄어드는 반면, 오츠마 예후디트는 6석에서 8~9석으로 우파 정당 중 유일하게 의석이 늘어날 것으로 예상됐다.
이를 아는 벤그비르도 이점을 십분 활용해 네타냐후를 압박하고 있다.
벤그비르는 최근 휴전 협상이 속도를 내고 있다는 보도가 나오자 “무모한 합의=정부 해체”라는 글을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올렸다. 이스라엘 인질과 팔레스타인 수감자들을 맞교환하는 방식으로 협상이 이뤄진다면 연정에서 탈퇴하겠다고 대놓고 경고한 셈이다.
불과 몇시간 후 네타냐후 총리는 “이스라엘군은 가자지구를 떠나지 않을 것이며 나는 수천명의 테러범을 풀어줄 생각이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팔레스타인 주민들에 대한 폭력 선동과 인종 차별로 악명 높은 극우 극단주의자의 정치적 이해에 따라, 수백명 인질과 수백만명 팔레스타인 주민의 생사와 직결된 휴전 논의가 좌지우지되고 있는 것이다. 한 이스라엘 야당 정치인은 “벤그비르가 입을 열면 우리가 인질을 데려오는 것이 더 어려워진다”고 말했다.
이런 식의 ‘협박’은 전쟁 전에도 있었다. 벤그비르는 지난해 이스라엘 건국 이후 최대 규모 시위를 촉발한 사법부 무력화 입법을 주도한 인물이다. 들끓는 반대 여론에 네타냐후 총리가 입법을 철회할 조짐을 보이자, 벤그비르는 입법을 중단하면 연정에서 탈퇴하겠다고 총리를 압박했다. 네타냐후는 벤그비르에게 ‘입법 연기 선언’을 하는 대가로 국가경호대 설립을 약속한 것으로 전해졌다.
벤그비르는 WSJ 인터뷰에서 자신이 네타냐후 정권을 흔들 수 있는 충분한 지지를 확보했으며, 필요하면 이를 사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WSJ는 “네타냐후를 더 오른쪽으로 몰고 가는 선동가가 인질 석방과 전쟁 종식을 위한 협상의 최대 장애물이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선명수 기자 sm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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