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하게 계산할 수 있다는 착각 [세상읽기]
김혜정 |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
1월22일 서울중앙지법 서관 418호는 검은 옷의 사람들로 가득 찼다. 지난해 여름 발생한 서울 신림동 공원(등산로) 여성 성폭력 살인사건 선고공판에는 피해자의 친척, 친구, 전 직장동료, 동호회 회원 등이 함께했다.
“무기징역, 압수한 너클 2개 몰수, 신상정보 10년간 공개 및 고지, 관련기관 10년 취업제한, 30년간 위치추적 전자장치 부착을 선고한다.” 재판부는 피고인 최윤종(31·신상공개)에게 ‘사회와의 격리’를 선고했다. 판결문에도 ‘격리’라는 단어가 수차례 등장했다. 그동안 정부와 정치권에서 성폭력 사건이 터질 때마다 약속하고 내세웠던 단어다. 그러나 피해자 친구들은 계속 흐느꼈다. 성폭력 재판 때마다 느끼지만 ‘알맞은 형량’이란 없다. 선고된 형의 숫자가 피해자가 겪은 일과 등가일 수도 측정할 수도 없다. 교환 불가능하며 숫자로 환원될 수 없는 고유한 사람의 삶과 일상이 사라졌다.
그런데 피고인은 범행 전부터 ‘고의’, ‘무기징역’을 검색했다. ‘너클’, ‘성폭행’, ‘살인’, ‘살인예고글’ 관련 기사도 집중적으로 열람했다고 한다. 가해자는 자기가 하려는 일이 피해자에게 어떤 해악을 끼칠지 측정하지 않았다. 가해자가 사전 조사한 것은 자신의 형량이었다. 자기 범행의 ‘값’이 사회적으로 어떻게 책정되어 있는지 손쉽게 계산해본 것일까? 피해자 유족 공재현님은 한겨레와 한 인터뷰에서 “성범죄는 피해자 다수가 여성인데 (현재 성범죄 형량은) 별거 아니라고 생각해 반복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가해자가 미리 측정해본 성폭력의 값이 너무 부족했던 것 아닌가 분노하고 문제 제기한 것이다.
그의 계산과 사전 측정에는 오류가 많았다. 강간살해는 별도의 죄와 형량이 정해져 있다는 사실을 누락했고, 피해자가 죽어가며 느꼈을 좌절과 고통이 판결에 담겼다는 것도, 피해자의 죽음으로 청소년 학생들과 친구, 유족이 느꼈을 슬픔이 판결에 반영된 것도 미처 생각하지 않았다. 유족은 “동생이 아니었더라도 그날 그 자리를 지나는 여성 누군가는 피해자가 됐을 것”이라고 했다. 더불어 “여성을 강간하고 싶었다, ‘부산 돌려차기 사건’을 보고 범행을 계획했다”는 그의 말처럼, 이 사건이 누군가의 모방 대상이 되는 일이 가장 우려된다고, 그런 일이 일어나면 잠을 자지 못할 것 같다고 했다. 피고인의 행위가 다른 이들에게 끼칠 해악을 다른 이들이 우려하고, 재판부는 이 역시 판결문에 담았다. 서로 연결돼 영향을 주고받는 사회에서 내가 계획하는 성폭력의 값을 자신이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는가?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한 피고인 가족은, 피해자 유족에게 미안함을 표시하겠냐는 질문에 “합의금이 없고 저희도 어려워서…”라고 답했다. 피해자 유족과 공판방청을 해온 반성폭력 활동가들은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안하냐는 질문에 돈이 없다고 응답하는 건, 반대로 말하면 돈이 있다면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거나 미안함을 대신할 수 있다고 믿는다는 걸 뜻하기 때문이다. 형사공탁특례제도 시행 이후 성폭력 사건 66건을 수집 분석한 한국성폭력상담소와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 토론회 발표문을 보면, 67.2%가 가해자의 일방적인 공탁금을 수령하지 않겠다며 엄벌을 탄원했음에도 이것이 반영된 판결은 20.3%에 불과했다. 성폭력 행위와 공탁금액을 견주는 계산법이 성폭력 사법 과정에 퍼지는 일을 멈추려면, ‘피해 회복’이 무엇인지 헤아려지는 게 우선이다.
신림동 공원 성폭력 사건 피해자는 공○○님이다. 직업은 초등학교 교사, 축구회 활동을 하고, 멀리 사는 가족들과 다정히 지냈다. 학교에 일찍 출근해서 모든 반 냉방기·난방기를 미리 켜놓았다. 운동하고 싶은데 형편이 어려운 청소년은 축구회에 데려갔다. 누가 일이 많으면 “제 손이 심심해하네요!”라며 일손을 내밀고, 자신이 힘들 때면 선배를 찾아가 어려움을 상담하며 의지했다. 피해자 친구와 동료의 탄원서, 언론 인터뷰, 선고 뒤 법원 근처에서 모여 나눈 무수한 이야기 중 일부다.
“손해 보면서도 같이 도우면서 살아왔는데,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한 친구의 말 앞에 침묵이 길어졌다. 돈으로, 값으로 교환되는지, 무엇과 무엇이 등가인지로 ‘공정’을 논하는 사회는 더 정의롭고 평화로울까? 피해자가 남긴 무수한 환대와 나눔의 이야기가 남긴 메시지를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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