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허 속에서도 꿈꾸는 아이들… 긍정의 힘으로 다시 서다 [심층기획-튀르키예 대지진 1년]

윤솔 2024. 2. 5.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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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르키예 대지진 1년 이재민 거주지 르포
비좁은 컨테이너서 일상회복 희망 키운다
말라티아주 건물 4만여채 손상
주민 11만7000여명 터전 잃어
州 제공 영구주택 당첨 기다려
수도 시설 부족 등 열악한 환경에도
한국말 티셔츠 입은 소녀 ‘밝은 미소’
골키퍼 소년은 “김민재 선수 좋아해”
말라티아에 2만여개 주택 건설 예정
20년간 저금리 대출 등 정부가 지원
교육·복지시설 등 운영… 인재 육성도
자원봉사자 “아이들 통해 상처 치유”

‘긍정을 퍼트려 봐.’

3일(현지시간) 튀르키예 말라티아주 예실리우르트의 지진 이재민 임시 거주지에서 익숙한 언어와 마주했다. 한국 기자단을 향해 걸어온 미라지(4)의 티셔츠에 미소 띤 분홍 머리 소녀의 그림과 함께 한글 ‘긍정을 퍼트려 봐’가 큼지막이 적혀 있었다.
튀르키예 말라티아 예실리우르트의 컨테이너 임시 정착촌에 사는 미라지(4)가 한국어로 ‘긍정을 퍼트려 봐’라고 적힌 웃옷을 입고 있다. 예실리우르트=뉴시스
미라지의 얼굴에도 1년 전 이곳을 덮친 지진으로 집을 잃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밝은 웃음이 피어올라 있었다. 2023년의 처참한 대지진에서 살아남은 현지 어린이들의 모습은 이렇게 밝았다. 천막과 컨테이너에서 한 해를 지낸 아이들은 최악의 상황에도 재미를 찾는 법을 이미 찾은 듯했다. 좁은 컨테이너 사이로 누가 더 코너를 잘 도는지 자전거 경주를 하고, 손에서 스마트폰을 놓지 않았으며, 처음 보는 외국 기자들에게도 스스럼없이 다가가 ‘셀카’를 권했다. 미라지도 그랬다. 미래세대 아이들이 퍼뜨린 긍정의 에너지는 성인 이재민과 이들을 지원하는 정부 관계자에게도 재기의 힘을 주는 듯했다.

말라티아는 지난해 5만명 넘는 목숨을 앗아간 튀르키예 강진의 진원지 가지안테프에서 200㎞쯤 떨어진 곳이다. 인명 피해는 1237명으로 주변과 비교하면 적은 편이나 이 지역 건물 4만여채가 완전히 또는 크게 손상되면서 인구 81만명 중 11만7000여명이 이재민 신세가 됐다.

대지진 1년을 맞아 세계일보가 국제기자단의 일원으로 2일부터 6일까지 현지 상황을 취재했다.
기자단이 찾았을 때 이곳 주민들은 지진 발생 직후 살았던 구호텐트를 떠나 임시 거주지에서 컨테이너 주택 생활을 하고 있었다. 말라티아에는 3만2200여개의 컨테이너로 만든 임시 거주지가 69곳이나 있다.

대부분 임시 거주지가 교외 지역에 있는 만큼 주민들의 정상적인 생계나 활동에는 한계가 보였다. 정부가 제공하는 지원시설도 충분해 보이지는 않았다.

열악한 환경에도 이재민을 지탱하는 힘은 희망이었다. 이스탄불 축구팀 유니폼을 입고 나타난 쿠제이 아크 다스(9)는 한국 국가대표 김민재를 좋아한다고 말했다. 아이들이 공놀이하는 작은 농구장에는 골대조차 없었지만, 쿠제이는 항상 자신이 골키퍼 역할을 맡는다며 “나도 커서 축구선수가 되고 싶다”, “김민재 선수가 있는 한국에 가고 싶다”며 밝게 웃었다.

◆폐허 속 1년… 이제 새집 입주 ‘학수고대’

이후 들러본 임시 거주지에는 지역별로 차이는 있지만 거주용 컨테이너 외에도 주민들의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교육·복지시설이나 상업시설이 함께 마련된 경우가 많았다. 집집이 놓인 위성TV, 여성들의 경제적 자립을 위한 가방 공방 등 튀르키예 정부가 주민 재활을 위해 노력한 흔적이 역력했다.

하지만 성인 2명이 팔을 벌리고 서면 가로 폭이 꽉 찰 정도로 비좁은 컨테이너에 아이 3, 4명을 동반한 일가족이 생활하는 건 고역으로 비쳤다. 초등생 소녀 이크라누르(12)는 컨테이너촌 생활에서 가장 힘든 점을 묻자 “‘진짜 집’보다 좁아 불편하다”고 답했다.
튀르키예 말라티아 예실리우르트에 조성된 컨테이너 임시 정착촌에서 3일(현지시간) 이재민들이 물을 긷고 있다. 예실리우르트=뉴시스
수도시설도 충분치 못해 식수를 받기 위해 이곳 주민들이 공용 건물에 설치된 호스로 플라스틱 통에 물을 옮겨 담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이런 불편을 견딜 수 있는 건 곧 마주할 희망이 있어서였다. 4명의 자녀를 둔 에미네(44)는 기자들에게 “곧 이곳을 떠나 건설이 완료된 새집으로 이사할 예정이다. 그게 가장 기대된다”고 말했다.

튀르키예 환경도시계획부 산하 주택개발공사(TOKI)는 각 단지의 공사가 완료되는 대로 2월 말∼3월 초 추첨을 통해 이재민들이 영구적으로 거주할 수 있는 주택을 보급할 예정이다. 영구 주택은 해당 지역의 이재민에게만 주어진다. 지진으로 가족이 죽거나 다친 경우, 자신이 가지고 있던 집이 무너진 경우 지원이 가능하다. 지역마다 차이는 있지만 첫 2년간은 이자 지불을 유예해 주고, 추후 20년간 저금리 대출을 지원하는 등 주민들의 금전적 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장치들도 있다.

TOKI 관계자는 새로 보급되는 주택에 내진 설계가 되어 있다면서도 어느 정도 규모의 지진까지 버틸 수 있는지는 밝힐 수 없다고 답했다.
튀르키예 아디야만 오메를리 지진 피해 이재민 영구 거주지 건설 현장에서 4일(현지시간) 관계자들이 분주히 작업을 하고 있다. 오메를리=뉴시스
◆“봉사가 내 치료제”… 컨테이너촌서 찾은 미래

인근 아디야만주 중심부인 메르케즈에 지어진 임시 거주지는 예실리우르트보다 규모가 큰 만큼 도서관, 교육시설, 여성 전용 시설 등 다양한 시설을 갖춰 제법 마을처럼 꾸며져 있었다.

4일 찾은 이곳은 1만7000㎡ 부지에 컨테이너 1586개가 설치되어 있었다. 상주 이재민은 3500여명이다.

메흐멧 트를르 아디야만주 부지사는 이 시설에 대한 만족감을 내비쳤다. 국제사회 원조에 대해서도 “지진 직후에는 인도적 지원이 필요했지만 지금은 자급자족이 가능한 상태”라며 거절 의사를 전했다.

거주용 컨테이너에 대해서는 “진짜 집에 있다고 느낄 수 있도록 최대한 사회활동을 위한 공간을 확보했다”고 강조했다.

메르케즈의 컨테이너촌에서는 일상 복귀 후의 미래를 그리는 활동이 한창이다. 컨테이너촌 한가운데 위치한 과학 워크숍 센터에서는 이곳에 사는 7∼14세 어린이 18명을 대상으로 일반 과학·항공·인공지능(AI)·설계·기계 등 5개 과정에 대한 체험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워크숍 건물 안에는 아이들이 건전지와 전선으로 만든 자동차와 드론, 생태계와 관련된 보드 게임이 놓여 있었고 벽면에는 우주선을 그린 아이들의 그림이 붙어 있었다.
말라티아 예실리우르트 이재민 거주지에 마련된 어린이 놀이터. 예실리우르트=뉴시스
이곳의 선생님은 인근 아디야만대에서 자원봉사를 나온 학생 5명이다. 지난해 12월부터 이곳에서 자원봉사를 시작한 이들은 입을 모아 과학 수업을 통해 아이들은 물론 자신까지도 지진의 상처로부터 치유받고 있다고 말했다.

심리학 전공인 세나(21)는 “아이들이 가족과 친지를 잃어 힘든 시간을 보냈고, 아직도 예전과 같은 모습으로 회복하지 못했다”며 “내 전공을 살려 아이들을 돕기 위해 봉사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튀르키예 아디야만 메르케즈에 위치한 컨테이너 임시 정착촌 내 과학 워크숍 센터에서 4일(현지시간) 자원봉사자 선생님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아디야만대 학생 데니즈(21)·유세프(21), 그리고 가장 오른쪽이 세나(21). 메르케즈=윤솔 기자 
유세프(21)는 아이들이 “지진이 아닌 다른 일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도우려고 봉사활동을 시작했다”며 “아이들의 반응도 긍정적으로 변하고 있고, 지금은 즐거워하며 이곳에 온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시큰둥하던 아이 중에서도 지금은 드론 조종사나 과학자를 꿈꾸는 경우도 생겼다.

자신 또한 지진으로 피해를 입었다는 데니즈(21)는 “이곳에서 하는 봉사활동이 내게 ‘치료제’처럼 느껴진다”며 앞으로도 워크숍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싶다고 말했다.

예실리우르트·메르케즈·말라티아·아디야만=윤솔 기자 sol.yu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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