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화 무역 결제 가능해진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유럽 국가들은 경제적 침체에 빠졌다. 전쟁으로 생산 설비가 붕괴했을 뿐만 아니라 부족한 물자를 국제 교역을 통해 유통할 수 있는 거래 체제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독일의 국내총생산(GDP)은 1908년 수준으로 물러났고 프랑스는 1891년 수준으로 생산이 위축됐다. 영국은 전쟁 피해가 적어서 전쟁 이전의 생산능력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전후 무역 거래는 미국 달러를 기반으로 이뤄지고 있었다. 전쟁으로 보유 외환을 다 써버린 유럽 국가들은 심지어 필수재 일부를 물물교환으로 거래할 정도였다. 이러한 여건을 타개하기 위해 유럽 국가들은 1950년 7월 파리에서 유럽결제동맹(European payment union)을 결성했다. 유럽결제동맹에는 미국에서 제공한 유럽 재건 지원 프로그램인 마셜플랜의 수혜를 위해 조직한 유럽경제협력기구(OEEC) 회원국 18개국이 참가했다.
작동 원리는 간단했다. 모든 국가가 수입과 수출을 일단 유럽결제동맹에 신고하면 수출과 수입을 상계 처리하고 매달 한 번씩 잔액만 결제함으로써, 결제에 필요한 달러 수요를 최소화한 것이다. 다자간 결제 시스템을 활용해 외환 부족으로 인한 양자 간 결제상의 장애를 극복함으로써 역내 통화 협력의 성공 사례를 제시했다. 유럽결제동맹이 결성된 후 참가국 간 무역 거래는 두 배 이상으로 증가했고 전후 유럽의 경제 재건에 기여했다. 이 시스템은 유럽 국가들의 외환보유액이 증가해 자국 통화의 호환성을 확보하는 수준이 될 때까지 8년간 유지됐다. 유럽결제동맹은 1958년 12월 27일 해체되고 유럽통화협정(European Monetary Agreement)으로 역내 결제 관리 기능이 이전됐다.
1997년 아시아 외환 위기 이후 아시아 지역에서도 역내 통화를 이용한 결제 제도 도입 논의가 있었으나 개별 통화의 환율 불안과 유용성 제약으로 현실화하지 못했다. 국제통화가 아닌 지역 통화를 거래에 활용하기 위해서는 상호 발생할 수 있는 리스크를 관리하기 위해 거래 참가국 간 통화 협력이 필요하다. 최근 들어 아시아 국가 간 지역 통화를 이용한 결제를 도입하려는 움직임이 강화되고 있다.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태국 중앙은행장들은 2023년 9월 지역 통화를 이용한 결제 체제 도입에 합의했다. 인도네시아와 인도 간에도 자국 통화를 이용한 결제 제도 도입이 합의됐다.
우리나라도 이러한 흐름에 적극성을 보이고 있다. 기획재정부는 ‘2024년 경제정책 방향’에서 기업의 무역 결제에 원화 결제 시스템을 도입하겠다고 밝혔다. 아세안(ASEAN·동남아시아국가연합) 일부 국가와 원화 결제를 시행하기 위한 협상을 진행 중인 것으로도 알려졌다. 일차 대상국으로는 인도네시아, 태국, 필리핀, 베트남 등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로 한국은행은 이미 인도네시아와 지역 통화 결제 체제 도입에 합의하고 실무적인 준비에 들어갔다.
자국 통화를 무역 결제에 활용하게 되면 기업은 환전 비용을 절약하게 돼 거래 비용을 낮출 수 있으며 환위험도 피할 수 있다. 무엇보다 달러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게 돼 달러 수급 불안정에 따른 금융 위기 노출 가능성도 줄일 수 있다. 우리나라 무역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지역은 아시아 국가들인 역내다. 2023년 우리나라의 아시아 지역 수출 금액은 3355억달러(약 448조1274억원)로 총수출의 53%에 달한다. 수입 규모는 3063억달러(약 409조1249억원)에 달해 총수입의 47.6% 수준이다. 우리나라 원화로 수입 대금을 모두 지불한다면 3000억달러 이상의 달러 수요가 감소한다. 지역 통화를 이용한 결제 시스템 도입의 증가를 통해 역내 통화 협력이 확대된다면 달러 부족에 따른 만성적 위기 재발 우려를 사전에 방지할 제도적 인프라로 활용할 수 있다. 달러 수요가 감소하면 지금처럼 수천억달러의 외환보유액을 축적할 필요도 줄어든다.
기획재정부가 역내 국가 간 원화 결제 시스템 도입을 위해 ‘원화의 이체 및 처분에 관한 규제’를 특정 국가와 무역 거래에 대해 완화할 예정이라고 한다. 오랜만에 들어보는 반가운 혁신안이다. 역내 협력으로 금융시장 안정을 확대하고 우리 원화의 국제화도 진전이 있기를 기대한다.
Copyright © 이코노미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