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 에코 트레일 | 5~8구간 역사·지리·지명유래] 낙동강, 금강, 섬진강을 나누는 단 하나의 꼭지점!
낙동강, 금강, 섬진강을 나누는 산이 있다. 바로 장수 영취산(1,075.6m)이다. 영취산을 꼭지점으로 북서로 흘러내린 계곡은 모두 금강으로 흘러가고, 남서로 흘러내린 계곡은 모두 섬진강이 되고, 동으로 흘러내린 계곡은 남강이 되어 낙동강에 합류한다. 백두대간의 무수한 산 중에서도 충청, 전라, 경상도의 젖줄을 가르는 중요한 산이다. 의미를 좀더 부여하면 우리 민족의 수천 년 농경 사회를 지탱해 온 생명 젖줄의 어머니와 같은 산이다.
조선의 지리 개념이자 산 족보였던 산경표만 보더라도 계곡을 길러내고, 강의 거대한 흐름을 만들어낸 산이 어디인지 단순명료하게 알 수 있다. 이것이 백두대간의 진실이다. 땅 속 광물의 흐름의 연속이라 산이 없는 곳도 '산맥'이라 이름 붙인 고토 분지로의 지질 체계가 아닌,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의 단순명쾌한 진실이다.
영취산이란 이름은 불교 화엄경에서 유래한다. 석가모니가 화엄경을 설법한 고대 인도에 있던 산 이름이 영취산이었다. 한자 표기는 영축산靈鷲山과 취서산鷲栖山 두 가지이지만, 한글 표기는 영축산·영취산·축서산·취서산 등으로 표기되어 있다. 이것은 한자 '鷲취 또는 축' 자에 대한 한글 표기 문제에서 비롯되었다. 일반 옥편에는 '독수리 취'라고 표기되어 있으나 불교에서는 '축'으로 발음한다.
이번 대간길에서 가장 눈에 띄는 역사적인 흔적은 아막성阿莫城이다. 사치재에서 북진하다 781m봉으로 지나 복성이재로 이어진 대간길에 있다. 아막성을 처음 마주친 이는 역사에 문외한이라 해도 놀라게 된다. 보통 오래된 산성은 너덜처럼 바위더미만 남아 있는 곳이 많은데 1,000년이 넘은 산성임에도 불구하고 높이 2m 이상의 성벽이 견고하게 남아 있다.
남원과 함양의 경계이며 해발 680m 지점에 있다. 신라와 백제의 국경이 된 요충지로 602년(신라 진평왕 24)에 백제가 아막성을 침공하자 귀산貴山과 추항箒項을 보내어 백제군을 물리쳤으나 두 사람은 전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아막阿莫, 阿谷의 뜻은 주성主城·주곡主谷의 의미로, 섬진강의 계곡분지인 이 지역 특색과 중요한 방어진지라는 데에서 나왔다.
바쁘게 걷는 중에도 옛 도기 파편이 흔하게 눈에 띌 정도이니, 오랫동안 사람이 지켰던 중요했던 성임을 알 수 있다. 실제 성안에서 삼국시대의 기와조각과 백제의 도자기들이 발견되었다. 성터는 둘레가 633m에 이르며 동·서·북문 터가 남아 있다.
남원과 함양의 말투가 다르고 문화· 기후가 다른 것은 단순히 경상도와 전라도의 지역 차이가 아닌, 백두대간 때문이다. 이미 1,000년 전부터 백두대간이라는 큰 산줄기가 국경과 문화·기후를 가르며, 사람들의 삶에 뿌리 깊게 영향을 미쳐온 것이다.
봉화산으로 올라서는 길목에 복성이재가 있다. 이곳 일대의 남원 아영면과 인월면, 산내면은 흥부의 고향으로 불린다. 흥부의 성씨는 연(제비)씨 혹은 박씨로 알려졌으나 지난해 공개된 <흥보만보록(1833년)>을 보면 흥부가 무과에 급제해 덕수 장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쓰여 있다. 덕수 장씨의 시조는 고려 말 귀화한 위구르족 출신 장순룡이니, 흥부의 실제 모델이 장순룡이라는 얘기가 된다. 역사적인 사실이라기보다, 그럴 수도 있다는 안주거리 이야기다.
육십령 기슭 장수군 장계면에는 논개 생가가 있다. 논개는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1593년 진주성 싸움에서 6만 명의 관민이 모두 전사하고 성이 함락되자 촉석루에서 왜장 게야무라 로구스케를 끌어안고 남강에 몸을 던졌다고 한다. 논개에 대한 공식적인 첫 기록은 유몽인(1559~1623년)의 <어우야담>이며 이후 끊임없이 논개에 대한 논공 문제가 거론되었다.
실제 진주에 논개 사당이 지어진 것은 영조 16년(1740년)이니, 사후 150년이 지나서야 그 공을 제대로 인정받게 된 셈이다. 그녀를 영웅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조선 사회가 가진 신분의 한계는 100년이 넘도록 발목을 잡았던 것이다. 사당이 세워지고 봄가을제사를 올렸으나 그 전부터 진주에서는 논개가 죽은 6월이면 '의암별제'라는 축제를 벌였었다.
본래 논개 생가는 오동저수지가 생기면서 수몰되어 그 물가 언덕에 복원되었다. 논개 동상과 기념관 등이 깔끔하게 조성되어 있다.
육십령은 대간 종주의 중요 기점이다. 대부분의 구간 종주자들이 이곳을 기점으로 산행을 끝내거나 시작한다. 육십령은 무척 오래된 지명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신라적부터 요해지였으니 행인이 이곳에 이르면 늘 약탈당하므로 반드시 60명이 모여야만 지나가곤 했는데 그것이 이름이 되었다'고 쓰여 있다.
이번 대간길에서 가장 높은 우두머리 산은 백운산白雲山(1,278.6m)이다. 한자는 달라도 '백운'이란 이름을 쓰는 산은 전국에 60개가 넘는다. 정상 표지석 뒤에는 항상 정상에 흰 구름이 걸려 있어 이름이 유래하며, 낙동강과 섬진강을 가르는 분수령이라 적혀 있다.
백운산이란 이름은 우리 민족 고유의 사상이 담긴 이름이다. 일제치하 최남선은 식민사학에 의해 왜곡된 한국사를 불함문화론으로 바로잡고자 했다. '불함'이란 ''이며, 이것은 하늘, 태양, 신神을 뜻한다. 단군사상인 천신숭배사상()이 우리 고유의 사상으로 이것이 고대 중국과 일본으로 뻗어나갔다고 주장했다.
'' 사상의 한자어가 바로 '백白'이다. '백' 계열의 가장 신성한 산이 백두산이며, 환웅이 홍익인간의 뜻을 품고 3,000명의 무리를 데리고 내려온 곳이 태백산이라 했다. '백운'은 천계를 뜻하는 '신의 산', '신령스런 산'을 뜻한다. 예부터 이어온 산악숭배사상이 깃들어 있다. 우리나라에 산이 얼마나 많은지 산과 떼려야 뗄 수 없는 환경이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참조 <현오와 함께 걷는 백두대간(리더북스 간행)> 권태화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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