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질 사이코패스 vs 양딸 탐하는 父…누가 더 미쳤을까 [고승희의 리와인드]
스타 소리꾼 총출동해 만든 탐욕 서사
민간의 도전·국립 창극 전문가의 하모니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빨간 달이 검은 우물 속에 지글지글지글….”
지독하다. 원하는 것은 반드시 갖고야 말겠다는 광기 어린 집착이 요동친다. 뒤엉킨 욕망과 사랑 속에 결국 금기에 다다르고, 금기 따위 아랑곳 않은 욕정은 끝내 파국을 향한다.
지금까지 이런 창극은 없었다.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이다. 쉴 틈 없이 휘몰아치는 격정적 서사에 도파민이 솟구친다. 단거리 달리기를 한 것처럼 숨이 가쁘다. 오스카 와일드의 희곡을 무대로 옮긴 남성 창극 ‘살로메’(2월 2~4일, 대학로예술극장)는 희대의 막장극으로 다시 태어났다.
등장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눈꺼풀을 덜덜 떨며 ‘두더쥐 같은 눈’(오스카 와일드 ‘살로메’ 중)으로 자신을 훑어대는 양아버지 헤로데 왕의 시선에 치를 떠는 살로메. ‘은거울에 비친 하얀 장미’처럼 눈부신 살로메(김준수·윤제원 분) 공주는 ‘하얀 나비 같이 작은 손’을 움직이며 성질을 부리기 시작한다. ‘모태 금쪽이’인지, ‘후천적 금쪽이’인지 알 수 없는 인성 파탄자다. ‘이성의 끈’은 진작에 놓아버린 살로메는 원작보다 ‘레벨 업’한 ‘돌+아이’다.
이 작품의 최초 원작은 신약 성서다. 주요 등장인물은 총 다섯 명. 이들의 엇갈린 마음이 ‘총체적 난장’의 요인이다. 세례자 요한을 사랑한 유대의 공주 살로메, 살로메를 사랑하는 양부 헤로데왕(유태평양 분)과 호위대장 나라보스(정보권 분), 나라보스를 사랑한 시종 메나드(김수인 분), 메나드를 사랑한 왕비 헤로디아(서의철 분), 오직 신(神)을 사랑한 요한(김도완 분). 이 다섯 명은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제정신이 아니다.
원작을 각색한 고선웅 서울시극단 단장은 오스카 와일드의 ‘탐미주의’ 희곡을 ‘욕정의 막장극’으로 뒤바꿨다. 시종일관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원작의 묘미는 선명한 색채의 대비와 일부 대사로 옮겨왔을 뿐이다. 그가 집중한 것은 탐미(耽美)보다는 탐욕(貪慾). 이 작품은 시작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욕망과 집착, 집착이 불러올 난장의 끝으로 치열하게 달려간다. 탐욕과 집착이 드러나는 인물들을 소위 ‘센 캐릭터’로 설정하고, 100m 달리기를 하게만든 주인공은 신예 연출가 김시화다.
다섯 명의 환장 파티를 보고 있자면 함께 돌아버릴 지경이다. 살로메를 한 마디로 표현하면, ‘자기가 예쁜 걸 아는 안하무인 갑질 사이코패스’다. ‘금사빠’(금세 사랑에 빠지는 사람)인데다, 감정의 널뛰기도 심하다. 살로메가 ‘젊고 잘생긴’ 예언자 요한을 자신 앞에 데려오라며 빛나는 미모로 나라보스를 구슬리는 장면은 그녀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고선웅의 명민함은 이 대목에서도 빛난다. 오스카 와일드의 살로메는 “그대라면 해줄거야, 할거야”라며 가스라이팅을 하는 반면, 고선웅의 살로메는 “해달라”며 애교와 아양을 부린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무엇이든 하고, 원치 않는 상황을 마주하면 히스테리를 부리는 살로메 캐릭터를 더 극대화했다. “아라비아 여왕의 정원에 있는 장미”보다 하얀 몸을 탐하다가도, 요한에게 내동댕이 쳐지자 금세 “전갈이 둥지를 튼 석고” 같다며 욕설을 퍼붓는다. 그러더니 “검은 포도송이 같은 머리카락”을 사랑한다 애걸하고, “장미보다 붉은 석류 꽃 같은” 입술에 입을 맞추겠다고 사정하는 등 저 세상 정신상태를 보인다.
살로메의 대환장 고백을 보는 나라보스는 질투에 눈이 먼다. “살로메를 죽여서라도 갖겠다”고 하다가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고, 그의 동성 연인 메나드는 치욕과 분노에 눈물을 삼킨다. 이들 역시 각자의 광기의 집착을 선명히 보여준다. 심지어 요한 마저 ‘예언자로서의 권력’을 등에 업고 흉포한 비방을 늘어놓는다. “벽화 속의 사내만 보아도 눈먼 자”, “부정으로 더럽혀진 침상”이라며 헤로디아를 사지로 내몬다.
나라보스의 죽음과 함께 전반전이 지나가면 술에 잠긴 목소리로 “공주야”를 부르는 문제의 헤로데와 헤로디아가 등장한다. 시도 때도 없이 살로메의 고운 살결과 깊은 눈을 훑어대는 헤로데. 눈으로 자신의 딸을 간음하는 헤로데에게 사정없이 욕설을 퍼붓는 헤로디아는 ‘살로메’에 다른 색을 입히는 중요한 인물이다.
고선웅은 원작에 리듬감을 더해 창극의 말맛을 살렸다. 원작의 탐미적 대사를 살리면서도 호흡을 달리해 음악극에 어울리도록 매만졌다. 곳곳에 묻어난 고선웅 식의 풍자와 해학, 거기에 냉소와 비아냥까지 더해져 지독한 막장극에 난데없는 웃음이 터진다. 달을 보고 “술 취한 여자 같다”는 헤로데에게 “술에 취한 건 당신”이라며 쏘아붙이는 헤로디아의 대사는 원작엔 나오지 않는다.
‘살로메’의 명장면은 ‘일곱 베일의 춤’이다. 일곱 베일만을 몸에 걸친 채 춤을 추며, 한 겹 한 겹 옷을 벗다 나체가 되는 장면이다. 오페라 ‘살로메’에선 무용수가 등장해 이 춤을 춘다. 살로메는 4분 분량의 이 장면을 소화하며 헤로데를 유혹하고, 요한의 목을 요구한다. 춤을 추며 펼쳐드는 은빛 주름 치마는 공작처럼 화려하다.
후반부를 물들이는 것은 광란의 아리아다. 은쟁반에 담겨온 요한의 얼굴을 매만지며 그의 아름다움을 찬양하고, 사랑을 갈구하며 입을 맞춘다. 결말은 원작과 다르다. 원작에선 살로메의 죽음으로 끝이 나나 이 작품에선 모두가 죽는다. 극의 말미, 고선웅식 계몽주의가 선명하게 노출된다. “그럴 일이 아니었는데…”라는 대사를 통해서다. 뒤틀린 욕망의 막장 서사를 ‘허망한 헛짓’이라 결론짓는 마무리가 인상적이다.
모두가 욕망했다. 창극 ‘살로메’는 이 안에 품은 이야기처럼 창작진, 배우 등 모든 스태프들이 품고 있는 저마다의 욕망이 투영된 작품이다.
“남성 창극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는 김시화 연출은 이 작품이 데뷔작이다. 그는 “성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는 지금, 전통 예술 안에서도 새로운 시도를 해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김 연출가는 국립창극단의 작품 ‘귀토’의 조연출을 하며 고선웅과 호흡을 맞췄다. 남성 창극으로 ‘살로메’를 제안한 것도 고선웅이다.
‘남성 창극’은 전례 없는 시도다. 창극의 한 갈래로 태어났던 ‘여성 국극’이 전후 시대 엄청난 인기를 모았으나, 남성들만 출연하는 창극이 존재한 적은 없었다. ‘여성 국극’이 인기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전쟁으로 남성들이 사라진 시대에 무대에 설 수 있는 남성 배우가 없어 여성이 그들의 역할을 대신했기 때문이다. 국립창극단의 간판인 김준수·유태평양과 같은 스타 소리꾼, 세계적인 디자이너 이상봉이 참여한 것도 ‘남성 창극’이라는 신선한 시도 때문이다.
김시화는 영리한 연출가였다. 익히 알려졌고, 시대를 거듭하며 인기를 얻은 고전을 무대에 올리며 그만의 호흡으로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만들었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엄청난 속도감이다. 이 작품은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내달린다. 고선웅이 설계한 ‘탐욕의 세계’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조리 뒤틀린 욕망을 품는다. 의도적으로 비정상을 극대화해 강 대 강의 대립을 만들었다. 자칫 탐미와 찬양으로 점철될 수 있었던 원작의 세계를 기형적인 욕망을 그려내며 ‘통제’한 것이다.
연출의 의도가 잘 살아난 것은 작창이었다. 국립창극단 출신의 정은혜는 대본의 말맛을 살리면서, 다양한 음계를 사용해 반복되는 구절을 저마다 다르게 표현했다. 진양조에 왈츠의 3박을 더하고, 피아노와 전자기타와 같은 서양 악기에 가야금, 아쟁을 비롯한 국악기를 더해 오페라 못지 않은 웅장함이 연출됐다. 작창과 어우러지는 음악들은 뮤지컬처럼 음악극적 요소가 강화돼 시종일관 청각을 자극했다.
연출가 김시화와 작창가 정은혜는 잘 맞는 짝꿍이었다. 두 여성 창작진은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새로운 창극의 세계를 열었다. 이들은 거리낌 없이 각자의 욕망으로 작품을 밀어붙였다. 그 과정엔 자비도 배려도 없었다. 연출은 극한까지 몰아세우며 창극 배우들의 연기를 끌어냈고, 작창가는 한계를 넘어서도록 소리꾼들을 끌고 갔다. 남성 소리꾼들은 한 옥타브 반 이상 올라가는 음정을 소화하며 무대 위에서 피를 토하도록 목을 썼다. 성악가로 치면 테너에 가까운 음역대. 마지막 회차 공연에선 때때로 소리꾼들의 갈라진 목소리를 듣기도 했으나, 그것조차 파국의 한 장면처럼 연출됐다.
배우들 역시 저마다 선을 넘었다. 살로메와 헤로데의 연기가 특히 그랬다. 여성 역할만 어느덧 네 번째인 김준수는 어느 때보다 요염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정신착란 직전의 살로메를 연기했다. 요한이 갇힌 우물을 바라보며 관객에 등을 돌려 앉아있을 때에도 그의 연기는 멈추지 않았다. 요한에게 거절당한 수모를 참지 못해 흘린 분노의 눈물, 치욕에 몸부림치는 ‘등 연기’에서 김준수는 ‘공격형 살로메’의 현신이었다.
광기와 집착을 버무린 역할은 처음이라는 헤로데 역(役) 유태평양의 연기는 입체적이었다. 술에 취해 양딸을 탐하는 징글맞은 모습부터, 형을 죽이고 그의 아내를 취한 벌을 받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미쳐가는 왕의 내면이 대사와 표정에 묻어났다. 재즈와 국악을 오가며 음절마다 저마다의 소리로 달리 표현하는 능력은 단연 압권이었다. 헤로디아의 존재감도 상당했다. 선 굵고 다부진 헤로디아 역 서의철은 자기밖에 모르는 왕비의 태도를 거침없는 걸음걸이 표정, 과장된 웃음소리로 매만져 보여줬다.
이 작품은 철저하게 ‘선택과 집중’을 통해 움직였다. 창극의 묘미를 잘 살린 대본, 대본을 극대화한 연출, 음악의 정수, 배우들의 호연에 집중했고 그외의 요소들은 모두 걷어냈다. 무대 연출은 커다란 우물과 붉은 달이 전부였다. 오로지 배우의 힘으로 끌고 가는 무대였다. 다만 ‘일곱 베일의 춤’에서 코러스 다섯 명이 휘날리는 천, 이들의 동선과 방청객 같은 반응은 다소 촌스러웠다.
‘2023 공연예술창작산실 올해의 신작’ 선정작인 남성창극 ‘살로메’의 가장 큰 의의는 국립단체의 울타리를 넘어 민간에서 이뤄진 새로운 시도라는 데에 있다. 예산 부족으로 수준 높은 창극을 올리는 것이 쉽지 않아, 민간 단체의 창극은 언제나 국립창극단의 작품과 비교되기 일쑤였다. 하지만 ‘살로메’는 창작산실을 통해 신선한 도전을 할 수 있었다.
도전에만 그친 게 아니다. 이 프로젝트를 위해 국립창극단의 간판 스타들과 창극단에서 꾸준히 작업한 스타 연출가 고선웅, 음악감독 이아람, 국립창극단의 작창가 프로젝트 출신 서의철, ‘패왕별희’로 주목받은 정보권 등 드림팀이 뭉쳤다. 덕분에 ‘국립’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하기 힘든 이야기를 높은 수준의 공연으로 이끌어내는 등 창극의 확장 가능성을 보여줄 수 있었다. 무엇보다 새로운 창극 시대를 이끌 역량있는 작창가와 연출가를 발굴한 것은 이번 창작산실의 가장 큰 성과다.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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