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헤어질 결심’을 인정하자 [정의길의 세계 그리고]
남북한의 국가 관계를 인정하는 현실주의에 입각해, 한반도와 그 주변의 세력 균형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남북한의 화해나 통일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남북한의 공존과 그 이후를 내다보는 현실주의이다.
정의길 | 국제부 선임기자
지난해 7월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이 남쪽을 ‘대한민국’이라고 칭한 이후 북한의 남한과 ‘헤어질 결심’이 굳어지고 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지난 1월15일 ‘대한민국’이 “철두철미 제1의 적대국, 불변의 주적”임을 자신들의 헌법에 반영하고, “공화국(북)의 민족역사에서 ‘통일’, ‘화해’, ‘동족’이라는 개념 자체를 완전히 제거해버려야 한다”고 말했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 ‘헤어질 결심’과 이를 패러디한 ‘전쟁할 결심’이라는 말이 남북관계에서 밈처럼 떠돌고 있다. 김 위원장은 “우리는 결코 조선반도에서 압도적 힘에 의한 대사변을 일방적으로 결행하지는 않겠지만, 전쟁을 피할 생각 또한 전혀 없다”(1월8~9일 군수공장 현지지도), “적들이 건드리지 않는 이상 결코 일방적으로 전쟁을 결행하지는 않을 것”(최고인민회의 연설)이라고 말했다.
한·미의 당국자들도 북한의 헤어질 결심에 방점을 찍는다. 미국의 대북한 정책을 총괄하는 정 박 대북고위관리는 2일 연합뉴스와 한 회견에서 “북한이 직접적인 군사 행동을 하려고 한다는 징후는 보이지 않는다”며 “이전과 다른 점들이 있는데 가장 큰 차이는 북한과 러시아의 관계”라고 지적했다. 그는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한 북-러 전략적 관계 형성으로 “북한 문제는 인도·태평양 지역에만이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매우 중요해졌다”고 부연했다.
북한이 남북한 관계를 하나의 민족으로서 통일될 관계에서 적대적인 국가 관계로 바꾸는 헤어질 결심을 하고, 이를 방해하면 ‘전쟁할 결심’도 불사하겠다는 것이다. 정 박 대북고위관리의 지적처럼 북한의 헤어질 결심은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한 국제정세 변화를 배경으로 한다.
북한은 1990년대 초반 사회주의권 붕괴로 중·러와의 연대와 지원이 끊기자, 핵 개발을 고리로 미국과 관계를 개선해 고립에서 탈피하고자 했다. 지난 30년 이상 동안 단속적으로 진행된 북한의 핵 개발을 둘러싼 북-미 협상의 정점은 2018년 김정은-도널드 트럼프의 북-미 정상회담이었다. 하지만 이 정상회담의 실패 이후 북한은 핵무력만 손에 쥔 채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등 각종 미사일 시험발사로 일관했다. 북-미 정상회담을 중재한 문재인 당시 대통령에 대해 ‘삶은 소대가리’라고 극언을 하는 등 한국과 미국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접었다.
미-중의 전략적 대결이 격화되는 가운데 발발한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은 북한에 새로운 공간을 열었다. 러시아에 대한 미국의 제재는 오히려 중·러가 추구하던 다극화 체제에 불을 댕겼다. 제재는 무력화되며 미국의 패권에 기댄 ‘자유주의적 국제질서’에 균열이 생겼고, 중·러는 글로벌사우스 국가와 함께 다극화 체제의 공간을 확장하고 있다. 윤석열 정부 이후 한국이 미-일 동맹 쪽을 향해 일방적으로 기울어졌는데, 이는 중·러로 하여금 북한의 전략적 가치를 새롭게 제고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한국이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우회 지원한 것도 러시아를 자극했다.
지난해 9월 김정은의 러시아 방문과 양국 정상회담은 1990년대 이후 북-중-러 북방 삼각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변곡점이었다. 북한은 러시아와의 전략적 관계 재구축으로 군사적으로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새로운 공간을 열었다. 북한은 중·러가 추구하는 다극화 체제에서 중요한 일원으로 부상했다. 북한은 미국과 일본 등에 관계 개선을 읍소하던 외톨이 신세에서 벗어났다. 북한이 한국과 헤어질 결심을 하고, 미국과의 대화에 연연하지 않는 배경이다.
남북한은 사실 국제사회에서 엄연한 주권국가들이다. 남북한도 1972년 7·4 공동성명 이후 서로를 국가로 인정하며 공존을 추구해왔다. 다만, 통일될 수도 있다는 특수관계로 서로를 규정했다. 북한은 이제 한국이나 미국과 거래할 이점이 없다고 판단했고, 실제로 그런 상황이기도 하다. 북한이 한국과 전쟁할 결심이 아니라 헤어질 결심이라면, 이제 이를 인정할 도리밖에 없다.
북한의 헤어질 결심은 따지고 보면, 두개의 한국이라는 현실을 공식화한 것뿐이다. 진보 진영의 민족통일론이나 보수 진영의 반공통일론 모두가 사실 언제부터인가 현실성이 떨어지는 이상주의였을 뿐이다. 북한은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는 국가이고, 우리는 이런 북한이라는 국가와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할지를 숙고해야 한다.
그 해답은 남북한의 국가 관계를 인정하는 현실주의에 입각해, 한반도와 그 주변의 세력 균형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남북한의 화해나 통일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남북한의 공존과 그 이후를 내다보는 현실주의다.
E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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