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정 “롤모델? 각자의 삶과 연기에 충실하라”

하은정 우먼센스 대중문화 전문기자 2024. 2. 5.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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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도그데이즈》로 국내 스크린 복귀한 윤여정 “타고난 게 없어 무지 연습하고 대사 외운다”

(시사저널=하은정 우먼센스 대중문화 전문기자)

《미나리》로 9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데 이어 글로벌 프로젝트 《파친코》를 통해 전 세계를 사로잡은 배우 윤여정이 《도그데이즈》를 통해 국내 스크린에 복귀한다. 《도그데이즈》는 반려견을 통해 연결되면서 변화하는 다양한 인물의 이야기를 그린 옴니버스 영화다. 극 중 윤여정은 은퇴한 후 반려견 완다와 생활하는 세계적인 건축가 민서를 연기했다. 특유의 당당하고 세련된 매력으로 전형성에서 탈피한 현대적인 노년의 캐릭터다. 《미나리》 이후 오랜만에 국내 관객을 만나는 윤여정을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CJ ENM 제공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탄 후 한국에서의 영화 작업이 오랜만이다.

"살아있었다(웃음). 지난해 6월까지 《파친코》 촬영을 한 후 건강검진을 받으며 작정하고 쉬었다. 이 나이에 해외를 오가며 일한다는 게 체력적으로 정말 힘들더라."

상을 탄 후에 달라진 점이 있나.

"나가서 조사하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일단 이렇게 인터뷰 자리에 많은 기자가 와준 것부터가 달라진 점이다(웃음). 해외에 나가면 어디를 가나 '아카데미 위너'에 대한 존중이 굉장해서 놀랄 때가 많았다. 그리고 예전보다 들어오는 대본이 많다. 그렇다고 너무 많지는 않고, 이 나이에 비해 많다. 대부분 주인공인데, 인생을 많이 산 사람으로서 오히려 씁쓸했다. 배우로서 활동을 쭉 해온 사람인데 상을 탔다는 이유로 주인공으로 등급을 올려주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오래 연기를 했지만 이런 스타 대접을 받진 못했었다."

많은 시나리오 사이에서 《도그데이즈》를 선택한 이유도 궁금하다.

"이 나이에 시나리오도 좋고 캐릭터도 좋고 감독도 좋은 작품이 오는 경우는 드물다. 산 좋고 물 좋고 정자까지 좋은 곳이 어디 있겠나. 이번 작품은 오직 김덕민 감독과의 의리로 선택했다. 김 감독과는 《그것만이 내 세상》(2018)에서 만나 전우애 같은 게 있다. 김 감독이 19년이나 조연출 생활을 해서 가슴이 아팠고, 입봉작에 무조건 참여하겠다고 결심했었다. 돈도 시나리오도 안 보고 오로지 감독만 보고 출연했다. 내가 믿고 있는 친구다."

배역과 싱크로율은 어느 정도인가.

"애초엔 배역 이름이 '윤여정'이었다. 김 감독이 수완이 좋다. 푹 쉬고 싶었는데 '선생님, 이건 하셔야죠. 이름이 윤여정이라 다른 사람을 캐스팅할 수 없어요'라고 하더라."

그래서인지 영화 속에 실제 선생님이 했을 법한 대사가 많더라. 애드리브도 있었나.

"나는 대사를 수정하는 배우들을 싫어한다. 작가가 며칠 밤을 새워가며 고치고 또 고친 글을 바꾸면 안 된다. 옛날에는 소설가들이 대본을 많이 썼다. 살얼음판 같은 시절이었다. 당시엔 애드리브로 대본을 고친다는 건 상상도 못 했던 때다. 나는 구식 배우라 여전히 그 생각을 가지고 있다. 특히나 김수현 작가의 작품으로 훈련받은 배우들은 절대 그런 걸 안 한다."

《파친코》라는 작품이 지금껏 회자되곤 한다. 출연 과정도 궁금하다.

"소설도 좋게 읽기도 해서 내가 하고 싶다고 한 작품이다. 한데 그쪽에서 오디션을 보라기에 포기하고 있었는데 다시 연락이 왔다. 역할이 좋았다. 내가 맡은 선자라는 인물은 김치 장사를 하면서도 자존감이 있는 여자였다. 공부를 많이 하고 돈이 많다고 자존감이 있는 건 아니다. 자존감은 자존심과는 또 다르다. 내가 그 자존감을 표현할 수 있겠다 싶었다."

'자존감'이라는 단어는 윤여정이라는 배우의 삶과도 일맥상통한다.

"맞다. 나에게 자존감은 중요하다. 친절과는 또 다르다. 친절과 비굴을 같이 가져가는 사람이 있는데, 난 친절한 사람은 못 돼도 비굴한 사람은 아니다. 어려서부터 누구한테 잘 보여서 뽑히고 그런 게 싫었다. 그냥 잘해서 뽑히고 싶다. 그래서 극 중에서 김치 장사를 하는 선자에게도 내 정신을 넣고 싶었다."

윤여정에게 힐링은.

"좋은 친구들과 와인 마시며 수다를 떨 때가 좋다. 덧붙여 늙을수록 외로워야 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누군가에게 의지하면 실망하기 마련이다. 외로움도 연습을 해야 하는데 난 워낙 혼자 있는 걸 좋아해서 외로움에는 자신이 있다. 독립된 삶을 좋아한다."

평생 연기를 해왔다. 윤여정에게 연기는 어떤 의미일까.

"나는 배우로서 특별한 목표가 없다. 그저 오래 하니까 일상이 됐다. 일상을 못 살면 죽는 거다. 책에서 자기 일을 하다가 죽는 게 가장 행복한 죽음이라는 문구를 본 적이 있다. 누군가는 '무대에서 죽겠다'는 극적인 말도 하곤 하지만 나는 그런 성격은 못 된다. 하지만 인간에겐 일상을 이어가는 게 중요한 것 같다."

ⓒCJ ENM 제공

롤모델로 선생님을 꼽는 배우가 많다.

"내 실체를 몰라서 그렇다. 조금 부담스럽기도 하다. 글쎄, 내 생각은 그렇다. 각자 자기 인생을 살아야지 꼭 롤모델이 있을 필요가 있나 싶다. 언젠가부터 롤모델이라는 단어가 유행어처럼 쓰이는 것 같다. 나도 롤모델이 없었고 후배들도 없기를 바란다. 윤여정이라는 배우는 한 사람이면 된다. 나는 내 연기를 하고, 그분들도 그분들 연기를 해야 한다."

좋은 어른이란 어떤 것일까.

"좋은 어른이 아니라서 모르겠다. 사람들이 날 롤모델로 추켜세우기도 하는데 사실 난 그런 거 안 믿는다. 세상을 많이 살아봐서 안다. 안 속는다."

일흔을 넘긴 나이에도 여전히 왕성하게 활동한다. 체력 관리의 비결도 궁금하다.

"10년 전부터 주 2~3회씩 트레이너와 꾸준히 운동한다. 트레이너가 말하길 나더러 우등생이라고 하더라. 난 성실하지 않은 꼴을 못 본다. 배우의 일은 육체노동이다. 혹한 직업이다. 현장에서는 나를 경로우대 해줄 수 없다. 그래서 평소에 잘 쉬고 운동하며 에너지와 체력 관리를 한다."

데뷔 이후 6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아직도 해보고 싶은 역할이 있나.

"그런 건 없다. 새로운 역할보다 '어떻게 다르게 할 것인가'를 연구한다. 주위에 미모든 재능이든 타고난 사람이 많다. 한데 나는 타고난 게 없다. 그걸 일찍 깨달아서 열심히 했을 뿐이다."

그런 노력 끝에 아카데미상을 받았다.

"그건 불가사의한 일이었다(웃음). 결국 지름길은 없는 것 같다. 타고난 게 없어서 무지 연습하고 대사를 외운다. 타고난 재능을 가진 피아니스트 조성진도 죽었다 깨어나도 하루에 4~5시간 연습을 한다더라. 재능이나 재주는 잠깐 빛날 수 있지만 유지는 꾸준히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다."

요즘 영화 산업이 어렵다.

"작은 영화가 많이 제작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땅덩어리가 작은 이 나라에서 작품에 몇백억 제작비를 들이는 건 너무 과하다. 나는 보잘것없고 늙은 사람이라 여러분들이 아는 세상과 다를 수도 있다. 해외 작품들과 견주려면 제작비를 투자하는 것도 맞지만, 돈을 아껴 썼으면 좋겠다. 내가 출연료를 많이 받는 배우가 아니라 질투 나서 그러는 건 아니다(웃음). 다양성 있는 조그만 영화가 많이 나오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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