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료 어려운 자가면역질환, 새 치료법 나올까
과학자들이 신체의 면역계가 자신의 세포와 조직을 외부의 것으로 인식해 파괴하면서 발생하는 질환인 '자가면역질환'을 치료할 실마리를 찾았다. 임상시험 단계로 접어든 치료법도 등장하면서 '불치병'으로 여겨졌던 자가면역질환 환자에게 새 희망이 될 수 있을지 주목된다.
자가면역질환은 체내의 세포와 조직을 '외부 물질'로 인식한 면역계가 이들을 공격하면서 발생한다. 전신홍반성낭창, 류마티스 관절염, 다발성경화증 등이 대표적인 예다. 지난해 5월 국제 학술지 '사이언스'는 "전 세계 인구의 약 5%가 80종 이상의 자가면역 질환을 겪고 있다"고 했을 정도로 많은 이들이 자가면역질환으로 고통받고 있는 상황이다.
질환의 증상을 완화하려면 신체의 면역 반응을 억제해야 한다. 문제는 면역 반응을 억제하면 바이러스 감염 등 다른 질환의 감염에 취약해진다는 점이다. 면역력이 약해져 암 발생 위험이 높아지기도 한다. 자가면역질환의 치료가 어려운 이유다.
클라우스 라예브스키 독일 막스델부뤼크 분자의료센터 교수가 이끄는 연구팀은 문제가 있는 유전자 염기를 교정하는 유전자가위 기술로 면역세포인 기억-T세포의 능력을 회복해 자가면역질환의 하나인 '혈구탐식성 림프조직구증(HLH)'을 치료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연구결과를 2일(현지시간) 국제학술지 '사이언스 면역학'에 발표했다. 완치가 어려운 HLH은 세포찌꺼기, 암세포, 비정상적 단백질 등을 집어삼켜 분해하는 '대식세포'가 과도하게 활성화되며 발생한다. 몸살 반응처럼 가벼운 증상으로 발현됐다가 갑자기 악화되며 사망에 이를 수도 있다고 알려져 있다.
기억-T세포는 바이러스에 감염되거나 백신을 접종받고 나서 몸속에 생기는 세포다. 병원체에 감염되면 면역반응이 나타나면서 면역세포인 T세포가 생긴다. 이중 일부는 기억-T세포로 분화해 몸속에 오랫동안 머문다. 최초 병원체와 유사한 병원체가 다시 침입하면 면역반응이 더 빠르게 나타나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라예브스키 교수 연구팀은 기억-T세포를 복구해 생체 내에서 혈구탐식성 림프조직구증(HLH)을 포함해 HLH과 유사한 질병을 예방할 수 있는지 살펴봤다. 연구팀은 엡스타인바 바이러스(EBV)로 발생하는 HLH을 치료하기 위해 바이러스에 감염된 실험 쥐의 기억-T세포를 회복할 수 있는 유전자가위 시스템을 설계했다. 먼저 쥐에게 면역력이 과하게 활성화되도록 한 뒤 EBV와 관련된 기억-T세포를 제거했다. 이어 기억 T-세포를 다시 쥐에 주입하자 염증 반응 없이 EBV에 감염된 문제 세포가 사멸되는 결과가 나왔다. 연구팀은 "T세포를 필요에 따라 제거하고 회복하는 방법으로 면역 관련 질환을 치료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간에 남겨진 세포의 잔해를 활용해 다발성경화증을 치료할 수 있는 방법도 제시됐다. 다발성 경화증은 만성 염증 질환이다. 염증 세포가 척수 등에 침투하며 발병한다. 제프리 후벨 미국 시카고대 교수 연구팀은 지난해 국제 학술지 '네이처 바이오메디컬 공학'에서 간에 저장된 세포 파편의 '당 성분'을 통해 다발성 경화증을 유발하는 단백질을 간으로 유인할 수 있다는 연구결과를 내놨다. 간은 장에서부터 외부 항원을 운반하는 모든 혈액이 여과되는 곳이다. 질환의 요인이 되는 단백질의 움직임을 인위적으로 지시해 치료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연구팀의 치료법은 임상 1상을 거쳐 임상 2상 시험에 돌입했다.
독일 에어랑엔대 연구팀은 2022년 9월 전신성 홍반성 루푸스를 앓는 자가면역질환 환자를 대상으로 CAR-T 치료제를 적용했다. 환자의 혈액에서 추출한 T-세포에 특정한 암 항원을 인식하는 수용체를 주입해 표적으로 삼은 암세포를 사멸시키는 방법이다. 연구팀은 치료제 주입한 환자의 몸에서 항체를 생산하는 B세포가 몇 달 내로 재생됐다고 국제 학술지 '네이처 메디신'을 통해 밝혔다.
페레 산타마리아 캐나다 캘거리대 미생물학과 교수는 지난달 23일(현지시간) 국제 학술지 '네이처'와의 인터뷰에서 "자가면역질환의 치료를 위해 질병의 근본적인 메커니즘을 찾아야 했기 때문에 20여년이 소요됐지만 이제 좋은 기회가 찾아 왔다"고 전했다.
[박건희 기자 wisse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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