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민준의 골프세상] 기대하지 마라, 그러면 얻을 것이다
[골프한국] 아름다운 샷은 빈 마음에서 나온다. 힘찬 샷이 힘이 빠진 상태에서의 부드러운 동작에서 나오듯 아름다운 샷은 거의 투명에 가까울 정도의 빈 마음에서 태어난다.
'오늘은 잘 해봐야지!' '저 친구한테는 지지 말아야지!' '지난번 참패를 설욕해야지!' '오늘은 기어코 90대를 깨야지!' 등의 각오로 티잉 그라운드에 서면 어김없이 쓰디쓴 맛을 보게 되는 게 골프다.
골프에서 욕심만이 만병의 근원은 아니다. 욕심 대신에 다른 생각이 차 있다면 역시 좋은 결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스스로 감탄이 나올 정도의 멋지고 아름다운 샷은 우연히 나오기 마련이다. 아무 생각 없이 툭 쳤는데 볼은 경쾌한 타구음을 내며 멋진 포물선을 그리고 허공을 날아간다. 작심하고 쳐서 마음에 드는 샷이 나오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선이나 정신훈련을 안 해본 사람이라도 가끔 아무 생각이 없을 때가 있다. 스윙하는 순간 이런 상태가 되면 근육들은 가장 순수한 기억들만 가지고 아름다운 샷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여기서 아무런 생각이 없다는 것은 욕심이나 전의(戰意)는 물론 좋은 기억까지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다. 적어도 샷을 하는 순간만은 공(空)에까지는 못 미치더라도 무념무상(無念無想)에 가까운 상태가 되어야 아름다운 샷을 만들어낼 수 있다.
전 홀의 버디 퍼팅이나 기막힌 벙커 샷은 물론 악몽의 3퍼트나 연속 OB도 마음에 남아 있어서는 안 된다. 적어도 샷 하는 순간에는 좋았던 일은 비슷한 결과를 바라는 욕심이나 요행심을 깃들게 하고 나빴던 일은 마음을 강박관념과 전의의 불바다로 만들어버린다.
낙천가에다 심한 건망증이 있다면 그는 아마 천부적인 골퍼의 자질은 갖춘 셈이다. 부단한 육체의 훈련을 감내할 수 있는 인내심도 이보다 더 골프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 것이다.
골프장에서 일상사를 잊고 골프에 몰두하듯 골프를 하면서 골프를 잊어버린다면 아마 최고의 경지가 될 것이다. 좋은 결과든 나쁜 결과든 가능한 한 지난 것은 잊어버리고 마음을 비워야 한다는 뜻에서 골프는 망각의 게임이다.
누가 얼마나 지난 홀의 결과를 빨리 잊어버리고 백지상태에서 새로운 그림을 그리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
호주의 백상어 그레그 노먼은 당대 최고의 골퍼 중 한 사람이다. 그가 공저로 지은 '타수를 줄일 수 있는 100가지 즉석 레슨(Instant Lessons- One Hundred Ways to Shave Strokes off Your Golf Game'이라는 골프 교습서가 있다. 이 교습서에서 노먼은 골프를 잘 칠 수 있는 비결, 즉 스코어를 줄일 수 있는 비결을 소개하는데 특히 마지막 100번째 레슨이 백미다.
100번째 레슨의 제목이 '모든 것을 털어 버려라'다. 그동안 가르친 비결들은 물론 골프와 관련된 악몽들을 모두 잊으라는 것이다.
노먼은 이렇게 실토하고 있다. "우리는 모두 골프를 사랑하지만 골프는 항상 우리가 사랑하는 만큼의 사랑을 되돌려주지 않는다. 당신에게 일어날 수 있는 얄궂은 운명에 대해 나보다 더 많이 아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는 결코 나의 승리를 가로막았던 선수들의 망령이나 그들의 기적 같은 샷에 대한 악몽을 완전히 털어 버리지 못하고 있다. 지난 몇 년 동안 내가 배운 것은 골프에는 여러분이 제어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노먼은 이렇게 당부한다. "여러분은 이기는 것보다는 패배하는 경우가 더 많다. 당신이 주말골퍼라면 좋은 샷보다는 나쁜 샷이 훨씬 더 많을 것이다. 그 모든 것을 털어 버려라. 잠시 옆으로 물러나 심호흡을 하고 눈을 감아라. 그리곤 그동안 일어난 모든 저주스러운 것들을 잊어라. 골프코스에서 분노나 자기연민을 위한 피난처는 없다. 당신이 가능한 한 빨리 평정과 결단을 되찾을수록 좋은 샷이 빨리 되살아난다."
그러면서 노먼은 필드에서 최악의 사태를 맞을 때 1946년 US오픈 참피언인 로이드 맨그럼의 말을 떠올리라고 말한다. "골프는 너의 인생도, 사랑하는 아내도 아니다. 단지 게임일 뿐이다."
추락은 언제나 있다. 아무리 탁월한 기량을 갖춘 골퍼라도 믿기지 않을 정도로 무참하게 무너지는 게 골프다. 도저히 흔들릴 것 같지 않은 사람도 사소한 미풍에 마음의 평정을 잃고 혼미에 빠질 수 있다. 그러나 진정한 골퍼는 추락하면서도 살아남는다. 노먼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것은 추락의 순간, 모든 것을 털어 버리는 능력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마치 악몽을 꾸다가 꿈에서 깨어나 안도의 숨을 몰아쉬듯."
채근담(菜根譚)은 중국 명나라 말엽 유학자 홍응명(洪應明)이 쓴 책으로 유교의 사상을 중심으로 노장(老莊)철학과 禪 사상을 접합시켜 인간이 추구해야 할 길을 제시하는 주옥같은 350구절을 담고 있다.
채근담에 '風來疎竹(풍래소죽) 風過而竹不留聲(풍과이죽불류성), 雁度寒潭(안도한담) 雁去而潭不留影(안거이담불류영) 故 君子(고 군자) 事來而心始現(사래이심시현), 事去而心隨空(사거이심수공).'이란 구절이 있다.
뜻을 풀면 '성긴 대숲에 바람이 불어오지만 바람이 지나가면 대숲에는 소리가 남아 있지 않다. 기러기가 차가운 연못을 지나지만 기러기가 지나간 연못에는 그림자도 남아 있지 않다. 이처럼 군자는 일이 생기면 비로소 마음이 일어나지만, 일이 지나고 나면 마음도 따라서 비워진다.
여기서의 군자의 마음 자세가 바로 골퍼에게 필요한 것이 아닐까.
*칼럼니스트 방민준: 서울대에서 국문학을 전공했고, 한국일보에 입사해 30여 년간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30대 후반 골프와 조우, 밀림 같은 골프의 무궁무진한 세계를 탐험하며 다양한 골프 책을 집필했다. 그에게 골프와 얽힌 세월은 구도의 길이자 인생을 관통하는 철학을 찾는 항해로 인식된다.
*본 칼럼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의견으로 골프한국의 의견과 다를 수 있음을 밝힙니다. *골프한국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길 원하시는 분은 이메일(news@golfhankook.com)로 문의 바랍니다. / 골프한국 www.golf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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