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산 본진서 전라우수군 빼겠다니…체찰사 계책 무지하다”
- “진도·제주를 성원하라” 명령
- 이억기도 “가겠다” 동조해
- 전력약화 초래할 판단에 우려
- 경상·전라 일부 군영 아전들
- 백성 괴롭힌 죄로 엄벌 처해
2월17일[3월15일] 흐림.
나라 제삿날(세종의 제사)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식후에 아들 면이 본영으로 가고 박춘양과 오수는 조기 잡는 곳으로 갔다. 어제의 취기로 인해 몸이 몹시 불편했다. 저녁에 흥양현감이 와서 이야기하다가 저녁밥을 함께 먹었다. 미조항첨사 성윤문의 문안 편지가 왔는데, “방금 관찰사의 공문을 받고 바로 진주목사로 부임하게 되어 인사드리러 가지 못했고, 자기 후임은 황언실이 맡게 되었다”고 했다. 새 웅천현감 김충민의 답장이 왔는데 임금의 유서를 아직 받지 못했다고 한다. (전 현감 이운룡은 경상좌수사를 제수받았고 자신은 웅천현감으로 제수받았으나 아직 유서와 밀부를 받지 못했다는 말임) 이날 저물녘에 서풍이 크게 불어 밤새도록 그치지 않았다. 본영으로 떠나간 아들을 생각하니 걱정이 된다. 답답함을 어찌 다 말하랴. 봄기운이 사람을 한없이 노곤케하는구나.
2월18일[3월16일] 맑음.
식후에 나가 공무를 봤다. 서풍이 크게 불었다. 체찰사의 비밀 공문이 3통 왔다. 하나는 제주를 구원하기 위해 군사를 지원하는 일에 관한 것이고, 또 하나는 영등포만호 조계종을 심문하는 일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진도 진선을 아직은 독촉하여 모으지 말라는 것이었다. 저녁에 김국이 서울에서 들어왔는데 비밀 공문 2통과 책력 1권 그리고 기별지(소식지)를 가지고 왔다. 황득중이 철물을 실어다 바쳤다. 절(節)이 술을 가지고 왔다. 땀이 온 몸을 적셨다.
2월19일[3월17일] 맑음.
맑았으나 바람이 크게 불었다. 아들 면이 잘 갔는지 몰라서 밤새 걱정했다. 이날 저녁에 들으니, 낙안의 군량선이 바람에 막혀 사량에 대었는데 바람이 자면 출발한다고 했다. 이날 새벽에 경상도 진에 있는 항왜들을 묶어 와서 이곳에 있는 난여문(亂汝文 : 南汝文) 등을 시켜 목을 베게 했다. 경상수사 권준이 왔다. 장흥부사(배흥립) 웅천현감(김충민) 낙안군수(선의문) 흥양현감(홍유의) 우우후(이정충) 사천현감(변속) 등과 같이 부안에서 온 술을 마시며 이야기했다. 황득중이 가져온 총통 만들 쇠를 전부 저울로 달아 보관케했다.
2월20일[3월18일] 맑음.
이른 아침, 조계종이 형풍 수군 손풍련으로부터 소송을 당했기 때문에 대면 진술하려고 여기에 왔다가 돌아갔다. 늦게 나가 공무를 보고 공문을 처리하여 보냈다. 손만세가 입대(入隊)에 관한 공문을 사사로이 만든 죄를 처벌했다. 오후에 활 7순을 쏘았다. 낙안, 녹도만호(송여종)도 와서 같이 쏘았다. 비가 올 것 같다. 새벽엔 몸이 노곤했다.
2월21일[3월19일]
새벽부터 궂은 비가 내리다 늦게 그쳤다. 나가지 않고 혼자 들어앉아 있었다.
2월22일[3월20일] 맑음.
맑고 바람도 없었다. 아침식사를 하고 나가 공무를 보니 웅천현감 흥양현감이 와서 봤다. 흥양은 몸이 불편하다고 먼저 돌아갔다. 우우후 장흥부사 낙안군수 남도포만호(강응표) 가리포첨사(이응표) 여도만호(김인영) 녹도만호(송여종)가 와서 활을 쏘기에 나도 쏘았다. 손현평도 왔다. 다들 몹시 취하여 헤어졌다. 이날 밤에도 땀을 흘렸다. 봄기운이 사람을 노곤하게 했다. 강소작지가 그물을 가지러 본영으로 갔다. 충청수사(선거이)가 화살대를 가져와 바쳤다.
2월23일[3월21일] 맑음.
일찍 아침을 먹고 나가 공무를 보고, 둔전의 벼를 다시 되질하였다. 새로 지은 창고에 쌓은 것이 167섬으로, 줄어든 것이 48섬이다. 늦게 거제현령(안위) 고성현령(조응도) 하동현감(최기준) 강진현감(나대용) 회령포만호(민정붕) 등이 와서 고성에서 가져온 술을 같이 마셨다. 웅천현감도 저녁에 와서 다들 몹시 취했다. 밤 10시쯤 자리를 파하고 돌아갔다. 하천수 이진도 왔다. 방답첨사가 들어왔다.
2월24일[3월22일] 맑음.
식후에 나가 공무를 보고 둔전의 벼를 다시 되는 것을 감독했다. 우수사(이억기)가 들어왔다. 오후 4시경 비바람이 크게 일었다. 둔전의 벼를 다시 된 결과, 창고에 들여 쌓은 것이 170섬으로, 줄어든 것은 30섬이다. 낙안군수(선의문)가 갈렸다는 기별이 왔다. (선의문이 파직되고 임계영이 후임으로 온다.) 방답첨사(장린) 흥양현감이 왔다. 본영으로 배를 내 보내려다가 비바람으로 인해 중지했다. 밤새도록 비바람이 그치지 않았다. 몸이 무겁고 노곤했다.
2월25일[3월23일]
비가 오다가 정오 쯤에 개었다. 아침에 장계 초안을 수정했다. 늦게 우수사가 오고 나주판관(원종의)도 와서 봤다. 장흥부사(배흥립)가 와서 “수군의 업무 수행이 어려운 것은 관찰사(홍세공)가 방해하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이진이 둔전으로 돌아갔다. 춘절 복춘 사화가 본영으로 돌아갔다.
2월26일[3월24일] 맑음.
아침에 맑다가 저물 무렵 비가 내렸다. 늦게 대청에 나갔다. 여도만호와 흥양현감이 와서 영리(營吏)들이 백성을 침해하는 폐단을 말했다. 놀라운 일이다. 바로 양정언과 영리 강기경, 이득종, 박취 등을 중죄로 다스리는 동시에 경상도와 전라도의 못된 영리들을 잡아 들이라고 전령을 냈다. 경상수사가 보러 왔다. 조금 있으니 견내량의 복병이 달려와서 보고하기를 “왜적선 한 척이 견내량을 거쳐 들어와 해평장에 도착하려 할 때 정박하지 못하게 했다”고 하였다. 둔전에서 받아들인 벼 230섬을 다시 되질하여 보니 32섬이 줄어 198섬으로 바로잡았다. 낙안군수와 이별주를 나누고 그를 전송했다.
2월27일[3월25일]
흐리다가 늦게 개었다. 녹도만호 등과 함께 활을 쏘았다. 흥양현감이 휴가를 받아 돌아갔다. 둔전에서 받아들인 벼 220섬을 다시 되질하니 여러 섬이 줄었다.
2월28일[3월26일] 맑음.
아침 일찍 침을 맞았다. 늦게 나갔더니 장흥부사(배흥립)와 체찰사의 군관이 이곳에 이르렀는데, 장흥부사는 종사관이 전령을 가지고 자기를 잡아갈 일 때문에 왔다고 한다. 또 전령 중에는 “전라도 수군 안에서 우도의 수군이 전라좌·우도를 왔다갔다 하면서 제주와 진도를 성원하라”는 명령도 있다고 한다. 우스운 일이다. 조정의 지도자가 이럴 수 있는가. 체찰사로서 계책을 내놓는다는 것이 참으로 무지하다. 나라의 일이 이러하니 어찌하랴, 어찌하랴. 저녁에 거제현령(안위)을 불러와 일을 물어본 뒤에 바로 돌려 보냈다.
※전라우수군이 한산도를 떠나 진도와 제주를 성원하면 수군의 본진이 약해져 적의 대세를 막을 수 없음이 명백한데도 우수사와 체찰사가 이 같은 계책을 세웠다 하니 이순신은 기가 막혔다. 체찰사의 무지뿐만 아니라 이억기의 안일한 근무태도를 몹시 못마땅하게 여겼다.
2월29일[3월27일] 맑음.
아침에 공문의 초안을 수정했다. 식후에 나가 공무를 보고 있으니 우수사와 경상수사가 장흥부사와 체찰사의 군관을 데리고 왔다. 경상우도 순찰사(서성)의 군관이 편지를 가지고 왔다.
2월30일[3월28일] 맑음.
아침에 정사립으로 하여금 보고문을 쓰게 하여 체찰사에게 보냈다. 장흥부사도 체찰사에게 갔다. 해가 지려할 때 우수사가 보고하는 말이, “이제 바람도 따뜻해졌으니 제주 진도 등지를 두루 돌아다니면서 시급히 성원 계획을 행해야 하겠으니 소속 부하를 데리고 본도(전라우도)로 가고자 한다”는 것이었다. 그 작심하고 하는 말이 몹시도 해괴하여 그의 군관 및 도훈도에게 곤장 70대를 때렸다. 우수사가 내심 견내량에서 복병하고 있기가 싫어서 하는 짓이라 참으로 가소롭기 짝이 없다. 저녁에 송희립 노윤발 이원룡 등이 들어왔다. 송희립은 술까지 가지고 왔다. 심기가 몹시 불편하여 밤새도록 식은땀을 흘렸다.
▶병신년(1596년) 3월
식은땀 흘리고 몸이 불편했던 날과 술 마시거나 장수들 술 먹인 날이 거의 매일 계속된다. 한산도의 허술한 거처는 비바람에 창문이 깨지고 마니 하루도 편케 지낼 수가 없다. 바다의 달빛은 이 나그네 장수를 한없이 산란하게 한다.
3월1일[3월29일] 맑음.
새벽에 망궐례를 올렸다. 아침에 경상수사가 와서 이야기하고 돌아갔다. 늦게 해남현감 유형(柳珩), 임치점사 홍견, 목포만호 방수경 등을 기일 어긴 죄로 처벌했다. 해남현감은 이제 막 새로 부임해 왔으므로 곤장을 치지는 않았다.
3월2일[3월30일] 맑음.
아침에 장계 초안을 수정했다. 보성군수(안홍국)가 들어왔다. 몸이 몹시 불편하여 공무를 보지 않았다. 기운을 차릴 수 없고 땀이 흐르니 이것이 병의 시초인 듯하다.
3월3일[3월31일] 맑음.
이원룡(李元龍)이 본영으로 들어갔고 늦게 반관해(潘觀海)가 왔다. 정사립 등을 시켜 장계를 쓰게 했다. 이날은 명절(삼짇날)이라 방답첨사 여도만호 녹도만호 남도포만호 등을 불러 술과 떡(화전)을 대접했다. 일찍 송희립을 우수사에게 보내어 미안했다는 뜻을 전하니(2월 30일 이억기의 부하들을 때린 일을 두고 한 듯하다.), 공손하게 대답하더라고 했다. 땀에 젖었다.
3월4일[4월1일] 맑음.
아침에 장계를 봉했다. 늦게 보성군수 안흥국을 기일을 어긴 죄로 처벌했다. 낮에 출항하여 곧바로 소근두(한산도 염호리 소고포)를 돌아 경상우수사가 있는 곳에 가서 그를 불렀다. 경상좌수사 이운룡도 왔다. 셋이서 조용히 이야기하고서 그대로 자리도(한산도 창좌리 좌도) 바다 가운데서 같이 잤다. 땀이 무시로 흘렀다.
※ ㈔부산여해재단·국제신문 공동 기획
Copyright © 국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