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로] 가장 불행한 세대
전쟁 겪은 이들이 불행한 세대
北은 ‘정의의 전쟁관’이라고?
누가 불행한 세대 만드는가
주말 방영 중인 KBS 2TV 사극 ‘고려거란전쟁’을 보다가 우리 역사상 가장 불행한 세대를 다시 떠올렸다. 가장 불행한 세대는 1580년 무렵 태어난 이들 아닐까 여기고 여러 해 전 글을 쓴 적 있다. 1580년 세대는 10대 때 임진왜란(1592~1598) 7년 전쟁을 겪고, 40대 때 정묘호란(1627)을 맞고, 50대 때 다시 병자호란(1636) 참화를 치렀다. 우리말의 거센소리·된소리 현상이 이때 일어난 일이라고 하니 언어마저 거칠고 드세질 정도로 참혹한 시대였다.
그런데 드라마를 보면서 불행한 세대는 그때만이 아니었구나 새삼 깨달았다. 조선 시대 넘어 고려 역사까지 시야를 넓혀 보는 눈을 미처 갖지 못했다. 10~11세기 동아시아 최강국 거란(요나라)은 993년, 1010년, 1018년 세 차례 고려를 침략했다. ‘고려거란전쟁’은 거란 40만 대군에 맞선 고려군의 분전을 생생한 전투 장면을 통해 보여준다. 980년 전후 태어난 세대는 10대와 30~40대 무렵 대규모 전쟁을 잇달아 겪었다. 2차 침략 때 임금 현종은 수도(개경)를 떠나 나주까지 피신해야 했다. 우리 역사상 군주가 외적 침입으로 몽진한 일은 이때가 처음일 것이다. ‘고려사’ 기록을 찾아보니 “근자에 전쟁으로 말미암아 백성들이 농사를 짓지 못하고 길가에 굶어 죽은 시체가 서로 잇대어 있다”(1012년 2월)고 참혹한 광경을 적었다.
1220년 세대는 어떤가. 이 세대는 10대 때인 1231년부터 30대 후반인 1259년까지 몽골의 침략을 아홉 번이나 겪었다. “죽은 자는 백골을 거두지 못하고 산 자는 적의 노복이 되어 부자간에 서로 의지하지 못하고 처자를 보전하지 못하는”(1254년 10월) 전쟁이 28년간 이어졌다. 불행한 세대는 또 있다. 1359년과 1361년 홍건적(훗날 명나라 건국) 침략으로 임금(공민왕)이 안동까지 피신했던 시기 사람들도 고난의 세대였다. 20세기 초 태어나 식민지 백성으로 살았고 1950년 6·25전쟁을 겪은 분들 역시 불행한 세대였다.
지금 86 세대건 97 세대건 MZ 세대건 저마다 살면서 고통의 시간을 보냈다고 하더라도 이제까지 한 번도 전쟁을 겪지 않았다는 점에서 모두 행복한 세대다. 우크라이나 침공하고 대만해협 위협하며 미사일 쏘면서 전쟁 의지를 감추지 않는 나라들을 머리에 이고도 대한민국은 지난 70년간 전쟁을 치르지 않았다. 며칠 전 개봉한 영화 ‘건국전쟁’은 그 까닭을 명쾌하게 설명한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3년 반공포로 석방이라는 초강수를 두면서 세계 최강국 미국을 붙잡아 군사동맹을 맺었다. 영화는 이승만의 결단으로 맺은 한미 동맹이 없었다면 한반도는 공산화되고 지금은 미얀마 수준의 나라가 됐을 것이라고 말한다.
북 김정은은 최근 열흘 사이 4차례 미사일 쏘면서 “전쟁 준비”를 언급했다. 놀랍게도 우리 국회 어느 토론회에선 “북한의 전쟁은 정의의 전쟁관” “한반도 전쟁 위기가 실재하는 근원은 북이 아니라 한미 동맹 때문”이란 말이 쏟아졌다. 과연 누가 ‘불행한 세대’를 만드는 전쟁을 일으키려 하는가. 사극 속에서 강감찬은 “인간이 살아서 겪는 유일한 지옥이 바로 전쟁”이라며 이를 막으려 노력한다. 하지만 막상 침략 전쟁이 발발하자 “전쟁에선 승리보다 더 큰 것은 없다”고 결사 항전한다. 군주 현종은 항복하자는 일부 신하들에게 일갈한다. “우리는 후손들을 대신하여 전쟁을 치르고 있소. 우리는 항복할 권한이 없소.” 그때 굴복했다면? 지금 우리는 남의 나라 말을 쓰고 있을 것이다. 모진 세월 딛고 지금 우리를 있게 한 모든 ‘불행한 세대’에게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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