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수, 헬레네 이어 이번엔 요부… 첫 남성 창극 ‘살로메’
남성 창극서 관능적인 살로메役
중국 경극을 판소리로 풀어낸 ‘패왕별희’에선 항우와 아픈 이별을 하는 전설적 미녀 우희, 에우리피데스 비극 ‘트로이의 여인들’에서는 타고난 아름다움 탓에 전쟁의 불씨가 된 고대 희랍 최고의 미녀 헬레네였다. 지난 2~4일 공연한 남성 창극 ‘살로메’에서, 계부 헤로데 왕에게 세례 요한의 목을 요구하는 요부(妖婦) 살로메 역시 이 배우가 맡았다. ‘국립창극단 아이돌’ 스타 소리꾼 김준수(33). 이제는 경국지색(傾國之色) 전문 배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매 시작 1시간 만에 전 공연을 매진시킨 티켓 파워 역시 그답다.
지난 31일 개막을 이틀 앞두고 만난 그는 “여성 주역을 자꾸 맡는 게 한편으론 부담스럽지만, 놓칠 수 없는 좋은 기회”라고 했다. “성별을 떠나 다양한 역할을 소화할 수 있는 배우로 봐주신 거니까 감사하죠. 헬레네나 우희는 정해진 틀 안에서 엄격한 연출 지시를 따라야 했고 분장도 짙었거든요. 반면 살로메는 내 얼굴 그대로, 자유롭게 내 안의 것들을 끌어내면 됐어요. 고삐 풀린 망아지, 목줄 풀린 사냥개가 된 것처럼 신나요.”
3일 저녁 본 ‘살로메’는 창극이라기보다 판소리 창법을 응용한 음악극이라 하는 편이 나을 만큼 음악도 극적 전개도 파격적이었다. 무대 위 김준수의 살로메는 원초적 유혹의 화신, 욕망으로 똘똘 뭉친 요부 그 자체. 초저음부터 여성적 고음까지 고난도의 작창을 너끈히 소화하며, 어떤 성자(聖者)라도 단박에 홀릴 관능적 춤을 보여줬다.
김준수는 국립창극단에서 ‘춘향’의 이몽룡 등 남자 주역도 도맡다시피 하는 배우. 우리 연극을 대표하는 극작가 배삼식이 각색한 셰익스피어 비극 ‘리어’에선 노인 리어왕을, 국립극단 예술감독을 지낸 이성열 연출의 ‘베니스의 상인들’에선 냉혹한 유대인 상인 샤일록을 맡을 만큼 연기 폭도 넓다.
올해 한국문화예술위 공연예술 창작산실 지원작이기도 한 ‘살로메’는 남성 소리꾼들이 여성 역할까지 모두 맡아 공연하는 최초의 남성 창극 시도다. 남자들끼리만 무대에 서는 건 어떤 느낌일까. 김준수는 “배우들이 워낙 친하고 잘 알아서 좋은 점도 안 좋은 점도 있더라”며 웃었다. “서로를 잘 이해하니 오해할 걱정 없이 툭 터 놓고 토론하고 함께 만들어 갈 수 있어요. 반면 워낙 친한 형 동생인데도 역할에 따라 서로를 유혹하고 교태를 부리거나 ‘터치’도 해야 해서, 연습하다가 웃음이 터진 적도 많았죠.”
‘패왕별희’에서 우희가 된 그는 사면초가 속 자결하기 전 항우에게 보여주는 마지막 칼춤으로 관객을 매료시켰다. 이번 ‘살로메’에선 패션디자이너 이상봉이 디자인한 속이 비치는 주름치마를 날개처럼 펼치고 휘날리며 ‘일곱 베일의 춤’을 선보였다. 원작에선 베일을 한 겹씩 벗으며 나체가 되는 춤. 그는 “사람을 홀리는 걸 타고난 여자가 돼야 해서, 내 안에서 그 ‘끼’를 끄집어내기 위해 잠도 못 자며 고민했다”며 “이번 작품에선 옷은 벗지 않는다”며 또 웃었다.
‘살로메’의 원작은 아일랜드 작가 오스카 와일드(1854~1900)의 탐미적 희곡. 고전에서 현대적 이야기를 뽑아내는 데 달인의 솜씨를 보여온 고선웅 서울시극단장이 각색했다. 불륜, 친족 살해, 근친상간에 참수된 목이 등장하는 등 온갖 금기를 담은 난장이 펼쳐졌다. 살로메 역에 더블 캐스팅된 윤제원을 비롯, 유태평양, 정보권, 김수인 등 젊은 스타 소리꾼들이 함께 무대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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