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사 또 발사… ‘안보 딜레마’ 수렁에 빠진 한반도
“북한 정권은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핵 선제 사용을 법제화한 비이성적 집단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2024년 1월31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제57차 중앙통합방위회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두 가지를 짚어볼 필요가 있다. ‘핵 선제 사용’ 문제와 ‘비이성적’이란 규정이다.
재래식 전력 약할 때 ‘핵 선제 사용’
2022년 9월8일 북한 최고인민회의(국회 격)는 핵무기 구성과 지휘통제 체제, 사용 원칙과 조건 등 이른바 ‘핵무기 사용 교리(독트린)'를 명시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핵무력정책에 대하여’(이하 핵무력정책법)를 채택했다. 모두 11개조 23개항으로 이뤄진 핵무력정책법 제6조는 △핵무기 또는 기타 대량살육무기 공격이 감행됐거나 임박했다고 판단되는 경우 △국가 지도부와 핵무력 지휘기구에 대한 핵 및 비핵 공격이 감행됐거나 임박했다고 판단되는 경우 등 핵무기 사용 조건 다섯 가지를 구체적으로 명시했다.
미국을 제외한 핵보유국 대부분은 위기 상황에서 선택의 제약을 피하려 핵무기 사용에 대해 최대한 모호성을 유지한다. 그럼에도 북한이 되레 핵 선제 사용 조건을 법령에서 구체적으로 적시한 것을 두고 전문가들은 “억지 효과를 키우기 위한 것”이라고 평가한다. 북한이 ‘유일’한 사례도 아니다. 국방부 기획조정실장을 지낸 김정섭 세종연구소 부소장은 이렇게 설명했다.
“적대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으면서 재래식 전력이 열세인 핵보유국들은 비핵공격에도 핵무기를 선제 사용할 수 있다는 내용의 핵 교리를 채택해왔다. 냉전 시절 옛 소련에 견줘 재래식 전력이 취약했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동맹국들이 핵 선제 사용 교리를 채택하고, 미국이 서유럽에 전술 핵무기를 배치한 게 대표적 사례다. 냉전 종식 뒤엔 오히려 러시아가 재래식 전력 경쟁에서 밀리며 핵 선제 사용 교리를 채택했다. 인도와 맞서는 파키스탄도 재래식 전력 열세를 만회하려 핵 선제 사용을 내세우고 있다. 예외는 미국이다. 재래식 전력이 여전히 월등함에도 핵 선제 사용 카드를 명시적으로 폐기하지 않고 있다.
북한은 재래식 전력 측면에서 한-미 동맹과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열세다. 한-미는 재래식 전력만으로 전쟁을 수행할 능력이 있지만 북한은 처지가 다르다. 그러니 전쟁이 나면 전술핵을 먼저 쓸 수 있다고 강조해야 억지력이 생긴다. 억지는 위협을 수반한다. 상대방이 공격적으로 느낄 수밖에 없다. 그저 ‘위협적’이라고 느낄 게 아니라, 맥락을 보고 판단해야 한다.”
윤 대통령은 통합방위회의에서 “상식적인 정권이라면 핵을 포기하고 주민들이 살길을 찾겠지만, 북한 정권은 오로지 세습 전체주의 정권 유지를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있다”고 비판했다. ‘ 비이성적 집단’이란 규정과 마찬가지다. 문제는 상대방을 ‘ 비이성적’ 존재로 인식하면 이성적 대응이 어려워진다는 점이다. 비이성적 존재의 행위는 예측이 불가능한 탓이다. 정세를 되짚어보자.
‘비이성적 집단’에 이성적 대응 불가능
북한은 2024년 들어 △서해 해안포 사격(1월5~7일) △중거리 탄도미사일 발사(14일) △수중 핵어뢰 ‘해일-5-23’ 실험(19일) △순항미사일 ‘불화살-3-31’ 시험발사(24·28일) △순항미사일 ‘화살-2’ 발사 훈련(30일) 등을 이어가고 있다. 이에 맞서 우리 쪽도 △한국형 전술지대지유도무기(KTSSM-Ⅱ) 시험발사(11일) △한·미·일 연합 해상훈련(15~17일) △한-미 사이버 동맹 훈련(15~26일) 등을 했다. ‘도발-대응-맞대응’이란 긴장 상승의 연쇄 효과 속에 전형적인 ‘안보 딜레마’에 빠졌다.
“한반도가 1950년 6월 초(한국전쟁 직전)보다 더 위험한 상황이다. 지나친 주장이라고 들릴지 모르겠지만,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1950년에 할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전쟁하기로 전략적 결정을 내린 것 같다.”
미국을 대표하는 북한 전문가로 손꼽히는 로버트 칼린과 지그프리드 헤커는 1월11일 북한전문매체 <38노스>에 올린 기고문에서 이렇게 썼다. 국무부 정보조사국 동북아 담당관을 지낸 칼린은 대북특별대사 선임자문관(1992~2000년)으로 북-미 협상에 직접 참여했다. 핵과학자인 헤커는 로스앨러모스 국립연구소 소장(1986~1997년)을 했으며, 2004년 이후 일곱 차례나 방북해 영변 핵시설 등을 둘러봤다.
두 사람이 ‘전쟁 가능성’을 경고하고 나선 데는 이유가 있다. 2019년 2월 말 베트남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이 결렬된 뒤, 한반도 정세 긴장은 지속적으로 상승곡선을 그려왔다. 특히 우발적 군사충돌을 막기 위한 ‘9·19 남북 군사합의’란 안정장치까지 제거된 상태다. 이미 북쪽은 정찰위성 추가 발사와 핵추진 잠수함 개발 추진과 함께 전술핵무기를 탑재할 수 있는 다양한 미사일의 시험·발사를 지속할 뜻임을 분명히 밝혔다. 핵보유국 지위를 더 굳건히 하고 억지력을 강화하기 위한 ‘합리적’ 행보다. 칼린과 헤커는 “한-미 동맹의 철통같은 억지력이란 최면”에서 깨어나, “전쟁이란 최악의 상황”까지 염두에 두고 위기를 낮출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북, 러·중 지렛대 삼아 적극 대외 행보
최선희 북한 외무상의 러시아 방문(1월14~19일)을 전후로 중국이 바빠졌다. <조선중앙통신> 등 북쪽 매체는 “쑨웨이둥 외교부 부부장을 단장으로 한 중국 대표단이 1월25일 평양에 도착했다”고 전했다. 특히 쑨 부부장 일행이 항공편이 아닌 육로를 통해 방북했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중국 대표단의 방북을 이틀 앞둔 1월23일 <38노스>는 “상업용 위성사진 분석 결과, 북-중 국경지대인 단둥~신의주 일대에 화물트럭이 부쩍 늘었다”고 전했다. 구갑우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는 “북-러의 과도한 밀착을 경계한 중국이 반응을 보이기 시작한 것 같다”고 짚었다.
북한과 ‘민감한 분야’를 포함한 전방위적 협력을 다짐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조만간 방북하겠다고 이미 밝힌 바 있다. 시기는 러시아 대선(3월15~17일) 직후가 유력하다. 북-중은 수교 75주년을 맞은 2024년을 ‘친선의 해’로 선포했다. 벌써 수교 기념일(10월6일)에 즈음해 양국 정상외교가 재개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러시아와 중국을 지렛대 삼아 북한이 대외 행보에 적극 나설 모양새다. 정세 유동성이 커지고 있다. ‘이성적’이고 ‘상식적’인 대응책 마련이 절실한 때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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