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러 대사 초치…한·러 ‘정면충돌’
러 “편향적, 혐오스러워” 악평
외교부 “혐오스러운 궤변” 항의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과 2023년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러시아 방문으로 악화된 한·러 갈등이 표면화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의 ‘북한의 핵 선제 사용 법제화’ 비판을 러시아 외교부 대변인이 “편향적”이라고 평가하자, 한국 외교부가 주한 러시아 대사를 초치해 “심히 무례한 언어”라고 유감을 표했다. 한·러관계가 ‘악화일로’인 와중에 러시아 외교부 차관이 방한해 한국 외교부 고위급 인사들과 면담한 사실이 4일 공개됐다.
시작은 마리야 자하로바 러시아 외교부 대변인이 지난 1일(현지시간) 논평에서 “윤 대통령의 발언은 노골적으로 편향됐다”고 비판한 것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자하로바 대변인은 한반도 긴장의 원인을 한·미·일로 돌리면서 “이런 상황에서 (윤 대통령의 발언은) 특히 혐오스러워 보인다”고 했다. 윤 대통령이 지난달 31일 제57차 중앙통합방위회의에서 “북한 정권은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핵 선제 사용을 법제화한 비이성적 집단”이라고 말한 것을 정면 비판한 것이다. 러시아가 아닌 북한에 대한 발언에 러시아 외교부 대변인이 논평을 내 비판한 것은 상당히 이례적이다.
한국 외교부도 3일 오전 대변인실 명의 입장문을 내고 “일국의 외교부 대변인 발언으로는 무례·무지하며 편향돼 있다” “국제사회의 규범을 성실하게 준수하는 국가 기준으로 볼 때 혐오스러운 궤변”이라며 강한 수위로 맞받아쳤다. 오후에는 정병원 외교부 차관보가 게오르기 지노비예프 주한 러시아 대사를 외교부 청사로 초치해 자하로바 대변인의 발언에 엄중 항의하면서 “진실을 외면한 채 무조건 북한을 감싸면서 일국 정상의 발언을 심히 무례한 언어로 비난한 것은 매우 유감스럽다”고 말했다. 지노비예프 대사가 한국 정부 입장을 주의 깊게 들었고 본국 정부에 즉시 보고하겠다고 말했다고 외교부는 전했다.
‘초밀착’ 북·러, 한국 압박 의도…최근 러 차관 방한 때도 자국 입장만 설명
외교부 발언 수위 의견 분분
“세련된 외교적 대응 필요”
이번 한·러 외교부 간 ‘설전’은 악화된 한·러관계와 반대로 초밀착을 과시 중인 북·러 사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윤익중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교수는 통화에서 “윤석열 정부의 러시아 정책에 불만을 가진 러시아가 대북·대외정책 발언에 즉각적 반작용에 나선 것”이라며 “북·러 밀착을 과시하며 한국을 압박하는 의도도 있다”고 분석했다.
이 가운데 한·러, 북·러관계 담당이자 북핵 6자회담 수석대표인 안드레이 루덴코 러시아 외교부 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이 지난 2일 방한해 한국 외교부 고위급 인사들과 면담했다. 루덴코 차관은 외교부 청사에서 김홍균 1차관을 예방하고, 정 차관보와 만났다고 외교부가 이날 전했다. 한국 측은 북·러 군사협력에 대한 엄중한 입장을 전달하고 러시아 측의 책임 있는 행동을 촉구했다고 외교부는 설명했다. 루덴코 차관은 같은 날 김건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과 협의도 가졌다.
한·러 양국은 당초 루덴코 차관 방한을 지난해 9월 말로 조율해왔지만 이뤄지지 않다가 5개월이 지난 이날 성사됐다. 일정은 자하로바 대변인 발언 전에 확정된 것으로 알려졌다. 양국 간 대면 협의가 이뤄진 것은 의미 있는 일이지만 공감대를 이루기보다는 각자 입장을 설명한 것으로 보인다.
주한 러시아 대사관은 이날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루덴코 차관 방한 결과를 설명하면서 러시아 측이 “역내 긴장이 급격히 고조되는 데 심각한 우려를 표명했다”며 미국과 동맹국들이 위험한 군사 활동을 즉각 중단하고 정치·외교적 해결책을 모색함으로써 상황 정상화가 가능하리라는 점을 강조했다고 전했다.
이번 외교부의 입장문 수위와 러시아 대사 초치 대응이 적절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나온다. 윤익중 교수는 “한국이 러시아의 즉각적 반작용에 그때그때 반응할 필요가 없고 ‘궤변’이라는 말은 한판 붙자는 의미로 읽힌다”며 “세련된 외교적 대응이 필요하다”고 짚었다.
박병환 유라시아전략연구소장(전 주러시아 한국대사관 공사)도 “대변인실 반박 입장문 정도면 충분했을 것”이라며 “신임장 제정식도 하지 않은 주한 러시아 대사를 초치한 것은 과하다”고 했다.
박은경 기자 yam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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