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 ‘윤·한 갈등’에 투영된 검찰공화국의 퇴행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벌인 신구 권력 대결 1라운드는 허무하게 끝났다. 충돌 원인인 ‘김건희 디올백 수수’ 문제를 아무런 해법도 없이 봉합한 것이다. 남은 건 두 사람이 충돌했다는 사실과 윤 대통령이 평소 한 위원장에게 품었다는 각별한 애정과 각별한 후배 사랑을 초월하는 윤 대통령의 도저한 아내 사랑 정도다. 디올백 문제는 더 커졌다.
윤 대통령은 이번주 방송되는 KBS 신년 대담에서 입장을 밝히는 것으로 사태가 정리되기를 기대하는 것 같다. 그러나 ‘아내는 함정 몰카의 피해자’라고 적당히 넘기는 건 안 하느니만 못하다. 처음에는 대통령 부인이 몰카에 등장하는 초유의 사태가 낯설고 당황스러워 ‘함정 몰카냐, 디올백 수수냐’ 양론이 일었을지 몰라도 지금은 ‘함정 몰카지만 디올백 수수는 문제’라는 상식적이고 단순명료한 결론으로 여론의 갈래가 타졌다.
김 여사의 디올백 수수는 위법 소지가 다분하다. 그렇다고 해도 비단 이번 일뿐이었다면 여론의 추가 지금처럼 기울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수 여론이 ‘함정 몰카는 함정 몰카, 디올백 수수는 디올백 수수’라고 냉정하게 선을 긋는 건, 이번 일을 통해 김 여사를 둘러싼 의혹의 베일이 한 꺼풀 벗겨진 느낌, 말만 무성하던 의혹의 실체를 직접 확인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싸움의 원인은 그대로인데 화해했다면 둘 중 하나다. 싸움이 가짜였거나 화해가 가짜이거나. 윤 대통령과 한 위원장이 충돌하자 ‘약속대련 아니냐’는 말이 나왔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두 사람이 감수해야 할 리스크가 크다. 윤 대통령은 이준석, 김기현 등 마음에 안 드는 여당 대표를 족족 갈아치웠다. 그런데 이번에는 한 위원장 교체라는 ‘윤심’을 여당이 거부했다. 처음이다. 이런 거부는 처음이 어렵지 두번째, 세번째로 갈수록 쉬워진다. 윤 대통령의 당 장악력에 균열이 가는 것이다. 반대로 윤 대통령이 여전히 여당을 쥐락펴락하고 디올백 수수 문제를 두고도 뚜렷한 태도 변화가 없다면 한 위원장은 단단히 체면을 구기게 된다. ‘윤 대통령 부하’라는 꼬리표도 떼기 어렵다. 김 여사를 마리 앙투아네트에 비유해 윤·한 갈등의 단초를 제공한 김경율 비대위원이 4일 총선 불출마를 선언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약속대련’이 아니라 ‘실전격투기’였음을 보여주는 정황은 또 있다. 윤 대통령은 이원석 검찰총장의 사법연수원 10기수 선배인 박성재 전 고검장을 법무부 장관으로 지명했다. 심우정 법무부 차관을 임명한 지 일주일 만에 단행한 이례적 인사였다. 법무부는 한 위원장이 장관에서 물러난 뒤 이노공 전 차관 대행체제로 운영됐는데, 윤 대통령은 새 장관을 지명하지 않고 장관 대행 역할을 하는 차관을 교체한 터였다. 그래서 다들 총선까지는 차관 대행체제로 가려나 보다 했는데, 돌연 박 후보자를 지명한 것이다. 전직 검찰 고위 간부의 말이다. “윤 대통령과 한 위원장이 ‘약속대련’까지는 아니어도 어느 정도 교감을 갖고 저러는 줄 알았다. 그런데 박 고검장을 지명하는 것 보니까 그게 아닌 것 같다. 윤 대통령이 검찰을 조속히 안정시켜야 한다고 생각한 것 같다.” 윤 대통령이 한 위원장과의 갈등 국면에서 검찰을 확고하게 틀어쥐기 위해 조직 장악력이 강한 박 후보자를 지명했다는 것이다.
군사정권 때는 권력 유지를 위해 군의 동요를 막는 게 중요했다. 군이 권력의 기반이었기 때문이다. 윤석열 정부의 권력 기반은 검찰이다. 군사정권 때 권력이 총구에서 나왔다면 지금은 수사권·공소권에서 나온다. 검찰의 이반은 권력의 위기와 직결된다. 당장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사건을 비롯해 검찰에 있는 김 여사 관련 건만 해도 여럿이다. 고발사주 혐의로 공수처에 의해 기소된 손준성 검사가 얼마 전 1심에서 징역 1년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비록 미수에 그쳤다고는 하나 고발사주의 수혜자 격인 사람이 윤 대통령, 김 여사, 한 위원장이다. 윤 대통령과 한 위원장은 고발사주 피고인인 손 검사를 검사장으로 승진시켰다. 그랬던 윤 대통령과 한 위원장이 김 여사를 사이에 두고 충돌했다.
권력의 태생과 출처에 따라 권력투쟁의 등장인물도, 주무대도 바뀐다. 윤 대통령의 돌연한 박 후보자 지명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총선 역학과 권력 속성상 제2, 제3의 윤·한 충돌이 이어질 가능성이 있지만, 누가 이기건 근본적으로는 이 싸움 자체가 검찰공화국의 일그러진 단면을 보여주는 거대한 퇴행으로 생각되는 것이다.
정제혁 사회부장 jhju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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