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 든 자리는 알아도 난 자리는 모른다
연말에 독일 여행을 다녀왔다. 버스, 트램(전차), 지하철, 지역 일반열차, 광역 고속열차, 비행기까지 그야말로 모든 대중교통을 이용했다. 낯설었던 것은 어디에나 유아차가 너무 많다는 점이었다. 한국에서 대중교통, 특히 버스에서 유아차를 만나는 건 진짜 드문 일이다. 한국의 대단한 저출생 상황을 고려하더라도 이건 이상한 일이다. 1990년대 말 처음 방문한 유럽 미술관에서 휠체어를 탄 장애인이 너무 많아 놀랐던 기억이 새삼 떠올랐다.
옛말에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했는데, 현실은 그와 반대였다. 버스, 지하철, 기차에서 휠체어를 탄 사람들이 안 보이고, 유아차를 탄 아기들이 안 보여도 이들의 부재(不在)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가, 이들이 눈앞에 나타나고 나서야 비로소 예전의 부재를 깨닫게 된 셈이다.
사실 수도권의 대중교통, 특히 출퇴근 시간은 적자생존의 질서가 지배하는 세렝게티 생태계나 다름없다. 지구력, 민첩성, 유연성, 그리고 불굴의 정신력을 가진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 표준의 몸을 갖지 못한 이들은 낙오되기 십상이고, 괜한 욕심을 냈다가는 ‘민폐’ 존재가 될 수 있다. 나도 출장 때문에, 하필 출근 시간에 여행용 짐가방을 들고 지하철 9호선에 올랐다가(일단 탑승 자체가 대단한 도전이었다!) 대역죄인이 되어 따가운 시선과 짜증 세례를 받은 경험을 갖고 있다.
이 거친 세계를 매일 질주하는 이들에게 가장 유명한 시민단체는 참여연대도 경실련도 아닌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일 것이다. 거의 매일 아침마다 이들의 “불법시위 때문에 열차가 상당 시간 지연될 수 있사오니”라는 친절한 안내방송을 듣기 때문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안내문구가 바뀌었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라는 이름 대신 “특정 장애인단체”라고 지칭하기 시작한 것이다. 모두 알고 있지만 두려움 때문에 부를 수 없는 그 이름, 지하철 유니버스의 ‘볼드모트’가 탄생했다. 많은 이들이 모르거나 잊어버렸지만, 대중교통이 예전보다 훨씬 편하고 안전해진 것은 볼드모트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울에서 처음 저상버스가 운행될 때를 기억하고 있다. 아주 드물게 만날 수 있는, 버스 문이 열리고 나서야 비로소 저상버스임을 알게 되는, 랜덤박스 같은 신문물이었다. 그동안 운행 편수가 점차 늘어나서, 요즘은 계단 버스가 오면 ‘왜 하필!’ 투덜대며 다음 저상버스를 기다릴 수 있는 여유도 생겼다. 마찬가지로, 이리저리 돌아가야 하고 보물찾기하듯 안내판을 추적해야 하는 경우가 많지만, 그래도 어지간한(아직 전부는 아니다!) 지하철 역사 안에서 무거운 짐가방을 들고 계단을 오르내리는 수고는 많이 줄어들었다. 에스컬레이터와 엘리베이터는 이제 누구나 당연히 있을 것으로 기대하는 필수시설이 되었다. 장애인들이 이동권 보장을 외치며 버스 밑에 기어 들어가고 지하철 선로에 누워서 만들어낸 성과물이다.
한국만의 특별한 역사도 아니다. 디자인 연구자인 사라 헨드렌의 책 <다른 몸들을 위한 디자인>은 차도와 인도를 연결하는 건널목의 작은 경사로마저도 투쟁으로 일궈낸 결과물임을 알려준다. 1940년대부터 미국의 장애인권단체들과 ‘동료 시민’들은 때로는 입법 로비를 하고, 때로는 콘크리트를 부어 경사로를 직접 만들거나 보도블록을 깨뜨리는 등 직접 행동을 실천하면서 50년을 투쟁했다. 드디어 1990년, 미국의 모든 도시에서 건널목의 턱을 낮추고 신축 건물에 경사로를 설치해야 한다는 법이 만들어졌다. 이제는 너무 보편적인 것이라, 나도 예전에 경사로가 없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이동의 문턱을 낮추는 것은 ‘특정 장애인단체’에만 특별한 혜택을 주는 것이 아니다. 이들의 노고에 무임승차하기보다 함께 연대하는 것이, 요즈음 부쩍 추앙받는 ‘동료 시민’의 품격 있는 모습일 것이다.
김명희 노동건강연대 운영위원장·예방의학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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