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방안 보완? 수정?… ‘신통일구상’ 밀실 논의에 ‘혼란’ [심층기획]

김예진 2024. 2. 4.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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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공동체통일방안 운명은
통일부 자문기구 ‘미래기획위’ 주도
‘자유’ 담은 초안조차도 공개 안 돼
‘민족·남북연합 삭제 확정’ 보도에
정부 “사실 무근… 개인 의견” 부인
“민족 삭제 땐 헌법 위배… 개헌 필요
충분한 사회적 합의 거쳐 결정해야”
北선 민족·통일 폐기 공식화 논란
‘착각’인가 ‘의도적 월권’인가. 윤석열정부의 ‘신통일미래구상’ 준비를 위해 구성된 통일부 자문기구 ‘통일미래기획위원회’(위원회)가 통일부의 또 다른 프로젝트인 ‘민족공동체통일방안’(1994) 수정안 마련의 주체로 끊임없이 부각되면서 극심한 혼란상을 드러내고 있다.

올해 30주년을 맞은 민족공동체통일방안은 ‘자주’ ‘평화’ ‘민주’를 통일의 기본 원칙으로 삼으며 1994년 이래 지난 문재인정부까지 모든 정부의 통일방안으로 확고히 자리매김했다. 그런데 신통일미래구상이 역대 정부가 계승한 대한민국 정부 공식 통일방안인 민족공동체통일방안을 어떠한 대국민 설명도 없이 은근슬쩍 대체할 듯한 기류가 포착된다.

◆신통일미래구상≠통일방안

김영호 통일부 장관은 지난 2일 SBS 라디오에 출연해 “정부는 지난해 통일미래기획위를 구성해서 민족공동체통일방안 30주년을 맞아 그걸 보완하는 방향으로 여러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제가 장관이 되기 전 통일미래기획위원장을 했다”며 “30주년을 맞이한 올해 변화된 남북관계라든지 국제 정세에 맞게 헌법적 가치를 충실하게 반영할 수 있는 방향으로 통일방안이 새롭게 모색돼야 된다”고 덧붙였다. 위원회가 민족공동체통일방안 수정안을 준비하고 있음을 분명히 한 것이다.

위원회는 지난해 1월27일 정부 연두 업무보고에서 제시된 통일부 장관 자문기구다. 당시 통일부는 “한반도 평화와 민족 번영을 위한 중장기 구상으로 신통일미래구상을 마련하겠다”며 “상반기 중 통일미래기획위를 중심으로 국민과 전문가 의견 수렴을 실시하고 연내 발표를 목표로 하겠다”고 밝혔다. 신통일미래구상 마련을 위한 민관 협력 플랫폼인 셈이다. 당시 통일부는 또 다른 프로젝트로 민족공동체통일방안 발표 30주년이 되는 2024년에 발표할 “민족공동체통일방안 업그레이드”를 준비하겠다고 했다.
통일부는 업무보고 자료에서 신통일미래구상이 “북핵 문제 해결에 주안점을 둔 ‘담대한 구상’이나, 장기적 통일방안인 ‘민족공동체통일방안’과는 상이”하다고 했다. 당시 통일부 당국자도 신통일미래구상은 중장기 구상으로 2023년 발표되는 안이고, 민족공동체통일방안 업그레이드 버전은 장기 구상으로 2024년에 발표되는 별도의 안이며, 위원회가 준비하는 것은 신통일미래구상이라고 설명했다.

당시 정부 핵심관계자는 “신통일미래구상과 통일미래기획위는 남북관계가 냉각돼 정부 공약인 ‘담대한 구상’이 당장 실현되지 않더라도 ‘담대한 구상’을 미리 구체화해 놓겠다는 아이디어로서 제출된 것”이라고 배경을 설명했다. 또 다른 당국자는 신통일미래구상은 1988년 노태우 대통령의 7·7선언, 민족공동체통일방안 업그레이드 버전 발표는 1989년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 발표와 각각 비교했다.

한 달 뒤인 지난해 2월28일 성신여대 교수이던 김 장관이 위원장으로 위촉되며 위원회가 출범했다. 이어 3월 위원회는 1차 회의를 열고 “신통일미래구상 수립 방향과 ‘담대한 구상’ 추진 방향 등을 논의했다”고 밝혔다. 이어 5월에는 두 번째 회의를 열고 “신통일미래구상 초안에 대해 논의했다”며 “‘자유롭고 평화로운 통일 한반도’ 비전을 담기로 했다”고 소개했다.

그런데 위원회 출범 넉 달 만인 6월29일 김 위원장이 통일부 장관에 내정됐다. 신통일미래구상 발표는 당초 목표한 해를 넘겼다. 지난해 5월 이미 마련된 것으로 추정되는 초안 전문도 아직 공개되지 않았다.
지난 2023년 3월 서울 종로구 삼청동 남북회담본부에서 통일부 자문기구 통일미래기획위원회 제1차 회의가 열려 참석자들이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통일부 제공
◆밀실 논의 속 혼동·혼란 계속

그동안 위원회가 신통일미래구상이 아닌 민족공동체통일방안 수정안을 준비 중이라는 소식이 지난해 하반기부터 언론 보도 등으로 꾸준히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핵심은 기존 통일방안에서 ‘민족’을 빼고 ‘자유’를 강조한다는 것이었다.

신통일미래구상 소식은 어느덧 증발했다. 이에 지난해 12월 준비해 온 신통일미래구상은 폐기하고 통일방안 수정안만 발표하는 것인지, 구상이 곧 통일방안 수정안으로서 기존 통일방안을 대체하는 것인지, 처음 계획대로 각각 발표되는 것인지 세계일보 질의에 정부 당국자는 “아무것도 정해진 게 없다”고 했다.

최근 “위원회가 통일방안에서 ‘민족’과 ‘남북연합’을 빼는 방안을 마련했고 4월 총선 후 드러날 것”이라는 보도가 나왔을 때에도 정부는 즉각 부인했다. 구병삼 통일부 대변인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라며 “(위원회 관계자의) 개인 의견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통일부 당국자는 “1989년 노태우정부의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이 정립돼 당시 국회의 만장일치 지지를 받았고 1994년 김영삼정부에서 다듬어 민족공동체통일방안으로 공식화해 현재까지 대한민국 정부의 공식 통일방안으로 계승된 30년 역사를 갖고 있다”며 “통일방안에서 한민족을 뺀다든지 하는 게 그렇게 쉽게 정부 결정만으로 바뀔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부의 공식 통일방안은 역대 정부마다 내놓는 공약이나 구상과는 내용의 수준이나 사회적 합의 과정의 차원이 다르다.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 발표 당시 노태우정부는 비밀 특사 라인을 가동해 북한 당국과 40여차례 물밑 협의를 하고, 미국 등 주변국과도 미리 협의했다. 통일은 “상대가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국내에서도 공청회·토론회가 수차례 열리고 헌법과의 관계, 동·서독 사례 등까지 공론장에서 격렬한 논쟁을 거쳐 사회적 합의를 이뤘다. 이를 토대로 남북기본합의서 체결, 김영삼정부의 보완, 김대중정부의 6·15 선언에서 남북 쌍방의 공감대 공식화를 거쳐 다져졌다.

무엇보다 정부 공식 통일방안에서 민족 개념을 삭제하려면 헌법과 충돌해 개헌부터 해야 하는 문제가 생긴다. 이에 대해 정부 관료 라인의 인식과 위원회 또는 위원회 출신인 김 장관의 인식 차가 지속 노출되면서 혼란상은 거듭되고 있다. 김 장관이 구상과 방안의 관계, 위원회 역할을 오인한 듯한 모습은 과거에도 있었다. 김 장관은 교수 시절인 지난해 1월 유튜브에 올린 ‘윤석열정부 새로운 통일 구상 추진, 기존 통일방안들의 문제점은?’이라는 제목의 영상에서 기존 통일방안이 민족, 즉 종족 개념에 입각한 당위적 통일론이고 체제는 다르게 둬 “재앙”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신통일미래구상이 이를 대체하는 개념이라는 취지로 설명했다. 그러나 김 장관의 교수 시절 주장과 달리 기존 통일방안에도 ‘자유민주’와 ‘1체제’는 담겨 있다. 혼란상은 노태우정부 시절 통일방안을 만든 ‘박철언 팀’과 이에 반대했던 노재봉 국무총리 그룹의 노선 갈등과 흡사하게 비치기도 한다. 김 장관은 노 전 총리의 애제자였다.

여기에 북한이 지난해 연말 당 전원회의에서 ‘민족·통일’ 폐기를 공식화하면서 혼란이 더 가중됐다. 지난해 연두 업무보고 때부터 정부 및 자문 학자들 사이에서 ‘민족’ 개념은 구시대적이어서 바뀔 때가 됐다는 의견이 솔솔 나오던 터였지만, 북한이 먼저 민족 폐기를 공식화하자 의견이 갈렸다. 민족 개념 폐기를 소신으로 해 온 일부는 ‘민족을 삭제하면 된다’는 기류인 반면 다른 쪽에선 ‘오히려 우리가 민족 개념을 강하게 유지해 정통성에서 우위를 점하고 역공해야 한다’는 전략적 판단을 했다. 윤 대통령이 올해 초 “북한이야말로 반민족적”이라고 비판한 것도 이 같은 전략적 판단에서 나온 것이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는 4일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에서 체제통일적 성격을, 민족공동체통일방안에서 단계론을 확보했다”며 “단지 이미 체제 경쟁이 끝났기 때문에 굳이 전면에 강조할 필요가 없어서 3단계에서 사실상의 통일, 북한의 변화에 의한 통일로 간 것”이라고 했다. 이어 “새 통일방안에서 민족을 삭제하고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더 앞세운다면 북한 흡수를 공식화하겠다는 것일 텐데, 북한이 민족폐기·무력통일을 들고나오면서 남한의 흡수통일 시도 때문이라고 책임을 돌리는 지금, 우리가 그런 방향으로 통일방안을 수정하면 북한의 주장이 틀리지 않았다는 인정을 해주는 꼴”이라고 지적했다.

김예진 기자 yeji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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