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무 다하다 목숨 잃어도… 예우 못 받는 ‘잊혀진 희생’ [창간35-‘순직’ 국가의 기억]

구현모 2024. 2. 4.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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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 잊혀진 군인의 죽음
해병대에 복무하다 허리 부상
제때 치료 안 된 채 의병 전역
상이등급 못 받고 수 차례 탈락
매년 軍서 사망 군인 100여명
순직 문턱 높아… 기준 세워야
軍복무 중 숨져도 소수만 순직 인정… “아픔은 유족만의 몫”
전역 후 후유증 시달린 故 배봉석 일병
요리사 꿈 접고 우울증 앓다가 생 마감
母 “내 소원은 국립묘지 보내는 것” 눈물
12·12 군사반란 당시 숨진 김오랑 소령
반란군 맞서다 사망했는데 ‘순직’ 처리
우발적 사고 둔갑… 뒤늦게 ‘전사’ 인정

8년 전 아들을 먼저 떠나 보낸 심인옥(66)씨. 밥을 먹으러 식당에 갈 때면 자기도 모르게 주방을 둘러보곤 한다. 언젠간 호텔 조리사가 되겠다던 아들 고(故) 배봉석 일병이 떠올라서다. 스무 살이 되던 해에 해병대에 입대한 배 일병은 2사단 취사병으로 복무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요리학원에 다녔던 취사병 생활은 고되지만 꿈에 가까워지는 시간이었다. 그런 그가 일병이 됐을 무렵 식자재 창고에서 무거운 철자재를 옮기던 중 ‘뚝’ 하는 소리가 허리에서 들려왔다.

고 배봉석 일병의 어머니 심인옥씨가 그동안 모아 놓은 아들의 진단서와 보훈심사 자료 등을 보며 참담한 표정을 짓고 있다. 최상수 기자
심씨는 “군에서 아들이 세 번이나 울면서 전화가 왔다”며 “허리가 아픈데도 약물 처방만 받고 두어 달을 버텼던 것 같다”고 했다. 증상이 악화하자 배 일병은 국군수도병원에서 157일을 보냈다. 그러나 한번 망가진 허리는 돌아오지 않았다. 귀신 잡는 해병대에 입대했다는 자부심은 진작 사라지고 배 일병의 병역 기록은 ‘의병 전역’으로 끝맺었다. 전역 후에도 다친 허리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 오랜 꿈이었던 호텔 조리학과에 진학했지만 허리 통증으로 주방에 서 있을 수조차 없었다. 일어서면 통증이, 앉으면 꿈을 포기해야 한다는 우울증이 그를 덮쳤다.

전역 후 허리 통증도, 우울증도 악화했지만 보훈심사에서 상이등급을 받지 못하고 수차례 탈락했다. 군의 관리 부실 등과의 연관성도 인정해주지 않았다. 무력감은 더욱 커져만 갔다. 심씨는 아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가장 큰 이유가 국가의 외면이었다고 호소했다. 배 일병은 생전 공상을 인정받게 해달라고 싸웠는데 국가의 외면 탓에 심씨가 아들의 죽음을 순직으로 인정해달라고 싸우게 됐다. 기자와 만난 심씨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내 소원은 봉석이를 국립묘지에 보내는 것뿐”이라고 말했다.

지난달 16일 故 배봉석 일병의 어머니 심인옥(66)씨가 아들의 영정 사진을 들고 이야기하고 있다. 최상수 기자
배 일병의 사례는 대통령 직속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이하 위원회)에 진정이 제기돼 조사가 이뤄졌다. 2022년 3월21일 위원회는 “망(亡) 배봉석은 군 복무 중 추간판 탈출증이 발병해 공상 전역했고 전역 후 그 질병의 후유증이 상당한 원인이 되어 발병한 정신적 질환이 주된 원인이 되어 사망에 이르게 됐다”고 판단했다. 그러면서 국방부 장관에게 “군 복무 중 발병한 질병으로 공상 전역한 사람이 그 질병이 상당한 원인이 되어 발병한 정신질환이 주된 원인이 되어 사망한 경우 국방부가 순직으로 처리할 수 있도록 관련 제도를 신속히 마련할 것을 요청한다”고 주문했다.

이 같은 요구들이 이어지자 군 복무 중 임무를 수행하다 부상이나 병을 얻은 뒤 해당 사유로 전역 후 사망해도 전사자나 순직자로 인정받을 수 있게 하는 군인사법 개정안이 만들어졌고 지난해 11월 공포됐다.

서울행정법원은 오는 3월 배 일병이 보훈보상대상자인지 아닌지 판단할 예정이다. 법률대리인 김정민 변호사는 “군 복무 중 다친 것 이외에 사망에 이르게 한 요인이 없지 않으냐”며 “병역의 의무가 있는 국가라면 최소한 군에서 입은 부상이나 피해를 광범위하게 책임지고 보호했어야 하지만 그렇지 못했다”고 말했다.
故 배봉석 일병의 어머니 심인옥씨가 모아 둔 배 일병의 진단서와 보훈심사 자료. 배 일병은 군에서 허리를 다쳐 전역했지만 ‘상이 등급’ 판정을 받지 못해 보훈심사에서 번번이 탈락했다. 최상수 기자
◆국가로부터 잊혀진 죽음

사전을 보면 순직은 ‘군인, 경찰, 공무원이 직무를 다하다가 목숨을 잃음’을 뜻하는 말이다. 정부는 전투 중 산화한 전사자뿐 아니라 순직한 이들의 죽음을 기리고 남은 이들을 지원해야 할 책임이 있다. 국가가 기억해야 하는 죽음이기 때문이다. 매년 군에서 100여명 가까운 군인이 사망하지만 많은 이들은 순직의 문턱조차 넘지 못하고 있다. 행여 순직으로 인정받아도 제대로 된 예우를 받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사망 앞에 ‘순직’이란 단어가 붙는지에 따라 국가의 기억법은 달라진다. 지난해 군에서 순직한 장병의 부모 A씨는 “순직으로 인정되면 국립묘지에 봉안되고 국가가 이들을 함께 기억해주지만 나라를 위해 복무하다 사망했어도 순직으로 인정되지 않으면 그 아픔은 오로지 유족들의 몫이 된다”고 말했다. 순직한 이들의 명예를 높여주고, 유족들이 느끼는 고인의 빈자리를 채워주기 위한 노력과 순직의 기준을 어디까지로 볼 것인가, 순직으로 인정받지 않는 죽음은 국가가 어떻게 기리고 기억할 것인가 논의가 필요하다.
반란군의 총탄에 숨진 김오랑 소령(1990년 중령 추서).
◆순직 뒤에 숨어있던 진실

여기에 오랫동안 외면받아 온 죽음이 있다. 12·12 군사반란 당시 정병주 특수전사령관을 지키다 반란군의 총탄에 숨진 김오랑 소령(1990년 중령 추서)이다. 그의 평전 ‘역사의 하늘에 뜬 별 김오랑’의 저자 김준철씨는 4일 세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국방부 정신전력 교재에 김오랑의 군인정신이 기록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모두가 반란군에 동조하거나 피신했을 때 사령관 비서실장이었던 김 소령만 목숨을 걸고 자신의 자리를 지켰기 때문이다. 김씨는 “군인으로서 임무에 충실했던 것이고 군인이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 후배들에게 보여준 사례”라고 설명했다.

최근 1000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서울의 봄’에 배우 정해인이 김 소령(극중 ‘오진호 소령’) 역을 맡으며 화제가 됐다. 그러나 영화 개봉 전까진 김 소령의 명예로운 죽음을 기억해주는 이들이 많지 않았다. 적과의 교전, 무장폭동, 반란에 의해 사망한 만큼 마땅히 ‘전사’에 해당하지만 매장 보고서에는 사망 경위가 ‘우발적 사고’라고만 돼 있어 불과 몇 년 전까지도 그냥 ‘순직’으로 분류됐었다. 순직이 진실을 감추기 위한 용어였던 것이다. 2022년 11월이 돼서야 대통령 직속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가 그의 사망 구분을 순직에서 전사로 변경했다.
김오랑 소령의 평전을 쓴 김준철씨가 한 행사에서 고인의 삶을 추모하고 있다. 김준철씨 제공
김씨는 “19대 국회 당시 국회 국방위원장을 맡았던 유승민 전 의원이 김오랑의 무공훈장 추서 및 추모 결의안을 발의해 통과시켰다”며 “그의 추모비 건립을 촉구하는 내용이었지만 모교인 육군사관학교도, 특전사도 모두 거부했다. 이번 정부 인수위 때도 건의했으나 회신이 오지 않았다”고 말했다.

김씨 역시 1990년 학생군사교육단(ROTC) 28기로 임관해 특전사에서 복무했다. 복무 당시에는 선배인 김 소령을 알지 못했지만 20여 년 전 무릎 부상으로 전역한 뒤 인터넷에서 ‘김오랑 추모회’라는 단체를 우연히 발견했고 그의 생애에 빠져들게 됐다고 한다. 이후 12·12 관련자들의 증언과 진술 자료 등을 모아 평전을 쓰게 됐다. 책에는 45년 전 김 소령의 모습이 생생하게 기록돼 있다. 1979년 12월12일 밤 김충립 당시 보안사 보안반장이 홀로 남아 권총에 총알을 장전하던 김 소령을 발견하고 이유를 묻자 ‘보안사에서 사령관님을 잡으러 올 것 같아서’라는 답이 돌아왔다. 반란군이 정병주 사령관을 체포하려고 들이닥칠 것을 알면서도 사령관을 지키려고 했던 것이다.

김씨는 12·12 당시 반란군에 맞서다 희생된 정선엽 병장 얘기도 빼놓지 않았다. 정 병장은 당시 서울 용산 국방부 지하벙커에서 근무 중 국방부를 장악하려는 반란군의 총탄에 전사했다. 김씨는 “영화에서는 정 병장이 너무 지나가듯 등장해 아쉬웠다”며 “병사라 조명을 많이 못 받은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이들의 희생을 기리고 군인정신을 이어받기 위해서는 국가가 함께 기억해줘야 한다”고 덧붙였다.

구현모 기자 lil@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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