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신도시 지어라” 특별지시에…천지개벽 이 동네, 올림픽까지 [사-연]

한주형 기자(moment@mk.co.kr) 2024. 2. 4.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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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올림픽과 서울 도시구조의 변화사를 따라 걷다 (5)
종합경기장이 포함된 잠실 개발
1970년 5월 제작된 잠실지구 종합개발계획의 모형도. 도로망은 격자형으로 설계되었으며 탄천 인근에 종합운동장이 배치되었다. 석촌호수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서울역사아카이브]
잠실대교 건설이 시작되고 제방공사와 공유수면매립공사도 삽을 뜰 즈음, 잠실지구 구획정리사업에 대한 검토도 이루어지기 시작합니다. 1970년 한국종합기술공사에 의해 수립된 ‘잠실지구 종합개발계획’에는 210만 평의 잠실지구에 종합경기장 건설과 함께 약 10만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현대적인 도시를 조성하는 내용이 담겼습니다.
1970년 발표된 잠실종합운동장의 조감도. [서울역사아카이브]
살펴보아야 할 점은 올림픽 유치 10년 전인 1970년 초반부터 잠실지구계획에 ‘종합경기장 건설’과 ‘체육대학의 신설’안이 포함되었다는 것입니다. 계획안에는 ‘발전하는 한국의 국위선양의 한 효과적인 방법으로 아시안게임의 유치를 목표로 한 올림픽 경기장’이라고 적혀있지만, 사실 국제행사를 개최할 먼 미래를 내다보았다기보다는 아시안게임 반납으로 인해 촉발된 경기장 건설 요구를 수용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해 보입니다. 이때는 그 누구도 이곳에 들어설 종합경기장에서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의 막이 오를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잠실지구 종합개발계획은 이 시기 서울의 다른 지역에서 이루어진 구획정리사업과 형태 및 기능적으로 크게 차별화될 것 없는 모습이었습니다. 격자형의 평면으로 이루어진 형태에 주거용지를 저·중·고밀도로 구분하여 아파트와 독립주택을 배치하였고, 중심지에는 행정과 업무시설, 상업시설을 집중적으로 두었습니다. 이처럼 초창기 잠실지구는 영동지구와 천호·강동지구, 성남의 광주대단지를 연결하는 부도심으로 설계되었으며, 동시에 탄천을 사이로 두고 직결된 영동지구의 베드타운으로 계획되었습니다.

‘이상적 신도시’로 만들어라… 대통령 지시에 전면 수정된 잠실개발안
1972년 7월 잠실대교 개통식에 참여한 박정희 대통령과 양택식 서울시장, 육영수 여사(왼쪽부터)가 테이프 커팅을 하고 있다. [KTV]
박정희 대통령의 특별 지시로 잠실 개발계획이 전면 수정된 된 것은 1973년 10월의 일이었습니다. 박 대통령은 양택식 서울시장에게 서울에 마지막 남은 빈 땅인 잠실을 틀에 박힌 도시가 아닌 ‘국제적으로 손색이 없는 운동장 시설을 갖춘 이상적인 신도시’의 모습으로 개발할 것을 주문합니다. 전년도인 1972년 잠실대교와 송파대로가 완공되어 개통된 동시에 잠실의 물막이공사가 마무리된 날, 박 대통령은 처음으로 잠실대교를 건너 육속화된 잠실 땅을 밟았을 정도로 그는 이 지역에 대한 관심이 지대했습니다.
1974년 서울시가 발표한 잠실지구 종합개발 기본계획 조감도(왼쪽). 오른쪽은 잠실지구 내 토지이용계획. [서울역사아카이브·서울시]
잠실지구 종합개발계획안을 바탕으로 하는 구획정리사업은 전면 중단되었습니다. 즉각적으로 건축 및 도시계획과 관련된 전문기관, 학계와 언론계 등 각계인사가 총동원된 심의위원회가 구성되었습니다. 홍익대학교의 박병주 교수를 주축으로 하는 위원회는 미국과 영국, 일본 등 선진국들의 뉴타운 계획을 참고해 이듬해 잠실지구에 대한 새롭고 입체적인 도시설계안을 내놓았습니다. 11.2㎢(340만 평)을 대상으로 인구 25만 명을 수용하는 뉴타운 건설을 골자로 하는 잠실지구 종합개발 기본계획은 기존 구획정리의 문제점을 해소할 뿐 아니라 개발 이후의 토지이용계획까지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잠실지구는 20여개의 근린주구와 운동장 및 공원지구, 중심업무지구로 구성되었습니다. 근린주구란 주거지 반경 500~800m에 이르는 보행권역 안에 공공시설, 쇼핑몰, 초등학교, 공원과 놀이터 등 주민들의 생활에 필요한 시설들을 배치하는 것입니다. 자동차와 같은 교통수단이 없어도 권역 내에서 일상생활이 불편함 없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 특징입니다. 사람들이 걸어서 주구 내 시설에 이르게 되는 보행가로는 녹지로 채워졌습니다. 1968년 용산 동부이촌동 공무원아파트단지에 처음 도입된 근린주구의 개념은 여의도 시범아파트단지계획을 거치며 발전했고, 잠실지구 곳곳에 실현되어 빛을 발했습니다.

1977년 3월 잠실종합운동장 실내체육관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서울역사아카이브]
잠실지구 종합개발계획의 가장 큰 특징이라면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던 국공유지를 환지처분하여 공공용지를 충분히 확보했다는 것입니다. 잠실지구 공공용지의 비율은 41%로, 이는 20~30%대를 유지하던 다른 지구에 비해 높은 편입니다. 잠실지구의 방대한 공공용지는 도심지 곳곳의 도로와 공원, 녹지, 학교 뿐 아니라 종합운동장지구와 호수공원으로 거듭났습니다. 매립공사 이전 ‘부리도’라는 이름의 섬이 있던 지역 약 43만㎡(13만 평)을 운동장공원 부지로 확보하였고, 1976년부터 이곳에 잠실실내체육관과 학생체육관, 남서울 대운동장의 건설을 시작합니다. 한편 잠실섬 남쪽의 강 흐름을 폐쇄할 때 매립하지 않고 남긴 31만㎡(9만 4000 평)에는 호수공원을 조성했습니다. 한때 한강의 본류로 흐르던 송파강의 흔적이 지금의 석촌호수로 남은 것입니다.
1983년 6월 촬영된 잠실 호수공원의 모습. [서울역사아카이브]
잠실지구 중앙에는 중심업무지구를 설정하여 상업, 업무, 행정, 위락 등의 기능을 가능케 했습니다. 다만 잠실이 도심 기능을 할 영동지구와 근접해 있고, 호수공원이 면해 있다는 점에서 중심업무지구는 전체 면적의 2.2%에 불과한 6만 8000여 평을 배분했습니다. 대신 이곳에는 초고층 건물을 촘촘하게 클러스터형으로 배치하여 중심성을 강화했습니다.

초창기 계획 당시 격자형으로 설정되었던 도로망은 수정되어 방사환상형으로 개편되었습니다. 중심부에서 사방으로 뻗어 나가고, 그에 직행하는 환상 도로로 이루어진 도로구조가 당시에는 효율적인 토지이용, 능률적인 교통체계, 다양한 주거환경, 질서 있는 도시화 측면에서 우월한 형태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잠실대교 남단에서 광주를 연결하는 송파대로와 삼성교에서 국립경기장 입구에 이르는 올림픽로, 잠실지구를 지나는 이 두 간선도로는 너비가 40~50m로 폭이 넓게 건설되었습니다. 광주대단지에서의 통과교통과 왕래교통을 상정해 도로율이 25%를 상회하도록 여유 있게 설계했기 때문입니다.

오일쇼크와 맞물린 잠실주공아파트 건설
서울시는 잠실지구 중 46만여 평을 주택공사에 일괄 양도하여 아파트단지를 건설하도록 했습니다. 강북 인구 증가를 억제하고, 도심 불량주택 철거민들을 수용할 아파트를 대량으로 확보하기 위해서였습니다.

1973년 중동전쟁을 시작으로 촉발된 제1차 오일쇼크의 영향은 대한민국을 피해 가지 않았습니다. 물가가 치솟고 불황의 기운이 엄습하자 정부는 난관을 극복할 해결책으로 건설경기 불씨를 살리는 것에 주력합니다. 건설은 짧은 기간 안에 일자리를 창출하고 소비를 늘리는 좋은 수단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취지로 도로와 철도 등 공공 토목공사와 더불어 서울 내 아파트 건설붐이 촉발됩니다.

1976년 11월 잠실 일대 항공사진. 중앙에 보이는 아파트단지가 잠실주공1,2단지이다. [정부기록사진집]
잠실주공아파트는 당시 이러한 시대적 상황과 요구에 맞물려 지어졌습니다. 잠실지구 내 주공아파트 건설물량은 가히 파격적이었는데, 당시 계획인구 10만 명 이상의 대단지 아파트는 선진국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흔치 않았습니다. 1970년대까지 대한민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아파트는 반포주공1단지로, 99동 3,650가구였습니다. 잠실주공아파트는 이 4배가 넘는 규모였습니다.

1975년 2월, 잠실주공1~4단지의 건설기공식이 열렸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주택공사의 새 사장으로 양택식 전임 서울시장을 임명합니다. 누구보다 잠실단지 건설에 적임자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양 사장은 잠실단지건설본부를 현장에 설치하고, 이른바 ‘180일 작전’을 선포합니다. 선전 구호 아래 아파트 건설 기간을 기록적으로 단축하겠다는 의미였습니다.

1977년 잠실주공1~5단지가 들어선 잠실 일대의 전경. 사진 위쪽에는 석촌호수를, 아래 쪽에는 건설 공사가 진행중인 종합운동장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한국토지주택공사]
역사상 전례 없는 대규모 공사였던 만큼 잠실주공아파트 공사에는 당시 대한민국의 건설업체란 건설업체는 모두 참여했습니다. 너도나도 숙련공을 확보하려고 했기에 이들의 노임이 크게 올랐고, 일거리가 넘쳐 일할 사람을 구하지 못해 인력난이 심했습니다. 레미콘이나 타일, 목재와 같은 건설자재업체도 잠실 아파트 건설로 특수를 맞아 밤낮으로 공장을 가동했습니다. 심지어 아파트가 완공될 즈음에는 전력·전화국과 수도국, 하다못해 이삿짐 업체까지도 늘어나는 일을 감당하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이처럼 불황의 그늘 아래 잠실 주공아파트 건설은 국내경기를 끌어올리는 기폭제 역할을 했습니다. 서울 내 실업률은 크게 떨어졌고, 노동자들의 임금은 올랐습니다.
1978년 잠실지구에 미성아파트가 건설되고 있다. 너머로 잠실시영아파트 단지가 보인다. [서울역사아카이브]
1979년 10월 촬영된 잠실주공5단지 전경. [서울역사아카이브]
잠실주공1~4단지의 입주가 한창이던 1976년, 잠실대교 바로 앞 10만 평 부지에 5단지 건설이 시작됩니다. 잠실주공5단지는 여러모로 대한민국 아파트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아파트였습니다. 5단지는 당시 신식 아파트가 추구하던 ‘넓은 평형, 고층, 지역난방과 도시가스’라는 방향성을 모두 담은 아파트였습니다. 1~4단지가 소형 위주의 저층아파트였던 반면 5단지는 34·36평, 15층으로 지어졌습니다. 15층의 아파트는 당시엔 ‘초고층’아파트였기 때문에 초창기 5단지는 잠실고층아파트나 잠실 고밀도아파트로 불렸습니다. 주택공사는 한국 주택건축기술이 도달한 높은 수준을 5단지를 통해 보여주고자 했고, 이 공사에 모든 건축 노하우를 쏟아 부었습니다. 잠실주공5단지는 중산층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주택공사의 성공이 증명되었습니다.
1994년 9월 촬영된 잠실주공아파트 일대의 모습. [매경DB]
<참고자료>

ㅇ 손정목,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 3」, 한울출판사

ㅇ「88올림픽과 서울」, 서울역사박물관

ㅇ「88서울올림픽, 서울을 어떻게 변화시켰는가」, 서울역사박물관

ㅇ 김기호 외 6인, 서울도시계획사 제2권 「광복~1970년대의 도시계획」, 서울역사편찬원

ㅇ 김진희, 서울 1960-70년대 도시계획에서 「잠실지구종합개발기본계획」의 의미, 서울시립대학교 논문

정부기록물과 박물관 소장 자료, 신문사 데이터베이스에 잠들어 있는 빛바랜 사진들을 열어 봅니다. ‘사-연’은 그중에서도 ‘길’, ‘거리’가 담긴 사진을 중심으로 그곳의 이야기를 풀어 나가는 연재입니다. 거리의 풍경, 늘어선 건물, 지나는 사람들의 옷차림 등을 같은 장소 현재의 사진과 이어 붙여 비교해볼 생각입니다. 사라진 것들, 새롭게 변한 것들과 오래도록 달라지지 않은 것들이 무엇인지 살펴봅니다. 과거의 기록에 지금의 기록을 덧붙여 독자님들과 새로운 이야기를 이어 나가고 싶습니다. 해당 장소에 얽힌 ‘사연’들을 댓글로 자유롭게 작성해 주세요. 아래 기자페이지의 ‘+구독’을 누르시면 연재를 놓치지 않고 읽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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