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한철의 서울지리지] 조선 청춘 '핫플'은 영통교 … 설연휴 통금 없애자 밤새 북적
◆ 매경 포커스 ◆
풍요롭고 떠들썩했던 18세기 서울의 설날
"집집마다 향기로운 술 넘쳐나고(家家椒酒酒千壺), 쇠고기 구이, 양고기 찜, 폭죽 모두 준비됐지(牛炙羊烹爆竹俱). 반백 노인은 차례술 고통스레 들이켜고(老者斑白耐屠蘇), 소년은 의기양양 장군, 멍군 외치네(少年意氣覓呼盧)."
숙종 때 학자 김창흡(1653~1722)의 문집인 '삼연집'에 수록된 '설날한탄(新歲歎)'이란 시의 일부다. 김창흡의 글에서 묘사된 18세기 전후 한양의 설날 풍경은 조선이 가난하고 낙후됐다는 고정관념을 여지없이 허문다. 그가 살던 시절의 설날은 풍요롭고 활력이 넘쳤다. "남녀 길 위에서 만나 서로 새해 인사를 건네니(都人士女途中賀), 이날만은 모두 즐거운 표정들). … 금천교에서는 기방의 가야금 연주소리(靑樓鼓瑟錦川橋), 종각네거리는 붉은 머리띠의 소년들 공차기놀이."
김창흡은 그러면서 "문을 나서면 바깥놀이가 사흘 동안 계속되니(出門行遊三日畢), … 가련타, 송구영신의 즐거움이여(可憐送舊迎新樂)"라고 했다. 사흘간이나 요란하게 놀러 다니려니 심신이 괴로울 수밖에.
음력 1월은 농업을 근간으로 했던 한민족에게 매우 중요한 달이었다. 한 해는 봄·여름·가을·겨울 순으로 이어진다. 마땅히 1월 1일은 봄이 돼야 하지만, 사실 양력설은 1년 중 가장 추운 겨울이다. 음력 1월 1일에 와서야 비로소 봄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날은 동시에 한 해의 농사가 시작되는 날이기도 하다. 그런 만큼 우리 조상들은 음력설을 1년 중 가장 특별한 날로 인식하고 기념했다. 옛사람들은 뜻깊은 1월을 어떻게 축하했을까.
설날은 사흘간 연휴…소 도살도 허용
설날은 사흘간 연휴였다. 조선후기 학자 김매순(1776∼1840)이 서울 풍속을 적은 '열양세시기'에 따르면 설날부터 3일간은 모든 관청이 휴무에 들어가고 시전(市廛·관허시장)도 문을 닫았으며 심지어 감옥도 죄수를 내보내고 비웠다. 소를 잡지 못하게 하는 우금(牛禁)도 이 기간 풀렸다. '열양세시기'는 "단속 관리들이 우금패를 깊이 보관하고 사용하지 않아 민간에서 소를 자유롭게 잡아 팔았다. 큰 고깃덩이를 시내 곳곳에서 많이 볼 수 있었다"고 전했다.
대궐에서는 아침 일찍 삼정승이 모든 관원을 이끌고 정전 앞뜰에 나아가 임금에게 새해문안을 드렸다. 이를 정조하례(正朝賀禮·신년 축하 인사)라고 했다. 정조하례는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삼국사기'는 "신라 진덕왕 5년(651) 봄 정월 초하루, 임금이 조원전(朝元殿)에 나가 백관에게서 새해인사를 받았다. 새해 하례예식은 이때부터 시작됐다"고 했다. 조선건국 후 첫 정조하례는 1393년(태조 2) 열렸다. '태조실록'에 따르면 태조 이성계(1335~1408·재위 1392~1398)는 중앙과 외관의 인사를 받았다. 각 도에서 토산품을 바쳤고 알도리(斡都里·건주여진)는 살아 있는 호랑이를 진상했다. 모든 신하는 임금의 천수를 기원하며 "천세"를 세 번 외쳤다.
임금들, 새해 첫날 지방관에 "농업생산성 높여라" 특명
농업은 국부의 원천이었다. 조선 왕들은 새해 첫날 지방관들에게 "백성들 농사에 각별히 신경 쓰라"는 권농윤음(勸農綸音)을 내렸다. '정조실록'에 따르면 22대 정조(1752~1800·재위 1776~1800)는 재위 기간 단 한 차례도 거르지 않고 설날 윤음을 팔도관찰사와 유수들에게 하달했다. 그러나 지방관들은 왕명에 단 한 차례도 응답하지 않았다. 화가 난 정조는 1799년(정조 23) "책자를 작성해 (지시 사항을) 조목조목 보고하라"고 엄명했다. 그러나 권농윤음은 정조 사후에 없어졌다.
민간에서는 집안의 사당에서 새해가 됐음을 고하고 제사를 지냈다. 이후 집안 어른과 직장 상사를 찾아뵙고 세배를 했다. 도성 안의 모든 남녀는 울긋불긋한 옷차림을 하고 떠들썩하게 왕래했다. 무엇보다 어린이들은 새 옷으로 한껏 단장했다. '열양세시기'는 "이를 세장(歲粧) 또는 설비음(歲庇陰·음기를 덮는 새해 옷·설빔)이라고 한다"고 했다. 모든 것이 새롭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또 '열양세시기'는 방문객이 붐비는 정승·판서 등 권세가는 손님들을 집 안으로 들이지 않고 세함(歲銜·명함)만 받았다고 전한다. 명함 없는 손님이 이름을 남길 수 있게 붓과 종이를 별도로 두기도 했다.
손님에게는 세찬(歲饌)과 세주(歲酒·차례주)를 대접했다. 설날 하면 떡국이다. 홍석모(1781~1857)의 '동국세시기'는 "떡국 몇 그릇 먹었냐고 물어보는 것은 곧 나이가 몇 살인지 물어보는 것과 같다"며 "시장에서 시절 음식으로 판다"고 했다. 갖가지 한약으로 빚은 세주는 "악한 기운을 잡는다"는 뜻에서 도소주(屠蘇酒)로 불렸다. 세주는 어린이도 마셨다. 선조 때 우의정을 지낸 심수경(1516~1599)의 '견한잡록'은 "설날 아침에 도소주를 마시는 것은 옛 풍습이다. 젊은이가 먼저 마시고 노인이 뒤에 마신다"고 썼다. 어릴수록 전염병에 취약해 먼저 나쁜 기운을 떨쳐버리라는 배려였다.
외출 힘들었던 양반가 여성들, '문안비' 보내 인사 교환
바깥 출입이 불편한 양반가 부인들은 정초 연휴가 끝나는 3일부터 대보름인 15일 사이 화려하게 치장한 어린 여자 종을 일가 친척에게 보내 새해인사를 교환했다. 문안을 대신하는 여종을 '문안비(問安婢)'라고 했다. 대궐은 갇힌 공간이다 보니 문안비의 왕래가 잦았고 이를 둘러싼 잡음도 많았다. 1493년(성종 24) 5월 25일 '성종실록'에 따르면 내시 이양이 계성군 집의 문안비를 희롱했다가 장형 70대의 처벌을 받았다. 기묘사화(1519년 훈구파가 조광조를 숙청한 사건) 때 '조씨전국(趙氏專國·조씨가 나라를 농단한다)' 소문을 퍼뜨려 신진사림을 몰아낸 장본인도 경빈 박씨의 문안비였다.
집안의 여성들은 설날에 널뛰기를 하며 담장 밖 세상을 훔쳐봤다. 널을 잘 뛰면 시집가서 아기를 잘 낳는다는 말이 떠돌며 높이뛰기 경연도 벌어졌다. 유득공(1748∼1807)의 '경도잡지'는 "여염집 부녀자들이 몇 자 높이로 올라가며 패물 울리는 소리가 쟁쟁하고, 지쳐 떨어져 나가기도 한다"고 했다.
병과 재앙을 팔기도 했다. '견한잡록'에서는 "설날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사람을 만나면 그 이름을 부르고, 그 사람이 대답하면 '나의 허술한 것을 사가라'고 한다. 자기의 병을 팔고 재앙을 면하고자 함이다"라고 전했다. 대보름 더위팔기의 원조다. 정월 세시행사는 대보름날 정점을 이룬다. 현대인은 1월 1일에 산이나 바닷가로 몰려가 해맞이를 하지만, 과거에는 대보름 달맞이를 하며 한 해의 소원을 빌었다. 음력을 사용하는 사회에서 첫 보름달의 의미는 컸다. '동국세시기'는 "초저녁에 횃불을 들고 높은 곳에 오르는 것을 달맞이라 한다. 먼저 달을 보는 사람이 길(吉)하다"고 썼다.
[배한철 기자]
▷▷참고문헌
1.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 김매순
2. 경도잡지(京都雜志). 유득공
3.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홍석모
4. 조선왕조실록, 삼국사기, 삼연집(김창흡), 견한잡록(심수경), 지봉유설(이수광), 하재일기(지규식)
5. 한국세시풍속사전-정월편. 국립민속박물관.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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