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자지구에 대한 진실을 말할 시간 [세계의 창]
슬라보이 지제크│슬로베니아 류블랴나대·경희대 ES 교수
대부분 사람에게 진실은 사실에 부합하는 진술을 의미한다. “나는 지금 세인트헬레나섬에서 나폴레옹 저택을 보고 있다”는 말이 진실이 되려면 그 사람이 정말 그렇게 하고 있어야 한다. 반면,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자들은 진실/비진실은 진술 그 자체의 속성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그 자체로는 진실도 아니고 거짓도 아닌 어떤 담론이 어떻게 진리로 구성되는지를 역사적으로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과학은 실험적 절차를 통해 명확하고 공식화된 용어로 특정 명제를 진리로 확립한다. 종교는 복잡한 수사학적 방식으로 우리가 자비로운 신적 존재가 통제하는 세계에 살고 있다는 경험을 생성함으로써 이른바 ‘진리’를 확립한다.
진실에 대한 일반적인 관점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역사주의적 상대주의 사이에 또 다른 길이 있을까? 정신분석학이 힌트를 제공한다. 정신분석가는 진실(내담자의 증상을 설명하는 해석)을 적절한 시점에 말해야 한다. 그는 자신의 말을 통해 내담자가 자신에 대한 억압된 진실을 받아들이도록 할 수 있다고 확신할 수 있을 때 그것을 말해야 한다. 진실을 적절하지 않은 시점에 말하면 내담자는 그 말을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라고 여겨 무시할 것이다.
진실이 그것이 전달되는 이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하려면 그것을 말하는 시점이 중요하다. 가자 전쟁에 대한 정치적 진술들도 분명히 그러하다. 지난해 10월7일 가자 전쟁 발발 직후, 하마스 공격으로 불에 탄 유대인들 주검이라고 알려진 사진이 크게 보도되었다. 이스라엘 정부는 한달이 지나 그 사진들은 유대인이 아니라 이스라엘군에 의해 불에 탄 하마스 쪽 사람들 사진임을 인정했다. 하마스의 어린아이 참수 의혹도 말을 바꾸었다. 두 거짓은 “팩트”로 등장해 세계적으로 큰 주목을 받았지만, 이스라엘 정부의 시인은 큰 주목을 받지 않았다. 요컨대 이스라엘 정부는 전세계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는 순간에는 거짓을 말했다가, 자신들의 말이 사소한 정정 정도로 받아들여지게 된 시점에 진실을 말했다.
많은 이는 진실을 발언하는 게 실제적 영향을 미칠 수 있을 땐 그것을 말하지 않는다. 그러다 어떤 말을 해도 그것이 미치는 효과가 무의미하고 아무 차이도 만들지 않을 때가 되면 진실을 자유롭게 말한다. 이스라엘 첩보기관장을 지낸 아미 아얄론도 그랬다. 그는 작년 초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인들이 희망을 가질 때만 안보를 확보할 수 있다”고 말했지만, 그때는 이미 그가 은퇴해 발언이 별 반향을 일으키지 않게 된 시점이었다.
지난달 18일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이스라엘 국가는 강에서 바다까지 전 지역을 지배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강에서 바다까지’(요르단강에서 지중해까지)는 팔레스타인인들과 좌파들이 팔레스타인 해방을 요구하며 사용하는 구호다. 그동안 우파들은 이 구호가 유대인들에 대한 학살을 의미한다는 거짓 주장을 펼치며 진실을 조작해왔고, 이스라엘은 그동안 팔레스타인인들이 아니라 자신들이 지배권을 ‘강에서 바다까지’ 확대하고자 한다는 것을 부인해왔다. 그런데 이제 이스라엘 총리가 그것을 공개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우리 정치 담론의 낯 뜨거운 추잡함을 보여주는 명백한 사례다.
네타냐후는 팔레스타인인들을 구약에서 신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전멸시키라고 지시한 민족 ‘아말렉’에 견주며 “‘아말렉’이 우리에게 한 짓을 기억하라”고 연설한 바 있다. 종교적 근본주의로 인종 청소를 정당화한 것이다. 이 학살적 사고는 일부 유전학자가 팔레스타인인들이 아말렉인의 후손이라고 주장하고, 일부 고고학자가 아말렉인이 어린아이를 희생시키고 고문할 정도로 잔인했다는 증거를 발견했다고 주장하면서 가장 저열한 지점에 다다른다. 신이시여, 거짓을 정당화하기 위해 진실을 찾는 이들로부터 우리를 구하소서.
번역 김박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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