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살 포상금 걸린 ‘K사슴’ 고라니…공존할 길은?
입춘(立春), 고라니를 떠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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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입춘(立春).
봄에 들어선다는 의미로 입춘(入春)으로 생각하기에 십상이지만 입춘(立春)이다. 설 입(立)자에는 ‘서다’라는 뜻 이외에 ‘곧’이라는 의미가 있다. 본격적으로 봄에 들어섰다 라기보다는 ‘이제 곧 봄이다’라는 의미에 가깝다. 매서운 겨울 한복판인 동지, 소한, 대한을 지나 점점 봄으로 가고 있다. 겨울을 잘 넘긴 생물들에게도 봄을 노래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올해 강원도에는 유독 눈이 많이 내렸다. 사람들은 한겨울 낭만을 즐길 수 있겠지만, 산에 고립된 채 살아가는 야생 생물에게 대설주의보나 대설경보는 발을 묶는 장애물이자 피하고 싶은 재앙이다.
눈 때문에 피해를 보는 한반도의 대표적 야생동물은 아마 고라니일 것이다. 고라니는 전 세계 개체군의 90% 이상이 우리나라에서 서식하고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 대부분도 고라니를 잘 알고 있다. ‘한겨울 배고픔과 탈진으로 민가에 내려온 고라니’ ‘로드킬 수난 고라니’ 등과 같은 제목으로 언론에 자주 등장하기 때문이다.
겨울이 되면 고라니는 먹이를 찾아 목숨을 걸고 민가로 내려온다. 두꺼운 눈에 먹이가 묻혀버려 먹을 것이 없는 절박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이동 중에 도로와 자동차를 만나게 되니 차에 치여 길 위에서 죽는 일이 흔한 것이다.
고라니는 세계자연보전연맹(IUCN) 적색목록에 사자나 하마와 같은 급으로 기재된 귀한 종으로 세계적으로 융숭한 대접을 받는 국제적 멸종위기종이지만, 유독 한반도에서만 해를 끼치는 동물로 지정되어 있다. 한반도만 아니면 국빈(VIP)인데 장소를 잘못 골라 죽임을 당하는 야생 생물이다.
너무 많아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야생동물이라고들 하지만 실제로 야생에서 고라니를 만나는 건 어려운 일이다. 다람쥐를 볼 때마다 ‘안녕, 아쿠(옛날 키우던 다람쥐의 별명)’, 나비를 봐도 ‘잘 있었어?’라고 말을 거는 여섯 살 손녀에게 책에서만 보던 고라니와의 만남은 오랫동안 간절한 소원이다.
산과 민가의 경계인 해발 500m에 위치하고 습지가 많은 ‘홀로세생태보존연구소’는 고라니에게는 좋은 서식지다. 하루에도 몇 번씩 만나는 놈들인데 공교롭게 손녀에게만은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다. 고라니를 보게 해 달라고 고사리 같은 손을 모아 기도하던 모습에 필자도 안달이 나, 아쉬운 대로 고라니의 발자국과 배설물을 보여주며 고라니가 있다고 해도 정말 볼 수 있느냐며 좀처럼 믿질 않았다. 아마도 동물원이 아닌 숲 속에서 커다란 동물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실감이 나질 않았던 것 같다.
그토록 애타게 보고 싶어 하던 고라니가 폭설로 먹을 것을 찾아 연구소 앞마당까지 내려와 드디어 마주치게 됐다. 그러자 ‘할아버지, 고라니야!’를 외치며 놀라움과 감탄의 눈빛으로 환호성을 지르는 손녀를 보며 덩달아 행복했다. 큰 소리에 화들짝 놀란 고라니가 별안간 무서운 속도로 내달리자 ‘괜찮아’를 연발하며 안심시키려 했지만 고라니는 눈만 마주치고 산속으로 사라졌다. 짧은 해후였다.
과연 고라니는 죽여 없애야 하는 천덕꾸러기인가?
어린이도 반기는 멸종위기종이지만 고라니는 우리나라 ‘야생생물 보호 및 관리에 관한 법률’이 정한 유해야생동물이다. ‘사람의 생명이나 재산에 피해를 주면’ 포획(사살)이 가능하다. 농작물의 피해 등을 거론하며 부정적인 면만 강조하면서 개체 수를 조절해야 한다고 하나 설득력은 없다.
야생동물의 적정한 개체 수를 설정하는 기준도 분명하지 않고, 인위적으로 통제하는 일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조절 자체가 굉장히 위험한 일이다. 개체군의 크기가 감소한다는 것은 서식 지역이 제한되거나 개체 수가 줄어든다는 의미인데, 이것은 곧 유전적 다양성이 떨어진다는 뜻이다. 유전 다양성이 감소하면 종의 생존도 취약해진다. 가령 고라니에게 치명적인 바이러스나 곰팡이를 매개로 한 전염병이나 질병이 돌았다고 치자, 그런 경우 고라니는 절멸할지도 모른다.
문제는 우리나라 고라니의 절멸은 곧 전 세계 고라니의 멸종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세계적인 멸종위기종을 우리나라에서 멸종시킨다면 국제 사회의 비난을 받을 각오를 해야 한다.
고라니가 늘어난 것은 고라니의 개체 수를 조절해 줄 최상위 포식자가 없어진 까닭이다. 그러나 다른 포식자들은 수두룩하다. 삵, 수리부엉이, 들개까지 고라니를 잡아먹는다. 굳이 인위적으로 관리하지 않더라도 밀도 조절이 가능한 것이다.
개체 수를 줄일 생각만 할 게 아니라 왜 고라니가 한반도에서만 서식하고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지 연구해야 한다. 생태계의 구조와 기능, 식물과 환경, 미기후(Micro climate, 주변환경과 다른 국소지역의 기후)와 미소 서식지(Micro habitat, 생물·곤충 등의 서식에 적합한 작은 서식환경)까지 고려한 장기적이고 종합적인 연구, 공존에 대한 실질적 대책이 필요하다.
고라니의 유해종 지정은 애초에 농작물 피해 때문에 벌어진 일이므로 결국 농민의 피해를 막는 것이 고라니 보전의 관건이다. 농작물을 해치는 고라니를 세계적 멸종위기종이라면서 무조건 보호하자고 하면 설득력이 떨어진다. 고생해서 지은 농사를 망치는데 어떻게 무한한 관용을 베풀 수 있겠는가. 현재는 마리 당 포획 포상금을 수렵인들에게 지급한다. 그럴 게 아니라 고라니의 포상금을 농가에 직접 전달하면 어떨까. 농민에게도 피해를 본 농작물에 대한 배상이 되고, 고라니도 보호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고라니는 필자의 연구소에서도 미운 짓만 골라한다. 재배 중인 상춧잎, 고구마 새순을 모두 뜯어먹고, 기껏 조성해 놓은 수련원의 연꽃, 노랑어리연꽃의 어린잎을 낱낱이 베어먹어 하루아침에 황폐화했다. 멸종위기종 소똥구리를 위해 초지 2㏊의 방목지를 조성했지만, 방목지 풀은 대부분 고라니 몫이다. 밉지만 그래도 세계적으로 귀한 놈이라 용서를 한다.
대한민국 문화가 전 세계적으로 인정받으며 케이푸드(K-Food), 케이팝(K-Pop)으로 칭송받는다. 고라니는 대한민국에만 서식하는 소중한 생명이다. 고라니에게 케이사슴(K-Deer)이라는 별명을 붙여주고 생물다양성의 중요성과 멸종위기종 보호를 알리는 것도 꽤 매력적일 것 같다.
입춘은 한겨울도, 봄도 아닌 어정쩡한 계절이지만 생명이 꿈틀대는 봄의 세상을 미리 살짝 보여준다. 고라니도 아직 끝나지 않은 겨울을 견뎌야 하겠지만, 봄이 가까운 이때쯤 매사 희망이 생긴다. 고라니에 대한 인식도 조금은 따뜻해져서 덜 고단한 삶을 살길 바라본다.
글·사진 이강운 홀로세생태보존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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