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쾌한 액션과 끈끈한 연대, 강요된 가부장제 뒤집기

한겨레 2024. 2. 4.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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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황진미의 TV 새로고침
밤에 피는 꽃
‘신랑 따라 죽어라’ 압박받는 과부
복면 쓰고 위기 처한 여성들 구해
‘총 든 아기씨’ 잇는 혁명적 캐릭터
재능 많은 이하늬 장점 극대화
mbc 제공

‘밤에 피는 꽃’은 시대가 요청하는 여성 서사의 모든 것을 이하늬를 통해 구현한 드라마다. 그것도 가장 극단적인 과부 잔혹극의 형태를 빌려, 통렬한 뒤집기 한판을 벌인다. 드라마는 이하늬의 코믹과 액션과 국악 춤사위를 최대치로 뽑아 맛깔나게 버무리고, 여성의 욕망과 연대를 화끈하게 말아준다. 여기에 이영지의 랩을 주제곡으로 곁들이다니, 완전 힙한 맛집 되시겠다.

과부 잔혹사에 숨겨진, 욕망하는 여인

설정 한번 독하다. 조여화(이하늬)는 남편 얼굴도 보지 못한 과부다. ‘신랑 잡아먹은 년’이라는 낙인은 기본이요, 대문 밖도 나갈 수 없다. 종일 사당에 갇혀 슬프지도 않은데 울어야 하고,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의 결정판 ‘내훈’이나 베껴야 한다. 곡기를 끊으라는 강요로 끼니도 줄이고, 15년째 소복만 입는다. 심지어 무덤 옆 여묘살이를 하라거나, 열녀문을 받기 위해 ‘따라 죽으라’는 압박에 시달린다. 드라마는 과부 잔혹사를 가감 없이 폭로한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는 식으로 묘사하진 않는다.

이를테면, 영화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가 그리는 피학적이고 관음적인 정서를 피해 간다. 조여화에게 시집살이를 시키는 여자들을 악마적으로 그리지도 않는다. 가령 시어머니(김미경)는 엄하지만 성가신 존재일 뿐 표독스러운 인물은 아니다. 조여화는 “따라 죽었어야지”라는 시누이의 말조차 흘려듣고는 “아가씨가 말로 나를 죽이네요. 서방님에 대한 그리움으로 여기고 잘 참아보렵니다”라는 혼잣말로 넘긴다. 당상관 부인들의 모임 모란회 부인들끼리의 기싸움도 희화적으로 그린다.그 결과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함정에서 벗어난다.

이는 가부장제에 가장 잘 적응한 듯 보였던 백씨 과부(최유화)와 호조판서 부인 오난경(서이숙)에 대한 반전으로 이어진다. 백씨 과부는 모란회에서 열녀문을 두고 곧잘 조여화와 경쟁 구도에 놓이던 과부였다. 여느 드라마라면 주인공과 대비되는 인물로 가부장제에 충성하거나 희생되는 인물로 그렸을 것이다. 하지만 드라마는 그를 섹슈얼리티의 주체로 그린다. 시어머니에게 발각되어 죽음에 내몰리다 조여화의 도움으로 새 삶을 얻은 그는 오히려 조여화에게 “당신도 당신의 인생을 살라”고 조언한다. 드라마는 조여화의 성적 욕망을 점진적으로 그려왔다. 처음 종사관 박수호(이종원)와 접촉한 뒤 신체가 절단되는 꿈을 꾸던 조여화는 그의 복근을 본 뒤 눈에 ‘왕’(王) 자가 아른거린다. 백씨 과부의 사랑을 목격한 뒤 조여화의 성적 욕망에 어떤 변화가 생길까.

호조판서 부인 오난경 역시 구휼에 나서는 현숙한 부인이자 파락호(재산 몽땅 털어먹는 난봉꾼) 같은 남편의 가정폭력까지 견디는 “살아 있는 내훈”인 줄만 알았다. 하지만 푼돈이나 받아먹는 호조판서도 모르는 진정한 악의 핫라인은 오난경을 경유하고 있었다. 호조판서의 개짓거리가 선을 넘자 부인 오난경의 손에 죽는다.보아라, 당신들이 꿈꾸는 가부장제를 내면화한 여자는 없다!

조여화가 밤마다 복면을 쓰고 ‘전설의 미담’으로 활약할 수 있는 것은 두 조력자 덕분이다. 한명은 연선(박세현)으로 조여화의 이중생활이 가능하도록 집안의 모든 일을 돕는다. 12년 전 조여화가 처음으로 담장을 넘어 집을 나섰을 때, 길에서 맞아 죽어가는 연선을 구해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조여화는 연선에게 글과 돈을 가르쳤다. 연선은 몸종이 아니다. 자유민이고, 심지어 한양에 기와집 두채를 살 수 있을 만큼 부자다. 부의 원천은 그의 노동소득과 화연상단에 투자한 배당금이다. 또 한명은 화연상단 단주 장소운(윤사봉)이다. 그는 조여화가 밖에서 벌이는 모든 일을 수습하고, 사업으로 돈을 불린다. 7년 전 강필직 상단의 공격으로 죽을 뻔한 그를 조여화가 살려주었다. 장소운은 언제든 조여화에게 상단을 넘기겠다고 말한다. 연선과 장소운은 조여화에게 목숨을 빚진 사이로 절대적으로 조여화를 믿고 돕는다.

조여화가 여성을 구하고 돕는 서사는 드라마 전체를 관통한다. 드라마의 첫 장면은 투전판에 간 조여화가 “배곯는 자식들에 매 맞는 마누라, 그것도 모자라 하나뿐인 집문서를 투전판에 가져오다니”라며, 나쁜 가부장을 꾸짖는 일성으로 출발한다. 이후 조여화는 아비의 노름빚 대신 끌려간 꽃님이를 비롯해 강필직 상단의 아동 인신매매 사건에 깊이 관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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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제공

춤·국악·연기 되는 ‘원톱 이하늬’

드라마는 이하늬의 모든 장점을 한쌈에 보여준다. 첫 투전판 장면에 오고무를 추듯 양손으로 악당을 때려잡는 동작을 보라. 국악 전공자이자 코믹 연기에 특화된 이하늬이니까 사는 장면이다. 물을 뿜는 다듬이질은 또 어떤가. 한복이 어울리는 보름달처럼 꽉 찬 동그란 얼굴에 진지하고 조신한 사극 말투에서 갑자기 힘을 확 빼고 익살을 떤다거나, 남장에 콧수염을 붙이고선 능청을 떠는 것도 모두 이하늬 특유의 코믹함이다.

그렇다면 이하늬는 언제부터 코믹·액션·사극을 모두 기막히게 잘하는 배우가 된 걸까. 2017년 사극 ‘역적: 백성을 훔친 도적’에서 장녹수 역할을 맡았을 때가 전환점이었다. 국악 전공자이자 화려한 외모의 장점을 최대한 살리면서, 복잡한 감정을 오가는 표정 연기가 보는 이를 전율하게 했다. 이때부터 이하늬는 여성 원톱 배우로서 가능성을 충분히 인정받았다. 이후 영화 ‘부라더’ ‘극한직업’으로 출발한 코믹 이미지는 드라마 ‘열혈사제’ ‘원더우먼’으로 확고해졌다. 영화 속 코믹 이미지는 ‘정신줄 놓은 것 같은 저세상 텐션’이나, 건강하고 호쾌한 이미지 등 비교적 단순한 것이었다. 이후 드라마를 통해 속물적인 출세욕을 지닌 인물이 점차 변화되거나 다른 인물로 바꿔치기되는 등의 서사를 통해 복잡성과 구체성을 띠게 되었다. 이하늬는 지난해 개봉한 뮤지컬 코미디 영화 ‘킬링 로맨스’와 진지하고 서늘한 여성 액션물 ‘유령’에서 주연을 맡았다. 극과 극을 달리는 완전히 상반된 배역이다. 이제 사극, 액션, 코믹, 진지함, 두 얼굴, 뮤지컬, 국악, 춤 등이 모두 이하늬의 특기 영역이 되었다. ‘밤에 피는 꽃’은 이 모든 특기가 정통으로 맞은 작품이다.

한동안 ‘시대적 배경의 한계 때문에 사극에서 남성 중심 서사는 어쩔 수 없다’는 변명이 있었다. 헛소리다. ‘밤에 피는 꽃’은, 탓할 것은 상상력과 창의력의 한계일 뿐임을 증명한다.‘배트맨’의 여성형이 ‘캣우먼’이 아닌 ‘수절과부 협객’이라니, ‘미스터 션샤인’의 ‘총을 든 아기씨’에 이은 혁명적인 캐릭터다.

황진미│대중문화평론가
‘씨네21’ 영화평론가로 출발하여 티브이 드라마, 예능 등을 두루 평론한다. 인권·역사·여성·장애·인구·성·계급·권력 등 사회과학 전반에 관심이 많다. 원래 전공은 의학·보건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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