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극 가는 비행기에서 읽는 스콧의 ‘남극일기’…무모한 결정이었다
여정의 시작
탐험가 스콧이 남긴 ‘마지막 편지’
지난해 8월엔 해상생존교육 수료
그 직후 걱정 많은 부모님께 ‘통보’
1월27일 출발…이제 산티아고까지
나는 때론 모두 놀랄 정도로 꼼꼼히 계획을 세워 실행하다가도 그만큼 결정적인 실수를 해 허당이라는 말을 듣곤 한다. 그래서 겪은 불운들도 꽤 있는데 멀게는 대학 면접 때 날짜를 착각해 다음날 간 적이 있고 몇년 전에는 일본 교토에서 비행기를 놓친 적도 있다. 그리고 부산으로 교육을 간 그날도 실수를 했다. 교육 장소인 ‘한국해양수산연구원 용당 캠퍼스’라는 안내 중에서 ‘용당’이라는 말을 무심히 넘기고는 본원으로 간 것이다. 너무 일찍 도착할까봐 대중교통까지 알뜰히 챙겨 타고 건물 앞에 내렸을 때에야 나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빌딩 건물에는 어디를 봐도 해상 훈련을 할 만한 수영장이 없어 보였다. 머릿속이 하얘져버린 나는 극지연구소에 전화를 걸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었다. 업무 시작 시간 전인데도 전화를 받아준 그 직원은 “뭘 어떻게 합니까? 얼른 가셔야죠!”라는 말로 당황한 날 일깨웠다. 하기는 그랬다, 가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구명정에 있는 눈금컵
정신이 번쩍 든 나는 택시를 잡아타고 기사에게 현 상황을 설명했고 택시는 녹슨 컨테이너가 쌓여 있는 미스터리한 부두를 달려 교육장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내가 그토록 궁금해한 ‘무슨 일인가로 남극에 가야 하는 사람들’ 30여명이 모여 있었다. 성인을 대상으로 한 교육장이 으레 그렇듯 미미한 열의와 희박한 참여의지, 쉬는 시간에도 깨지지 않는 고요하고 냉랭한 분위기였지만 나만은 그렇지 않았다. 교육장에서 듣는 모든 것이 새롭고 신기했다. 단어 하나를 알게 될 때마다 세계에 대한 어떤 힌트를 듣는 기분이었다. 시앵커(Sea Anchor, 물닻), 냉수대(冷水帶), 헬프(HELP, Heat Escape Lessening Position, 열손실을 줄이기 위해 양 무릎을 모아 껴안는 자세) 동작, 신호 홍염, 퇴선, 3S(Sit, Seat, Silence) 같은 용어에서, 심지어는 신체 무력화, 한랭쇼크, 정신적 혼수 같은 단어들까지. 말 욕심이 많은 나는 그런 생경한 표현들을 먹깨비처럼 먹어치웠다.
오전 시간에는 침몰선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를 ‘머리로’ 배웠다. 먼저 단음 7회, 장음 1회로 약속된 비상신호가 울리면 모두 작업을 멈추고 외부 집합장소로 모인다. 구명조끼는 실내가 아니라 집합장소에서 입어야 하는데, 부력 때문에 도리어 탈출할 수 없는 경우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해상으로 낙하한 뒤에는 얼른 ‘버디 라인’(Buddy Line)을 만들어 버텨야 한다. 구명조끼 끈으로 서로를 묶고 온몸으로 앞뒤 사람을 붙들어 ‘체인’을 형성하는 것이다. 그리고 구명정이 펴지면 무릎을 대고 올라타 ‘구르듯이’ 들어가면 된다.
그렇게 흥미진진해하던 나는 강사가 구명정에서의 식수 공급에 대해 언급하는 순간, 마음이 서늘해졌다. 구명정에는 보트만 달랑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비상물품이 구비되어 있는데 그중 하나가 눈금컵이었다. 눈금컵은 식수를 정확히 분배하는 데 필요했다. 위험이란 사건의 물리적 상황뿐 아니라 인간의 감정적 문제를 함께 발생시킨다는 점이 서늘하게 실감되었다.
“며칠을 구명정에서 버텨야 하는 상황이면 식수 나누는 일은 순번을 돌아가며 맡고 선장은 제외됩니다. 혼자만 살려고 한다는 오해를 살 수 있으니까요.”
바다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선장이 이기적인 마음을 먹는다면 다른 생존자들의 목숨이 위태로워질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지금 듣고 있는 이 많은 비상 매뉴얼이 누군가의 사고들에서 나왔으리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 여름 ‘버디라인’
오후 교육이 시작되기 전, 강사는 여성 훈련자들에게 해상안전교육을 혼성으로 진행해도 괜찮은지를 물었다.교육 특성상 신체접촉이 있을 수밖에 없어서 원한다면 여성만으로 조를 짜주겠다고 했다. 우리는 고작 넷이었다. 어쩌나 싶었는데 다행히 남극에 세번째로 방문하는 연구원이 있었다. 그렇다면 이 교육을 세번째 받는다는 얘기였다. 내 뒷좌석에 앉아 노트북을 골똘히 들여다보던 그에게서 느껴지던 ‘아우라’의 정체를 그제야 알 수 있었다.
“뭐, 그간 별일은 없었는데요.”
우리가 신뢰의 눈길로 그의 고견을 물었을 때 연구원의 답은 군더더기 없이 간단했다. 우리는 성별에 상관없이 훈련을 받기로 했다.
점심식사 후 모두 주황색 훈련복을 입고 수영장에 모였다. 피티(PT)체조를 시작했고 상대를 등에 짊어져가며 합동 훈련에 필요한 정신력을 서로 일깨웠다. 나보다 체격이 큰 20대 청년을 번쩍 들었을 때 ‘아 생각보다 나는 쓸 만한 체력인가?’ 하는 자신감이 잠깐 들었다. 이윽고 강사가 호루라기를 불며 “입수!”라고 외쳤다.
3시간 동안 우리는 물을 먹고 드넓은 수영장을 헤엄치고 헬프 동작과 버디 라인 만들기를 반복했다. 자기도 모르게 어디론가 떠내려가고 있는 훈련생의 뒷덜미를 잡아채주기도 하고, 구명정으로 차례차례 굴러 들어가기도 했다. 내 경우에는 이 구명정 탑승 훈련이 가장 힘들었는데, 끝나고 나니 무릎이 멍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버디 라인을 만들 때는 겨드랑이에 뒷사람 발을 끼우고 내 발은 앞사람 겨드랑이로 넣어 배영 상태로 함께 떠 있어야 했다. 뒷사람 발이 느슨해질 때마다 나는 “떠내려가지 않게 발을 확실히 넣어요!” 하고 소리 질렀다. 누가 나를 잡고 있었는지 누구를 붙들어주기 위해 안간힘을 썼는지 그때도 지금도 기억나지 않지만, 앞뒤 누구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는 점은 분명했다.
그날 훈련은 구명정에서 헬리콥터로 구조되는 가상의 상황으로 끝이 났다. 당연히 헬리콥터는 없었지만 훈련생을 벨트에 묶어 물 밖으로 끄집어내는 기계가 있었다. 완전히 지친 사람들을 모터가 돌며 수영장 밖으로 끌어냈고 우리는 타일 바닥에 퍼질러 앉았다. 그렇게 수영장이 고요해졌을 즈음, 강사가 “웬 도롱뇽이 있네” 하고 작은 것을 물속에서 떠냈다. 인공파도까지 틀며 우리를 괴롭게 하던 때와는 달리 강사는 온화하고 여린 청년의 얼굴이었다.
도롱뇽은 작고 몸체가 연필선처럼 가늘었다. 그 조그마한 걸 어떻게 알아봤을까 싶을 정도로. 훈련생들이 다가와 구경을 했고 이윽고 강사는 밖으로 나가 도롱뇽을 풀어주었다. 가상의 위험에 여러번 빠졌다가 살아남은 우리는 길을 잃은 어린 도롱뇽이 기적처럼 자기 삶으로 돌아가는 실제 과정을 지켜보았다.
☞한겨레S 뉴스레터 구독하기. 검색창에 ‘한겨레 뉴스레터’를 쳐보세요.
☞한겨레신문 정기구독. 검색창에 ‘한겨레 하니누리’를 쳐보세요.
바리바리 꾸러미에 넣은 책 두권
1박2일 교육을 마치고 부산역으로 가는 택시를 탔더니 아빠와 같은 연배의 기사분이셨다. 이 건물에서 대체 뭘 했는지를 물어봐서 남극을 간다고 대화를 나눴다.
“전 아직 부모님께 말씀도 못 드렸어요.”
빗방울이 떨어지더니 이윽고 유리창에는 작은 반구들이 생겨났다.
“왜요? 돈 준다고 갈 수 있는 곳도 아니니 얼마나 자랑스러워하시겠어요, 난 그럴 것 같은데?”
나는 우리 가족도 부산에서 살았고, 아빠는 완전 부산 토박이라고 전했다. 아빠가 실직하지 않았다면 이 도시를 떠날 일도 없었으리라는 말까지는 하지 않았다.
택시 안에서 응원을 받은 나는 일단 부산역 푸드코트에서 치즈 라면을 주문한 뒤 상대적으로 나의 모험심에 호의가 있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디? 남극을 간다고?” 하며 놀라는 엄마의 목소리 뒤로 “안 돼!” 하는 아빠의 외침이 들려왔다.
“정말 애써서 얻은 기회야. 다른 사람들은 부모님이 자랑스러워할 거라던데….”
서운한 나는 가족끼리는 절대 금물인, 타인 비교를 해버렸고 엄마는 이내 포기했다.
“너 너무 그렇게 일에 욕심부리면 안 돼.”
아빠는 일종의 직업윤리까지 내세워 강하게 반대했지만 지금 나는 인천공항을 출발해 칠레로 향하고 있다. 한국시각으로는 1월27일 밤 9시40분이고 튀르키예 상공을 나는 중이다. 파리 샤를 드골 공항에서 내려 4시간쯤 대기한 다음,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로 가는 비행기를 탈 것이다. 그렇게 8월의 여름으로부터 1월의 겨울로 ‘버디 라인’은 이어지는 중이었다.
지금은 아마도 28일, 산티아고로 가는 비행기 안이다. 어느 나라 기준인지는 몰라도 노트북은 오전 일곱시를 가리키고 있다. 14시간을 비행했다가 경유지를 거쳐 다시 14시간을 비행하는 여정은 다시는 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3월에 같은 여정으로 돌아와야 한다. 그래도 그때는 지금과는 다르겠지, 어떻게 다를지는 남극에서의 시간들이 자연스레 만들어줄 것이고.
최종 정리를 하고 나니 캐리어 2개가 겨우 닫힐 정도로 짐이 많았다. 그러고도 배낭과 보스턴백을 주렁주렁 달고 여기까지 왔다.대부분 생필품이다 보니 뺄 것도 없어서 책은 두 권만 넣었다. 출발 전 극지연구소 엘(L) 박사님과 통화했는데, 기지 분들께 뭘 가져가야 할까요, 묻자 “작가님 책 한 권 가져오시면 되죠” 하는 다정한 말을 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세종기지에 도서관이 있다고 해서 내 책을 한 권 놓고 오고 싶었다. 세계의 끝,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지구의 가장 먼 곳, 마치 흰빛처럼 아스라이 존재하는 얼음 땅에 내 책이 있게 되다니. 나는 책장 앞에서 고민하다가 ‘경애의 마음’을 캐리어에 넣었다.
책을 가져갈 수 없는 건 사실 내게 그냥 넘길 일은 아니었다. 작가는 쓰는 데에도 몰두해 있지만 읽는 데에도 만만치 않게 집착적인 사람들이니까. 나는 익숙하지도 않은 이북(전자책)을 태블릿피시에 잔뜩 저장하고 종이책은 하는 수 없이 한 권만 챙겼다. 남극점에 도달했지만 돌아오지는 못한 영국의 탐험가 로버트 팰컨(R. F.) 스콧의 ‘남극 일기’(2005, 세상을 여는 창)였다. 나는 이 책을 비행기에서 읽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왜 그런 무모한 결정을 했을까 반추하고 있다. 책의 첫머리에서부터 스콧이 가족과 친구들에게 남기는 마지막 편지를 읽어야 했기 때문이다. 죽음을 수용하는 고요하고 투명한 정신, 남은 이들에 대한 사랑. 책은 첫 장부터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김금희│소설가
단편집 ‘너무 한낮의 연애’ ‘우리는 페퍼로니에서 왔어’, 장편소설 ‘경애의 마음’ ‘복자에게’, 에세이 ‘사랑 밖의 모든 말들’ ‘식물적 낙관’ 등을 썼다. 작고 단순하고 환해지기 위해 늘 분투 중이다.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 정의의 사도였다가 책임 회피…비겁한 ‘검사 정치인’
- 비실대는 한국 주가, ‘코리아 디스카운트’ 탓이라고?
- 한국 팬들 쓰레기 주웠더니 일 매체 “일본 문화 퍼져”
- “주저없이 초토화” 김정은이 공군 비행장에 온실농원 짓는 이유
- ‘K사슴’ 고라니, 멸종위기종인데 사살하면 포상금?
- “냉동실 12개뿐” 돌아가신 할머니의 만두, 복원했더니
- ‘내 CT사진’ AI가 맘대로 쓴다고?…의료 민감정보 활용, 물꼬 튼다
- 입춘 이름값 하는 포근한 일요일…늦은 오후 전국에 비
- 남극 가는 비행기에서 읽는 스콧의 ‘남극일기’…무모한 결정이었다
- 외교부, 러 대사 초치…“편향” “무지” 한-러 거친 설전,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