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언장을 써야 나 떠난 뒤 자식들이 안 싸워요”[서영아의 100세 카페]
“마무리가 깔끔해야 좋은 인생”
이혼소송보다 더 많아진 상속소송… 83%가 소송가액 1억 원 이하 감정싸움
미국은 56%, 한국은 1%만 유언장 작성… 상속·기부는 유언장 써보는 데서 시작
1000만 노인 시대…법·제도 뒷받침 돼야
지난달 중순 오찬을 청해온 원혜영(73) 웰다잉운동본부 공동대표는 “올해가 초고령사회의 원년이 될 것같다”는 말부터 꺼냈다. 전체 인구에서 고령자가 차지하는 비중이 20%를 넘어서면 초고령사회다.
당초 2026년으로 점쳐지던 한국의 초고령사회 진입 시점은 몇 년 전부터 2025년으로 당겨지더니 이제는 올해 후반이 될 거라는 전망이 나온다. 출산율이 떨어진 만큼 고령화가 더 빨라지는 것이다.
그는 이런 시대를 제대로 된 준비없이 맞는 현실에 대해 무척 안타까워했다. 지난달 26일 정식 인터뷰를 청했다. 100세카페로서는 3년만에 다시 하는 인터뷰다.
1000만 노인시대 원년
그는 2020년 70세를 기점으로 총 7선(국회의원 5선, 부천시장 2선) 경력을 내려놓고 정계은퇴한 뒤 ‘웰다잉 전도사’로 변신했다. 그간 연명의료의향서 작성하기, 장례문화 개선, 유언장 쓰기, 장기기증, 유산기부 등의 운동을 펼쳐왔다. 국회의원 시절인 2016년 무의미한 연명의료를 받지 않을 권리를 보장하는 연명의료결정법을 통과시켰고 2019년에는 존엄하게 죽을 권리를 보장하는 법적 기반 조성을 위한 웰다잉기본법을 대표발의했다. 이 과정에서 은퇴하면 이쪽 일을 하겠다고 마음 먹었다.
―지난 3년 간 성과는 어떠셨는지요.
“조금씩 천천히 진행되고 있어요. 사전연명의료 의향서 서명자는 지난해 10월 200만 명을 넘겨서 어느 정도 정착단계라고 보고, 올해부터는 ‘유언장 써보기’에 힘을 기울이려 합니다. ‘유언장 쓰기’가 아니고 ‘써보기’예요. 완성된 유언장이 아니라 처음 써보는 유언장으로 시작하자는 거죠. 연명의료의향서가 내 생명에 대해 결정권을 행사하는 것이라면 유언장은 재산에 대한 결정권을 찾는 게 됩니다.”
연명의료결정법(속칭 존엄사법)은 그 무렵 일본에서 관련 취재를 하다보니 자신들이 훨씬 오래 전부터 논의만 하고 있던 것을 한국이 앞서서 도입했다고 감탄하는 평가를 들은 일이 있다. 그 주인공이 원대표인 셈이다.
그는 1월 초 웰다잉문화운동이 펴낸 ‘유언장 개론’이란 책을 내밀었다. 상속 전문인 이양원 변호사가 집필했다.
“이게 교과서 역할을 하기를 바랍니다. 올초부터 전문변호사들이 유언 무료상담을 해주는 온라인서비스센터도 개설했어요. 미국인은 성인의 56%가 유언장을 쓰는데 한국은 1%도 되지 않아요. 최근 들어서는 상속분쟁도 급증하고 있죠.”
이혼소송보다 더 많아진 상속분쟁
상속분쟁은 엄청난 부자들에게나 해당되는 얘기일까. 법원행정처에 따르면 최근 10년 사이 상속재판은 늘고 이혼재판은 줄어드는 추세다(표 참조). 상속재판에서 83%는 소송물 가액이 1억 원 이하다. 돈보다 감정싸움이 더 크다는 얘기다. 재판과정에서는 부모의 편애, 성장과정에서의 불평등, 독박간병의 억울함 등 평소 묻어둔 한이 다 쏟아져나온다. 결국 가족은 다시는 안 보는 사이가 되고 만다.
이혼과 재혼, 독신 등 날로 복잡해지는 가족의 형태도 본인이 교통정리 해놓지 않으면 갈등요소가 된다. 여기 더해 미리 유산을 배분하는 과정에서 일부를 사회에 기부하는 것도 보람있는 일. 평소 관심 있었던 분야에 10%건 1%건 기부한다면 자신의 삶이 더욱 의미 있는 것이 될 수 있다.
“최근 뉴스만 봐도 상속분쟁에 빠진 LG는 유언장이 아예 없고 순복음교회의 경우 유언장의 실효성이 다퉈졌죠. 어머니가 셋째아들에게 유산을 몰아줬는데 유언장 작성 당시 법적 능력이 없는 상태였다는 게 장남과 차남의 주장이었어요. 판결은 유언 당시 법적인 효력을 인정하는 쪽으로 났더군요. 두 경우 모두 제대로 된 유언장을 준비했더라면 갈등을 훨씬 줄였을 텐데, 그걸 못한 거죠.”
친구의 황망한 죽음, 유족의 비통…“유언장 썼더라면”
유언장 쓰기의 근본적 의미는 더욱 깊이가 있다.
“유언장을 쓰는 건 사랑하는 가족과 벗들과의 아름다운 이별을 준비하는 일이예요. 지난해 제 친구가 복통으로 입원한 지 이틀 만에 세상을 떠났어요. 빈소에서 부인이 ‘말 한마디 못하고 보냈다’고 애통해하는데 이 친구가 유언장을 썼다면 어땠을까 싶더군요. 유언장에 아내에 대한 고마움과 사랑이 표현돼 있었다면 부인에게 얼마나 위로가 됐을까….”
―내가 세상에 무엇을 남길까를 생각하다보면 오늘을 의미있게 살기 위해 자세를 다잡게 될 것같습니다.
“내 마지막 모습을 내가 결정해둔다는 의미도 있지요. 가령 수의 대신 평상복을 입겠다거나 작은 장례식을 하고 싶다면 미리 결정해둬야 해요. 자식들 입장에서는 체면도 따져야 하고 효도 의식도 있으니 차마 그런 결정을 할 수 없거든요.”
―연명의료를 거부하거나 장기기증 서약을 했지만 막상 상황이 닥쳤을 때 가족이 반대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니 가족에게 자신의 뜻을 시간을 들여 알려두는 게 중요하죠. 마음의 준비가 되게끔 말이죠. 그게 좋은 마무리지요.”
“난 복받은 인생…돈에 무관심했던 건 후회”
―본인의 유언장은 쓰셨나요.
“몇년 전부터 썼습니다. 다만 저는 재산이 워낙 없어요. 살고 있는 집, 국민연금, 약간의 저금이 전부라, 집을 두 아들에게 나눠주는 정도지요. 사람들은 제가 풀무원 창업자니까 뭔가 있을 거라고 오해하는데 정치 입문할 때 공동창업자에게 다 넘기고 상표권만 갖고 있다가 그것도 나중에 장학재단으로 넘겨받았어요.” 이렇게 설립된 부천교육문화재단은 1996년 설립된 뒤 28년째 수천명에게 장학금을 주고 있다.
“은퇴하고 보니 돈에 너무 무관심했던 게 좀 후회됩니다. 국민연금에 약간의 저축을 더해 월 200만 원 전후면 살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만약의 사태는 염두에 없었어요. 예컨대 저나 아내가 중병이 걸려 종일 간병이 필요하다면? 내가 노후 돈 문제에 너무 신경을 안 썼구나 반성이 들더군요.”
그는 1951년 자신이 태어난 집에서 지금도 산다. 그린벨트로 묶인 덕에 우물과 연못, 수백 평 마당을 가진 호사를 누리지만, 집을 팔 수가 없다. 고시지가로는 서울 변두리의 전세값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정계은퇴 뒤 실업자 겸 자원봉사자가 되신 건가요.
“70세까지 일했으니 복받은 인생이죠. 친구들이 60세 전후해서 모두 퇴직했는데 그동안 이 친구들과 어울려 지내면서도 얼마나 외롭고 심심하고 답답했을지 미처 몰랐어요. 제가 은퇴하고 보니 아차하는 거죠. 같이 놀아주고 밥도 먹고 여행도 다니고 해야 했는데 그걸 생각 못했네…라고. 사람은 다 자기가 겪어봐야 아는 거예요.”
여권 중진 시절, 청와대에서 담당 찾다 포기
“1000만 노인 시대인데, 그 분들이 활기없이 시간만 죽이고 있다는 느낌이예요. 1000만 노인은 한번도 겪어보지 못한 일이라, ‘신인류’라고도 하죠. 은퇴 뒤에도 30년을 더 살아내야 하는 이 분들이 보람있게, 품위있게 인생을 마무리할 수 있도록 돕는 게 중요한데, 최고 정책결정기구에서 일하는 분들이 그런 개념이 없으니 안타깝습니다.”
이를 위해 발의했던 웰다잉 기본법은 21대 국회에서도 통과되기 어려워보인다.
그는 문재인 정부 때 시민사회수석 사회정책수석 정책실장 등 담당자(가 될 만한 후보들)를 찾아다녔다고 한다.
“이 새로운 현상이 워낙 중요하고 빨리 진행되고 있으니 관심을 갖고 어디서 어떻게 다룰 것인지부터 논의해야 한다고 말하고 다니다가 포기했어요. 다들 ‘내 담당이 아닌 것같다’고 하더군요. 당시 여권 중진이던 제가 그런 상황이었으니 오죽했겠어요. 위에서 관심 없다면 공무원들은 절대 움직이지 않아요.”
―정부로서는 아무래도 재정부담을 의식하지 않을까요.
“고령자 관련해서는 기초연금부터 의료비 지원, 간병지원에 일자리지원까지 천문학적 돈이 필요한 일이 많지요. 유일하게 재정이 들지 않는 분야가 웰다잉이예요. 오히려 비용을 줄이는 효과가 있지요. 고령자들이 연명의료를 하지 않으면 의료비가 줄고 작은 장례식은 가계에 보탬이 되죠. 고령자들이 기부를 많이 하면 사회의 취약한 곳에 유산이 돌아가니 도움이 되고요. 지금의 고령자 세대는 한반도에서 처음으로 오랜 빈곤의 대물림에서 벗어나 자신이 땀흘려 모은 깨끗한 돈을 후대에 물려주는 세대라고 봐요.”
1000만 노인 품격 지키고 사회적 낭비 갈등 줄여야
―좀더 구체적인 아이디어가 있을까요.
“이제라도 관심을 가지고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한 틀을 마련해야 합니다. 가장 가까워보이는 게 저출산고령화위원회인데, 저출산과 고령화는 내용상 떼어내야 합니다. 어떻게 인구를 늘릴 것이냐와 현재 존재하는 1000만 노인을 어떻게 건강하고 책임있고 당당한 시민으로 살도록 도와줄 거냐는 차원이 다른 얘기죠. 법으로서는 일단 ‘웰다잉기본법’이 통과되고 시스템은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에서, 행정은 보건복지부가 주무가 돼 좀더 통합적인 체계를 만들어야 합니다.”
―취재를 하다보면 고령자문제를 다루려는 노력들이 여기저기 있긴 한데 전체를 아우르는 머리 부분이 없고 단편적인 대응만 있더군요.
“법이 만들어진 것만 따로따로 이뤄지는 현실이죠. 일례로 장례문화를 개선한다며 보건복지부가 만든 장례문화진흥원도 있고 연명의료결정법에 따라 만들어진 국가생명윤리위원회 안에 사전연명의료 관리기관이 있어요. 두 기관은 유사한 일을 하지만 따로 놀아요. 장례에 대한 것, 연명의료, 장기기증, 유언장 쓰기, 후견제도 이런 것들을 통합적으로 하면 시너지도 생기고 낭비도 막을 수 있을 텐데 말이죠.”
―다시 유언장으로 돌아와서, 언제 쓰는 걸 권합니까.
“정해진 때는 없지만 정년퇴직할 때 혹은 65세 법적인 고령자가 됐을 때를 계기로 하는 건 어떨지요.”
친척 친지들과 만나고 시간 여유도 갖는 명절이 다가온다. 잠시 몸과 마음의 짬을 내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나는 세상과 가족에게 무엇을 남길지 생각해보는 건 어떨까.
유언의 방식 5가지 |
―‘유언장개론’에서 유언은 법에 의한 방식으로해야 효력을 갖는다. 우리 상속법에는 유언의 방식으로 5가지를 정해놓았다. 1) 자필증서에 의한 유언 : 유언자가 그 전문과 연월일, 주소, 성명을 자서하고 날인해야 한다(작성이 쉽고 비밀유지에 용이하나 위조나 분실, 상속인들이 그 존재를 모르게 될 가능성이 있다) 2) 녹음에 의한 유언 : 유언자가 유언의 취지, 성명과 연월일을 구술하고 증인이 유언의 정확함과 자신의 성명을 구술해야 한다(필기가 어려울 경우 적합. 위 변조 우려) 3) 공정증서에 의한 유언 유언자가 증인 2명이 참여한 공증인의 면전에서 유언의 취지를 말하고 공증인이 이를 필기낭독하여 유언자와 증인이 그 정확함을 승인한 뒤 각자 서명 또는 기명날인(가장 안전하고 정확하지만 비용이 든다. 1억 원에 15만 원 정도) 4) 비밀증서에 의한 유언 유언자가 필자의 성명을 적은 증서를 엄봉날인하고 이를 2명 이상의 증인에게 제출해 자신의 유언서임을 표시한 뒤 그 봉서 표면에 제출연월일을 기재하고 유언자와 증인이 각자 서명 또는 기명날인. 표면에 기재된 날로부터 5일 내에 공증인 또는 법원서기에게 제출해 봉인 확정일자인을 받는다(절차 복잡하고 유언의 존재가 노출된다) 5) 구수증서에 의한 유언 질병 기타 급박한 사유로 인해 위 4가지 방식을 따를 수 없을 경우 유언자가 2명 이상 증인 중 1명에게 유언 취지를 구술하고 이를 들은 자가 필기낭독하여 유언자의 증인이 그 정확함을 승인한 뒤 각자 서명 또는 기명날인, 7일내 검인신청(실효성 많지 않다) |
서영아 기자 sy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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