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토링] 이순신도 그때 가짜뉴스에 당했다
잔인했던 갑오년의 봄
순신에게 위기감 느낀
조선의 무능한 리더들
순신 시기질투한 조정
순신 겨냥한 토끼몰이
구국에만 집중한 순신
전쟁터에서 분투를 거듭하던 이순신을 괴롭히는 건 왜적만이 아니었다. 조선 조정에서 만들어낸 '유언비어'도 순신을 벼랑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예를 들면 이런 거였다. "이순신이 연해의 해왕海王 노릇을 한다." 그 중심엔 순신에게 질투를 느낀 서인이란 일종의 카르텔과 귀가 얇은 왕이 있었다. '가짜뉴스'가 기승을 부리고 있는 요금 정치판이나 그때나 다를 게 없었던 모양이다.
한산도 진중에 전염병이 유행해 순신까지도 병으로 신음하고 있던 1594년 4월 9일. 진중에서 무과 별시를 시행하고 합격자를 알리는 방을 붙이고 있는데, 비가 엄청나게 내렸다. 이때 이순신의 핵심 참모였던 조방장 어영담이 '진중에서 병으로 세상을 떴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아, 슬프다. 그 슬픔을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으랴!" 바로 1개월 전 당항포에서 왜적 함선을 쓸어버리는 최전선에 나섰던 어영담이 아니던가.
임진왜란 초기에 적극적으로 출전하기를 주장하던 장수는 정운, 어영담, 송희립, 이운룡, 이영남 등 몇몇 사람뿐이었다. 이 때문에 이순신은 어영담이 광양현감에서 파직됐을 때 파직을 멈춰달라는 장계를 올려 그를 구원하고 옆에 두고 있었다. 장수로서의 지략과 기량을 인정해 '절충장군'이란 칭호를 붙여줬고, 함께 왜적을 물리치는 데 신명을 다했다.
갑오년 봄이 이순신에게 잔인한 계절이었던 것은 전염병 말고도 또 다른 요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를 시기하는 세력들이었다. 그들은 요즘 말로 이른바 '가짜 뉴스'를 만들어 유포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게 "이순신이 6만의 정예 병력과 1000척 병선, 100만명의 유민을 안고 삼도 연해의 해왕海王 노릇을 한다"는 유언비어였다. 이같은 가짜 뉴스의 꼭대기에는 윤두수, 원균 등의 '혈맥 카르텔'과 서인 인맥이 있었다. 서인이었던 좌의정 윤두수는 선조와 사돈지간이었다. 원균은 그런 윤두수와 사돈 관계였다. 그들의 가스라이팅 대상은 선조였다. 여기에 권율, 김응서의 무리까지도 유언비어에 현혹돼 가고 있었다.
가까스로 견뎌낸 이순신이건만, 새로운 고난은 물밑에서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통찰·열정·소통의 리더십을 발휘하며 해전에서 연전연승,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해내고 있었던 터라 이순신은 백성들로부터 환호의 대상이었다. 조선의 무능한 리더들은 그에게 질투와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 질투와 위기감을 이용한 가스라이팅은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 무렵, 순신이 장문포에서 왜적 소탕에 큰 공을 세우자 곤양군수 이광악이 한산도에 찾아와 전승축하를 한 적이 있었다. 이광악은 진주성에서 김시민과 함께 왜적을 막은 장수였다. 이때 그는 자신이 구해 온 '송운문답松雲問答'을 순신에게 올렸다. 의승장 '사명당'이 적장 가등청정과 왕래하면서 묻고 답한 기록이었다. 송운은 사명당 임유정의 호다.
기록에 따르면, 1594년 4월쯤 사명당은 명나라 제독 유정과 도원수 권율의 요청을 받고 울산 서생포에 주둔하고 있던 가등청정과 3차례 접촉을 시도했다. 첫번째는 거절을 당했고, 두번째는 부하 가등희팔加藤喜八이란 장수만 만나고 왔다. 세번째에 가등청정을 만날 수 있었다.
이때 가등청정은 조선의 내정을 자꾸 물었다. 그러자 사명당은 "장군의 당당한 자격으로 풍신수길의 부하 노릇을 하지 말고 풍신수길을 어떻게든지 조처한 뒤 관백이 되시오"라고 동문서답을 했다. 가등청정은 사명당의 말을 귓등으로 흘려버리며 "귀국의 보물은 무엇인가"라고 물었다.
사명당은 이렇게 답했다. "장군의 머리가 보물이요. 당신의 머리를 바치는 인물에겐 천금의 상과 만호의 봉이 있으니 어찌 보물이 아니겠소." 가등청정은 웃으며 "명의 장수 유정이 어찌하여 전라도로 진을 옮긴 것이오"라며 파고들었다. 사명당은 "권율이 성주로 오니까 유정이 호남으로 이진했다"며 약간의 정보를 흘렸다. 적의 가등청정과 소서행장을 이간질하기 위한 밑밥이긴 했다.
하지만 이같은 시도는 전혀 먹혀들지 않았다. 소서행장과 김응서 간에도 왕래문답이 있었다. 권율이 사명당을 시켜 가등청정과 교섭하는 동안 김응서와 소서행장이 왕래하기도 했다. 이순신은 이같은 내용에 "통분함을 참을 수 없다"며 「난중일기」에 기록했다.
조선의 육군 장수들과 왜적의 장수들의 접촉이 이어지고 유행병도 수그러들면서 한산도의 여름은 겉으로는 비교적 평온했다. 유행병에서 벗어난 순신도 행정업무와 활쏘기에 나서는 날이 많아졌다. 군량 확보와 군사 훈련, 판옥선 건조에 힘써 7월에는 순무어사에게 전쟁 연습 시범을 보여주기도 했다. 또 한산도 진영을 방문한 명나라 장수 장홍유를 맞아 극진한 대접을 하면서 정세의 상황과 정보를 공유했다.
8월 21일. 맑은 날이었다. 한산도의 순신은 이날 마침 외가의 제삿날이라 공무를 보지는 않았다. 대신 곤양군수. 사도 첨사, 마량 첨사, 남도 만호, 영등포 만호, 회령포 만도, 소비포 권관 등 여러 지휘관과 소통하고 있었다.
이때 한양의 궁궐에서는 선조와 류성룡이 이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선조가 먼저 입을 열어 "이순신이 혹시 일을 게으르게 하는 것이 아닌가?" 류성룡이 아뢰었다. "만약 이순신이 아니었다면 이만큼 되기도 어려웠을 것입니다. 육지와 바다의 모든 장수 중에 이순신만큼 우수한 인물은 없습니다." 선조가 질문을 던진 이유는 뭘까? 이미 이순신을 저버릴 마음을 품고 간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9월 3일, 비 내리는 새벽. 순신은 "수군과 육군의 여러 장수가 팔장만 끼고 서로 바라볼 뿐 계책을 세워서 적을 치는 일이 없다"는 선조의 비밀문서를 받고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순신은 그를 겨냥한 삿된 무리들의 물밑 움직임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오로지 왜적을 물리치고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는 데 온 정신이 팔려 있었기 때문이다.
"3년 동안 바다에 있으면서 절대로 그런 적(선조의 지적)이 없다. 여러 장수들과 맹세하고 죽음으로 원수를 갚을 뜻을 결심하고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지만, 왜적이 험한 소굴에 웅크리고 있으니 경솔하게 나아가 칠 수는 없다. 하물며 나를 알고 적을 알아야만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고 하지 않았던가.… 나랏일이 어지럽건만 구제할 방법이 없으니 이를 어찌한단 말인가." 순신은 자신의 심경을 이렇게 기록했다.
이때 전시의 특별장관격인 도체찰사에 좌의정 윤두수가 새로 임명됐다. 그는 곧바로 선조에게 거제도의 장문포 왜성을 선제공격을 하자고 건의했다. 선조는 류성룡의 강력한 반대에도 윤두수의 손을 들어줬다. 결국 도원수 권율, 전라병사 선거이, 조방장 곽재우, 형조좌랑 김덕령 등 여러 장수들에게 거제도의 왜적을 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다음호에 계속>
이남석 더스쿠프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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