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대륙의 기상’… 러시아 시계 [김범수의 소비만상]

김범수 2024. 2. 3.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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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러시아에서는(Meanwhile in Russia)…’

서구권에서는 이 같은 ‘밈(Meme·유행어)’이 있다. 워낙 땅 덩어리가 넓고, 서구권과 다른 문화를 가지고 있는 러시아의 ‘기상천외(奇想天外)’함을 뜻한다. 

요즘 유행어로 풀이하면 ‘대륙의 기상’이라는 말과 가깝다. 대륙의 기상이라는 유행어는 우리나라에서 중국의 특이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문화나 물건, 사람 등을 희화화 하는 말이다. 동양권에서의 대륙의 기상이라고 하면 중국을 보통 말하지만, 서구권에서는 러시아를 일컫는 경우가 많다.

시계도 그 나라의 모습을 닮았다. 독일 시계가 ‘바우하우스’ 미학을 대표로 실용성을 강조하고, 스위스 시계가 기술력을 상징한다면 러시아 시계는 말 그대로 ‘대륙의 기상(?)’을 보여준다. 

한때 중국 시계도 대륙의 기상이었다가 최근에는 훌륭한 가성비를 뜻하는 ‘대륙의 기적’에 가까워지고 있지만, 여전히 러시아 시계는 구 소비에트 연방 시절의 기백을 닮았다. 

◆러시아 시계의 역사와 대표적인 브랜드

오늘날 잘 알려진 러시아 시계 브랜드는 ‘보스톡(Vostok)’, 최초의 우주시계로 유명한 ‘스투르만스키(Sturmanskie)’, ‘라케타(Raketa)’, ‘뽈룟(Poljot)’, ‘콘스탄틴 샤이킨(Konstantin Chaykin)’ 등이 있다. 

이 중 2000년대에 역사가 시작된 콘스탄틴 샤이킨을 제외한 나머지 브랜드는 소련 시절 모스크바의 이름 없는 국영 시계 공장에서 시작됐다. 당시 소련은 모든 생산시설을 국유화해서 군대나 시민들에게 보급하는 형태였다보니, 시계 제조사나 모델 이름은 필요가 없었다.

러시아 시계는 가장 손목시계가 필요했던 군인들을 중심으로 빠르게 퍼지기 시작했다. 군인들은 손목시계를 통해 정확한 작전 시간이나 경계 시간 등을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러시아 시계는 철저히 국가 주도하에 시작된 점이 특징이다.

하지만 소련 시계의 기술력은 스위스는 커녕 2차 세계대전 당시 최대 적대국인 독일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조악했다. 전쟁 당시 소련 군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노획품 1호는 독일 군인이 차고 있던 손목시계였을 정도였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소련의 지도자였던 스탈린이 사망하면서 소련은 시계를 포함한 생산시설을 일정 부분 개방해 서구권과 비슷하게 브랜드화 하면서 경쟁력 재고에 나섰다. 이름 없는 소련의 시계 공장도 보스톡, 라케타 등의 브랜드로 거듭나게 됐다.

모스크바에 위치한 러시아 최초의 시계 공장으로 알려진 사진.
다만 소련 시계는 서구권과 달리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아닌 사회주의 경제 체제 하에 생산됐기 때문에 다른 나라 시계에 비해 상당히 독특한 방향으로 전개됐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여서 회사는 소비자의 불만이나 요청 사항을 즉각 반응해 제품을 개선한다. 하지만 사회주의 하 소련 시계는 소비자 중심이 아닌 생산자 ‘내키는 대로’ 제품을 찍어냈다. 보편적이지 않은 취향으로 시계를 만들어도 어차피 국가가 사서 보급해주기 때문이다. 

덕분에 소련 시계는 매우 독특하고 다양한 디자인의 시계가 생산됐다. 게다가 시계의 엔진에 해당하는 무브먼트(Movement) 역시 서구권에 공급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조악하지만 독자적인 ‘인 하우스’(자체제작) 무브먼트로 발전하게 된다.

◆러시아 시계의 상징 ‘보스톡’(Vostok)

다양한 보스톡 시계 모습. 왼쪽 상단부터 시계방향 순서로 암피비아, 코만디르스키예, 월드타이머, 클래식 모델.
소련 시계에서 이어져 온 러시아 시계의 대표적인 브랜드는 보스톡이 있다. 이름의 유래는 인류가 처음으로 우주로 나간 프로젝트인 ‘보스톡 계획’에서 따왔다. 보스톡 시계는 오늘날에도 100달러 전후로 구입 가능하다. 심지어 기계식 시계인데도 말이다. 이 같은 ‘인민의 정신(?)’이 깃든 보스톡 시계는 1965년 소련군의 표준 지급품 손목시계 메이커로 선정되기도 했다.

기자 역시 보스톡 시계를 라인별로 3점 가지고 있다. 대표적인 라인은 탱크 그림이 그려진게 특징인 ‘코만디르스키예’(Komandirskie) 모델, 잠수부가 그려져 있는 다이버 라인 ‘암피비아’(Amphibia), 주로 정장에 착용하는 ‘클래식’ 라인이다. 

마감이나 성능은 훌륭하다고 볼 순 없다. 특히 암피비아 모델에 주로 사용되는 날짜창 표시 기능은 따로 조정할 수 없다. 쉽게 말하자면 분침 시계바늘을 24바퀴 돌려서 날짜창을 조정해야한다는 의미다. 한 번 착용하려면 정말 매우 심각하게 번거롭다. 

소장 중인 보스톡 암피비아(왼쪽), 코만디르스키예(가운데), 클래식 모델. 그 중 암피비아는 베젤(테두리) 부분을 직접 커스텀했다.
그럼에도 보스톡 암피비아 모델이 주는 독특한 하늘색과 러시아의 투박한 디자인은 어딘지 모르게 매력이 있어 전 세계 시계 애호가 사이에서 컬트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보스톡 암피비아 시계를 다양하게 개조해 자랑하는 동호회도 있을 정도다. 기자 역시 한창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에서 보스톡 시계 부품을 따로 구입해 개조했다. 

보스톡 시계는 주요 라인인 암피비아, 코만디르스키예, 클래식에서도 다양한 색상과 디자인의 수 많은 모델이 있다. 다만 현대 시계 대부분이 스테인리스 강으로 만들어져 부식과 마모에 강하지만, 보스톡 시계는 아직까지 100년전과 비슷하게 황동으로 만든 다음 도금을 하는 형태다. 쓰다보면 도금이 벗겨져 노란색의 황동이 드러나는 경우도 많다. 좋게 말하면 레트로 감성이지만, 나쁘게 말하면 시대에 조금 뒤떨어져 있다.

◆대륙의 기상천외…‘라케타’(Raketa)

라케타의 소나 카샬롯 모델. 핵잠수함에 쓰였던 티타늄을 재활용 한 비범한 시계다.
또 다른 러시아의 대표적인 시계 브랜드인 라케타가 있다. 라케타 시계는 러시아 제국 표트르 대제 시절인 1721년에 창립됐다고 알려졌는데, 사실상 보스톡 시계와 마찬가지로 1961년 모스크바의 한 시계 공장에서 독립한 브랜드로 보는게 통설이다.

라케다 시계는 말 그대로 러시아의 ‘기상천외’함을 제대로 보여준다. 보스톡 시계가 20세기 모델과 디자인을 그대로 사용해 어딘지 모르게 유행에 뒤떨어져 있다면, 라케타 시계는 오늘날에도 ‘똘끼’있고 ‘대륙(?)’스러운 디자인들을 선보인다.

최근 출시한 라케타의 ‘소나(Sonar)’ 모델은 방수 기능이 탑재된 다이버 시계인데 모티브가 무려 핵잠수함이다. 게다가 이 모델의 한정판인 ‘소나 카샬롯’(Kashalot·향유고래)은 1986년에 건조돼 지금은 해체한 아쿨라급(Akula Class) 핵잠수함 카샬롯에 실제로 쓰였던 티타늄으로 제작됐다. 실제 핵잠수함에 쓰였던 재료를 재활용해 시계로 만든 라케타의 기상천외함은 말 그대로 대륙의 기상을 제대로 보여준다.

라케타의 다양한 시계. 바늘 형태의 핸즈가 아닌 원형 형태의 핸즈가 라케타의 시그니처라고 볼 수 있다.
이 밖에 라케타 시계는 일반적으로 바늘 형태의 시침과 분침 등을 거부한 원형의 핸즈를 사용하거나, 스위스 시계 산업에선 최소 1000만원 이상의 고급 기능인 ‘퍼페츄얼 캘린더‘(달력 표시) 기능을 150유로도 하지 않은 시계에 때려 넣기도 한다. 라케타의 퍼페츄얼 캘린더 시계는 구 소련 때 제작돼 단종됐지만, 시계 애호가들 사이에서는 아직도 활발히 거래하는 등 인기를 이어가고 있다. 또한 시계에서 흑백과 소련의 상징색인 붉은색 이외의 색상은 최대한 자제한 것도 독특한 매력을 자랑한다. 
퍼페츄얼 캘린더 기능을 인민의 정신으로 때려넣은 시계(왼쪽)와 흑백과 붉은색 배색으로 디자인한 시계들.
라케타 시계는 보스톡 시계와 달리 어느정도 현대화에 성공한 편이다. 부품이나 제조방식 역시 구 소련 시절의 조악함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간 모습이다. 덕분에 가격 역시 제대로 자본주의를 맞아버렸다. 소련 시절에는 가격이 보스톡 시계와 큰 차이 나지 않았는데, 지금의 라케타 시계는 보스톡보다 10배 가까이 비싸다.

김범수 기자 swa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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