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샘 관전기<하>] '그래, 너희 팀에 손흥민 있어?'...고맙다 '쏘니'!
3일 2023 아시안컵 8강전 한국, 호주와 연장 혈투 2-1 역전승
9년 전 패배 설욕...손흥민 PK 얻고 FK 역전 결승골 '감동 120분'
▶<상>편에서 계속
[더팩트 | 박순규 기자] 패배의 위기에서 가까스로 벗어나기는 했지만 걱정도 앞섰다. 과연 2015년 호주 대회 결승전에서 흘린 눈물을 이번에는 되갚아 줄 수 있을까? 9년 전에도 한국은 안제 포스테코글루 감독이 이끄는 호주와 결승전에서 후반 추가시간 손흥민의 1-1 동점골에도 불구하고 연장전에서 어이 없이 실점하면서 1-2로 분패, 정상에 오르지 못했었다.
토트넘 사령탑인 포스테코글루 감독은 이 대회를 통해 손흥민의 가치를 인정하고 이번 시즌 '캡틴'을 맡기며 성공신화를 이끌어가고 있으니 포스테코글루 감독의 안목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하여튼 연장 30분이 걱정이었다. 연장만 버티면 '빛현우' 골키퍼 조현우가 승부차기에서 또 한 번 선방쇼를 펼쳐 4강에 오를 수 있을 텐데, 체력을 다 소진한 한국 선수들이 과연 연장을 잘 버틸 수 있을까? 도저히 타는 속을 주체하지 못해 냉장고의 찬 맥주를 꺼내 속을 달랬다.
사실 이번 경기는 이틀 쉰 한국과 나흘 휴식을 취한 호주와 대결이어서 한국의 체력 소모가 가장 큰 약점으로 꼽혔었다. 더구나 호주의 아놀드 감독은 후반 5명의 선수를 싱싱한 체력의 선수들로 교체하며 한국 선수들의 움직임을 더 철저히 봉쇄하도록 했다. 그러게 왜 클린스만은 16강 진출이 확정된 조별리그 3차전에서 말레이시아를 상대로 주전들을 다 동원해 총력전을 펼쳤을까? 실속 없는 3차전 승리보다 주전들의 휴식이 훨씬 더 토너먼트를 위해 좋은 선택이었을 텐데. 다시 한번 그때의 아쉬움이 더 크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런데 또 잊고 있었다. 우리에게 '캡틴' 손흥민이 있음을. 토트넘 팬들이 그렇게 외치는 '나이스 원 쏘니!'가 있음을, 포스테코글루 감독이 그렇게 신임하는 'SON'이 있음을. '그래 너희 팀 잘한다고 해. 그럼 너희 팀에 손흥민 있어?' 연장 전반 14분(104분). 손흥민의 환상적인 프리킥 역전골이 터졌다. 일명 '손흥민존'으로 불리는 페널티 박스 왼쪽 모서리 부근에서 황희찬이 얻어낸 프리킥을 손흥민이 강한 오른발로 호주의 왼쪽 골문을 면돗날처럼 날카롭게 찢었다.
손흥민은 이 킥을 두고 이강인과 잠시 논의를 거치더니 직접 키커로 나서 호주의 장신 수비벽을 뚫고 골키퍼가 비워놓은 왼쪽 골문을 정확히 꿰뚫었다. 아무래도 위치가 왼발의 '크리에이터 마스터' 이강인보다 두 발을 다 잘 쓰는 손흥민이 좀 더 유리했다. 호주의 골키퍼 매튜 라이언은 2m의 장신 수비수 해리 수타를 비롯한 장신 수비수들로 벽을 만들어 오른쪽(키커 기준 왼쪽)을 지키게 하고 자신은 왼쪽으로 치우쳐 수비를 했으나 손흥민의 킥은 그 조그만 틈을 비집고 왼쪽 골망을 시원하게 흔들었다.
올 시즌 토트넘의 주장을 맡으며 미친 폼을 자랑하는 손흥민이 왜 아시아 선수로는 유일하게 EPL 득점왕(2021~2022시즌)을 차지했고 이번 시즌 득점 4위(12골)를 달리고 있는지를 증명한 골이었다. 또한 막내급으로 참여한 2015년 대회 호주와 결승전에서 당한 1-2 패배를 9년 만에 그대로 갚아주는 '리벤지 골'이었다. 손흥민은 마치 지구에 중력이 없다면 달나라까지 갈 정도의 높이로 점프를 하며 감격을 나타냈다. 테크니컬 에어리어의 클린스만 감독도 손흥민을 보며 덩달아 뛰며 좋아했다.
이제 승부차기까지 가지 않았도 승리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된 것이다. 다시 또 기사를 속보로 내보냈다. 밤을 새며 연달아 기사를 쓰면서도 피곤한 줄을 몰랐다. 오히혀 엔도르핀이 샘솟고 아드레날린이 마구 분비됐다. 맥주 대신 커피를 마셨다. 왜 그리 주의를 해도 오타는 계속 나오는지, 앞서가는 마음을 느린 손가락이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좀 더 정신을 차려야 한다. 마른 행주를 짜내는 듯한 선수들의 투지와 열정을 생각하면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다.
한국은 벌써 이번 대회 4번째 90분 이후 골을 얻었다. '반전 드라마'를 넘어 '호러 무비'에 가깝다. 중동의 침대축구를 원천 봉쇄하기 위해 정규시간에 지연된 시간 만큼 철저하게 추가시간을 주는 대회 운영 방식 때문에 90분 이후 골이 더 많이 나오고 있다. 한국은 바레인전(상대 자책골)에 이어 말레이시아전, 사우디 아라비아와 16강전, 호주와 8강전 모두 90분 이후 나온 골로 64년 만의 아시아 정상 탈환 여정을 이어가고 있다.
아놀드 감독의 악수는 한국의 역전승을 굳히게 했다. 손흥민의 역전골이 나온 지 5분 만에 호주 수비수 에이든 오닐이 황희찬에게 살인적 태클을 하다 주심에게 걸려 퇴장을 당했다. 황희찬을 나뒹굴게 한 오닐의 태클은 처음에는 옐로카드를 받았으나 VAR 판독 후 그 정도가 심해 레드카드로 수정됐다. 오닐은 바로 한국 선수들을 체력적으로 누르기 위해 후반 25분 교체 투입된 선수였다.
결과적으로 아놀드의 선수교체는 전반전의 흐름을 이어가지 못하는 악수로 작용했다. 비교적 선수교체에는 탁월한 '촉'을 발휘하는 클린스만 감독과 대조를 보이는 부분이다. 클린스만 감독은 아니다 싶으면 과감하게 선수 교체를 하는데, 이게 또 상당히 약발을 잘 받는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선수를 잘 쓰면 좋을 텐데 그건 또 아니니 참 미스터리다.
역전을 당한 상황에서 선수까지 한 명이 부족한 호주는 열세를 극복하지 못한 채 더는 추가골을 넣지 못하고 아시안컵에서 쓸쓸히 퇴장했다. 한국이 마치 9년 전 결승 무대에서 패하고 아쉬움에 눈물을 흘렸던 것처럼 호주 선수들도 다 잡았던 승리를 놓친 상실감에 한동안 그라운드를 떠나지 못했다.
경기 후 클린스만 감독은 인터뷰에서 "또 한 번의 드라마가 쓰여진 거 같다. 너무 힘든 전투였고 또 한 번의 120분 혈투여서 힘들었지만 선수들이 자랑스럽다. 0-1로 뒤진 상태에서 우리 선수들의 경기력이 좋아져서 처음부터 이런 경기력이 나오면 어떨까 생각했다"면서 "우승 트로피를 가져가기 위해서는 한 가지 방법밖에 없다. 앞만 보고 달리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또 "감독으로 선배로 마음이 많이 아플 때도 있고, 제가 운동장에서 가서 해주고 싶고, 찬스가 생기면 득점하고 싶을 정도로 안쓰러울 때가 있다. 2경기가 남았는데 온 국민이 기다리는 아시안컵 트로피를 들어올려서 한국에 가져가는 꿈을 꾸고 남은 경기 잘 준비하겠다"고 다짐했다.
여기서 또 의문이 든다. 클린스만은 감독인가 선수인가. 한국의 사령탑인가, 관전자인가. 선수를 선발한 것도 감독이고, 선발을 결정한 것도 감독이고, 경기의 전략과 전술을 짜는 것도 감독인데 선수들이 개인 능력으로 공간을 찾아 뛰어난 경기력으로 승리해주기만을 바란다면 왜 감독이 굳이 필요할까? 경기력이 전반전 미치지 못한 것도 따지고 보면 준비를 잘 못한 것이고 선수 운용과 전술에 문제가 있는 것인데 경기력 탓으로만 돌리면 어떻게 하자는 말인가.
한국은 오는 7일 오전 0시 요르단과 결승 진출을 놓고 준결승전을 펼친다. 지난 대회부터 3~4위전이 폐지됐으니 지면 귀국 보따리를 싸야한다. 조별리그에서 2-2로 비기긴 했으나 객관적 전력상 한국이 요르단에 앞서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이번 대회의 특징이 타지키스탄의 돌풍처럼 어느 팀도 얕볼 수 없는 상향 평준화라 방심은 금물이다. 강팀을 상대할 때보다 약팀을 상대할 때 더 조심해야할 이유다.
우승까지 남은 2경기에 대한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지만 오늘 승리의 감격 만큼 크지는 않았다. 아, 살면서 이런 경기를 몇 번이나 볼 수 있을까? 그것도 정말 지면 탈락인 녹아웃 토너먼트에서 2경기 연속 '호러 무비'를 보다니. 오늘 밤은 너무 길고 나에게는 아직도 많은 술이 남아 있다.
◆2023 AFC 카타르 아시안컵 8강전 제2경기(3일 오전 0시 30분 한국시간, 카타르 알와크라 알자눕 스타디움)
대한민국 2-1(연) 호주
득점 : 황희찬(후45+6 PK) 손흥민(연전14, 이상 대한민국) 크레이그 굿윈(전42, 호주)
출전선수 : 조현우(GK) 설영우 김영권 김민재 김태환(후40 양현준) 황희찬(연후1 오현규) 박용우(연후1 박진섭) 황인범(후32 홍현석) 이강인(연후15+1 정승현) 조규성(후24 이재성) 손흥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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