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 없애려면 ‘이것’ 마셔라?”…두 천재가 입 모아 찬양한 까닭 [전형민의 와인프릭]
사생활 문제로 본국에서 쫓겨나듯 떠나 타국을 전전하는 삶을 살다 전쟁터에서 죽음을 맞이한 시인이 있습니다. 그는 3살 무렵 아버지를 여의고, 10살에는 큰아버지마저 사망하면서 일찌감치 남작의 지위를 물려받았습니다. 가문에 더 이상 작위를 상속 받을 성인 남성이 없다는 뜻이죠.
20대 중반 모두가 선망하던 당대 신여성과 결혼했지만 이듬해부터 곧바로 별거에 들어갔다가 끝내 파혼했고, 이복 누나와의 부적절한 관계를 의심받기도 합니다. 타국 어느 백작 부인과의 사랑이 화제가 되는가 하면, 또 다른 기혼 여성과 사랑에 빠졌지만 그녀가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합니다.
사생활만 놓고 보기엔 희대의 난봉꾼이자 다시 없을 망나니로 보이지만, 그의 글재주는 놀라웠습니다. 이미 열일곱의 나이에 시집 덧없는 시편들(Fugitive Pieces·1804)을 출판했고, 20세때 나태한 나날들(Hours of Idleness·1807)로 정점을 찍습니다.
20세부터 22세까지 그 시절 귀족 청년들의 관례였던 그랜드투어(유럽 각지를 수년간 여행하며 경험을 쌓는 것)로 시간을 보낸 후 그 경험을 정리한 차일드 헤럴드의 순례(Childe Harold’s Pilgrimage·1812)를 출판해 순식간에 사교계의 떠오르는 샛별이 됩니다.
이는 원래 그의 대표작 돈 주앙(Don Juan·1824)에 적힌 “세상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은 만들어진 소설보다도 더 신기하고 별날 때가 있다”라는 문장에서 비롯된 것이죠.
바이런은 영국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시인이자 작가였고, 당시 사교계의 총아(寵兒)였습니다. 현대의 시각으로 보더라도 초상화 속 그는 상당한 미남인데요. 200여년의 세월을 거슬러 최근까지 유행하고 있는 댄디(dandy)의 아이콘인데다, 글재주까지 뛰어났으니 뭇 여성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바이런은 생애 대부분을 우울증 속에서 살았습니다. 자신의 복잡했던 사생활과 거기에 쏟아지는 대중의 관심이 원인으로 지목되기도 합니다만, 타고난 시인인 탓에 걸린 영혼의 병 때문은 아니었을까요.
바이런은 36세의 나이에 그리스 독립 전쟁에서 전사하는데요. 참전 3년 전인 1821년, 우울증에 시달리다 프랑스 보르도의 한 와이너리를 방문해 그 와이너리에서 생산된 와인을 마시면서 “우울함을 벗어던지기에 여기 와인만큼 좋은 것이 없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이번 와인프릭의 주제는 바로 바이런의 우울증을 날려버린 와인, 샤또 샤스 스플린(Ch. Chasse Spleen·우울이여 안녕) 이야기입니다.
스무살이 됐을 때 죽은 친부의 유산을 물려받았지만, 흥청망청 쓰고 다니는 모습을 보다 못한 가족이 소송을 걸어 준금치산자가 되기도 합니다. 여기에 스스로의 낭비벽까지 더해지면서 생애 전반을 궁핍하게 보내게 되죠.
이쯤되면 바이런에 못지 않은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셈인데요. 프랑스의 시인, 샤를 피에르 보들레르(Charles Pierre Baudelaire)의 이야기 입니다. 그가 문단에 처음 등장한 것은 25살이던 1845년 입니다. 그는 바이런보다 10년 정도 더 우울증으로 고통받다 46세를 일기로 사망했는데요.
첫 등단 이후 20년 간 수많은 글과 시를 썼지만, 생전에 실제로 출간까지 이어진 책은 시집 ‘악의 꽃’ 1권 뿐 입니다. 그나마도 수록된 시 101편 중 6편은 미풍양속을 해친다는 이유로 법원으로부터 벌금형이 선고됐고, 그의 작품이 본격적으로 인정받기 시작한 것은 사후의 일입니다.
어느 날 보들레르가 문학자 막심 뒤 캉(Maxime du Camp)의 별장을 방문했을 당시 뒤 캉이 맥주와 브랜디를 권하자 “나는 와인 밖에 마시지 않는다”며 거절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뒤 캉이 다시 ‘보르도와 부르고뉴 와인 중 어떤 것이 좋냐’고 묻자 그 “괜찮다면 둘 다 마시자”며 뒤 캉이 내온 와인을 전부 비워버렸다는 일화는 와인 애호가들 사이 단골 소재 중 하나 입니다.
실제로 하루에도 몇 번이나 카페를 오가면서 와인을 마셨다고 하죠. 그의 와인 사랑은 작품 곳곳에서도 나타납니다.
잠깐, 바이런은 보들레르 이전의 사람인데 어떻게 보들레르의 시가 바이런이 마신 와인 이름의 유래가 됐을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바이런이 마시던 와인의 원래 이름은 샤또 그랑 푸조(Ch. Grand Poujeaux)였는데, 한참 뒤인 1860년대에 샤또의 새 주인이 와이너리의 이름을 보들레르의 시에서 따와 바꿨기 때문입니다.
보르도 태생의 오딜롱 르동(Odilon Redon·1840년생)이라는 화가가 샤또 그랑 푸조의 새 주인이었던 페리에르(Ferriere) 부인에게 새 이름으로 보들레르의 시 스플린을 딴 샤스 스플린을 권한 건데요. 르동은 보들레르를 동경한 나머지 보들레르의 시집 악의 꽃에서 영감을 얻은 판화집 악의 꽃을 제작하기도 했습니다.
아마도 화가 르동과 와이너리의 새 오너 페리에르 부인은 과거 우울증에 고전하던 바이런의 와이너리 방문 이야기과 바이런 덕후였던 보들레르의 시에 대해 알고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바이런이 방문한 그 해 보들레르가 태어난 것은 기연이 아닐 수 없습니다. 두 천재적인 시인의 우울함이 기구하게 엮이면서 샤또 샤스 스플린이라는 와인을 탄생시킨 셈입니다.
하지만 유난히 견디기 힘들때가 있죠. 그럴 때 샤또 샤스 스플린을 즐겨보는 것은 어떨까요? 어쩌면 와인의 이름처럼 우울함과 슬픔이 한 잔의 아름다운 와인과 함께 저 멀리 사라져 버릴지도 모르니까요.
여러분이 우울과 낙담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기보다, 훌훌 털고 일어나서 다시 뛰는 명랑함을 잃지 않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한편 보들레르가 샤또 샤스 스플린의 맛에 반해 헌정시를 바쳐서 유명해진 것이라는 설명은 잘못된 내용 입니다. 시 ‘스플린’이 담긴 시집 ‘악의 꽃’은 1857년에 출간됐습니다. 샤또 샤스 스플린이 샤또 그랑 푸조에서 물적 분할을 통해 이름을 변경한 것은 시집이 출간된 후인 1860년 이후 입니다.
결국 와이너리인 샤또 샤스 스플린은 보들레르의 시 스플린이 출간된 후에야 이름을 바꾸었기 때문에, 설사 보들레르가 이 와인의 맛을 봤다고 하더라도 와인 이름을 따 헌정시를 지었다는 것은 앞뒤가 뒤바뀐 얘기인 셈입니다.
Copyright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 오늘의 운세 2024년 2월 6일 火(음력 12월 27일) - 매일경제
- “평형 같은데, 우리집은 왜 앞동보다 싸지”…아파트 실거래가, ‘동’ 공개 - 매일경제
- 日매체 “요르단 기세 예사롭지 않아…한국도 결승진출 방심 말아야” - 매일경제
- “불 붙나 했더니” 주식 또 찬물…삼전 등 대형주 일제히 떨어진 까닭은 - 매일경제
- “이 돈이면 경기도에 더 큰 집”…서울에서 86만명 빠져나간 이유있네 - 매일경제
- “아이 낳으면 1억 드려요”…회장님이 ‘파격’ 출산지원금 준다는데 - 매일경제
- “아, 정말 짜증나네” 신형 벤츠 타보니…지겹지만 ‘이만한 車’ 없다 [카슐랭] - 매일경제
- 10만원어치 사면 1만원 ‘자동 할인’…설에 장볼 때 ‘이것’ 써볼까 - 매일경제
- ‘이재용 리더십’ 탄력받는다…꽉 막혔던 투자·인수합병 ‘급물살’ 탈듯 - 매일경제
- 오타니가 한국 방송 출연? 실현 가능성 있나 - MK스포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