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과 가까워지더니…北처럼 생떼 쓰는 러시아 [핫이슈]
세상에 우리가 특정 국가나 집단에 대해 뭐라고 하든 제3자가 왜 나서 그걸 비난하는가. 더욱이 그 대상이 일국의 대통령이라면 이는 한국 국민 전체를 무시하는 것이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서방을 향해 비판하는 발언을 놓고 우리가 시시비비 따진다면 맞는 일인가. 우리 외교부가 3일 게오르기 지노비예프 주한 러시아대사를 서둘러 불러 엄중 항의한 것은 향후 러시아 외무부나 크렘린의 입단속을 위해서라도 당연한 조치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우리를 ‘불멸의 주적’이라며 잦은 미사일 발사로 전쟁 으름짱을 놓고있는데 주권국 정상이 그들을 향해 못할 말이 무엇인가. 이에 대해 제3국인 러시아 대변인이 뭐라 지적하는 행태는 이날 우리 외교부가 밝힌 것처럼 “수준 이하로 무례하고 무지하며 편향돼 있다”는 평가 그대로다.
러시아가 유엔 상임이사국으로 국제 평화에 헌신한다고 스스로 맹신한다면 지적할 대상은 전쟁 운운하는 김정은이 먼저다. 푸틴이 지난해 11월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피흘리며 죽은 아이들을 보면 눈물이 난다”고 할 정도로 평화를 사랑한다면 전쟁 발발을 겁박하는 김정은부터 타일러야지 왜 우리를 훈계하는가.
무엇보다 전쟁 중인 러시아는 영토를 맞댄 채 북한의 공격 위험에 놓여있는 우리한테 뭐라 할 자격조차 없다. 러시아와 국경을 접한 우크라이나가 나토에 가입하면 자국 안보가 위협받는다며 선제 전쟁까지 일으킨 게 러시아다. 우크라이나가 러시아를 상대로 북한처럼 주적 운운하며 핵과 미사일 발사 실험을 했었나. 그렇지 않은데도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쳐들어간 반면 우리는 북한의 도발적 행태를 비난할 뿐이다. 누가 누구를 가르치려 하는지 도저히 납득이 안된다.
자하로바는 지난달 26일에도 “러시아와의 우호 관계를 완전히 붕괴시키는 무모한 조치에 대해 한국 정부에 경고한다”고 밝혔다. “한국 국방 수장이 치명적인 무기를 포함한 우크라이나에 대한 직접 군사 지원의 필요성을 언급했다”는 이유에서다. 특정 국가한테 ‘경고한다’는 표현이 외교 대변인 입에서 나올 소리인가. 이는 나흘 전 신원식 국방부 장관이 국내 영자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정부가 우크라이나 지원을 인도주의와 재정적 차원으로 제한한 것을 지지한다”면서도 “개인적으로는 자유세계 일원으로서 가야 할 길은 전면 지원(full support)”이라고 말한 것을 트집잡은 것이다. 물론 국방부 수장이 군사 현안을 놓고 개인 의견을 발설해 오해를 살 필요는 없다. 하지만 자하로바가 신 장관의 정확한 의도를 파악하지도 않은 채 경고부터 꺼내든 것은 성급한 일이다.
하지만 정작 북한과의 군사기술 협력 실체에 대해서는 침묵과 부인으로 일관한다. 자하로바는 경고를 날리면서 북한과의 무기 거래는 ‘가짜 정보’라고 부인했다. “러시아와 북한 간 군사기술 협력을 주장하는 것은 입증되지 않고 근거도 없기 때문에 불법적이라는 점을 강조한다”고 했다.
그러나 푸틴과 김정은이 지난해 만났고, 푸틴은 연내 방북을 준비중이다. 최고지도자가 전쟁으로 바쁜 와중에 무기 거래나 먹거리 물물교환 말고는 화젯거리도 없는 북한을 찾아갈 만큼 한가하진 않을 것이다. “러시아는 한국과 협력할 준비가 돼있다”는 푸틴의 말대로 러시아가 우리와 잘 지내려 한다면 북한과의 군사 협력 내용을 오해받지 않게 잘 설명하면 된다. 우리한테는 우크라이나에 살상무기를 보내지 말라고 압박하면서 한국에 비수가 될 러시아 군사기술을 북한에 제공하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푸틴을 포함한 러시아 당국자들이 쏟아내는 발언은 거칠고 오만해졌다. 북한과 가까워지면서 러시아가 우리를 향해 내뱉는 발언 수위는 높아지고 횟수는 잦아졌다. 러시아를 관찰해온 사람으로서 이런 모습은 한국의 관심을 끌고자 생떼를 부리는 것으로 보인다. 북한을 매개로 속으론 가까워지고 싶은데 멀어져가는 우리를 어떻게든 붙들고 자극해보려는 수작 정도로 읽힌다. 또 자기네 땅덩이가 크다고 해서 아직도 우리를 소국 정도로 여기는 무례함도 그들 발언 속에 묻어난다.
해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양국이 1990년 9월 어렵게 수교를 한 상황으로 거슬러 올라가 그 때를 살펴보는 것이다. 당시 한소 수교를 앞두고 김일성 주석은 방북한 소련 외무장관 접견까지 거부하며 반발했다.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50년 동지를 배신하고 한국을 택한데에는 망가진 자국 경제를 살리고 남북 간 중재를 통해 한반도 안정에 기여한다는 의도가 있었다. 우리 역시 북한에 영향력 있는 소련을 활용해 북한 도발을 막고 남북 평화공존과 더 나아가 통일이라는 기대를 가졌다.
하지만 30년 넘게 흐른 지금, 수교 전까지는 아니지만 한러 관계는 멀리 뒷걸음질 치고 있다. 러시아가 북한 위협을 막아주고 남북 간 조정자 역할을 해주기 바랬던 우리 희망은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 누구의 책임인가. 우리는 러시아가 자유와 시장민주주의 가치를 공유한다면 정치·경제·사회 모든 분야에서 협력하는데 주저할 게 없다. 러시아 내 한국 기업들이 공장 가동을 못하고 있고 급기야 폐업까지 한 것은 러시아가 일으킨 전쟁 때문이다. 북한에 군사기술 제공 우려 때문에 한러 관계는 지금처럼 험악해졌다. 러시아 당국자들은 누구의 과오로 이런 지경에 이르렀는지 판단해보라. 현 상황을 바꿔볼 의향이 있다면 1990년 수교 당시 서로 윈윈하려 했던 정신을 새겨보기 바란다.
김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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