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장에 기록한 야구의 역사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었다’[KBO 기록강습회를 가다]

김만석 기자 2024. 2. 3.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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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O기록위원회 이종훈 위원장이 1일 서울 건국대 새천년관에서 열린 KBO 기록강습회 오리엔테이션을 진행하고 있다. 김만석 선임기자


두 장의 종이에 ‘그날의 야구 역사’가 빼곡히 기록된다.

3시간 넘는 혈투를 이 두 장에 담는 것은 사관이 역사를 기록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야구는 기록의 스포츠다. 안타냐, 실책이냐에 따라 선수들의 운명이 바뀌기도 한다. 기업의 인사고과처럼 선수들의 기록은 나중에 주전과 비주전을 가르는 잣대가 되고 연봉협상에 기준이 되기도 한다.

기록원은 정해진 기준을 바탕으로 자신의 판단 아래 선수들에게 기록을 부여한다. 한번 정해진 기록은 2022년도부터 시행하고 있는 정정제도를 제외하곤 함부로 변경할 수 없다. 따라서 그만큼 부담과 책임감이 막중한 자리이기도 하다. 냉철한 판단력으로 선수들의 역사를 빠짐없이 집필하는 것이 바로 야구 기록원이다.

‘33초 만에 마감’ 뜨거운 열기


서울 건국대학교 새천년관에선 지난 1일부터 3일까지 한국야구위원회(KBO) 기록강습회가 열렸다.

1982년 프로야구 원년부터 시작된 강습회는 코로나 엔데믹 시대를 제외하곤 매년 개최됐다. 2016년부터는 서울 외 부산, 대구, 광주 등 프로야구 구단 연고지가 있는 도시에서도 함께 열리고 있다. 올해는 지난달 19일부터 3일간 세종시에서 야구팬들과 만났다.

특히 올해 200명을 모집하는 서울 강습회는 단 33초 만에 마감되며 뜨거운 열기를 자랑했다. 이는 지난해 38초의 기록을 1년 만에 경신한 것이다.

KBO기록위원회 이종훈 위원장이 2일 스포츠경향과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만석 선임기자


KBO기록위원회 이종훈 위원장은 “야구를 좋아하는 팬들이 늘면서 강습회에 관한 관심도 덩달아 뜨거워지고 있다”며 “모집 마감 시간이 매년 단축될 것 같다”고 예측했다.

KBO 홈페이지를 통해 선착순 수강 신청을 받다 보니 일부에선 볼멘소리도 나왔다.

온 가족을 동원해 간신히 접수했다는 50대 남성은 “시니어들을 위해 온라인 접수가 아닌 현장 방문 접수가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냈다.

이종훈 위원장은 이에 대해 “나이 드신 분들을 위해 일정 인원 할당을 적극적으로 검토하겠다”고 말했다.

아주 특별한 수강생들


이번 서울 강습회에는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초를 다투는 수강 신청에 능숙한 20대가 120명으로 가장 많았다. 특히 10대 수강 인원도 작년보다 7명이 늘어 12명이다.

남녀 수강생 비율은 거의 50대 50. 200명 중 남성이 101명이다.

수강생 중에는 ‘기록 스포츠’ 야구의 참맛을 제대로 느껴보려 강습회를 찾은 열성 야구팬이 30%를 넘었다. 최근 여성 팬을 중심으로 불고 있는 야구 열기를 제대로 느끼는 순간이다.

사회인야구 등 아마추어 야구 경기에서 기록원 활동을 위해 ‘공부의 길’에 들어선 수강생도 많다.

얼마 전 은행을 퇴직한 50대 여성은 “전 직장동료의 권유로 강습을 받게 됐다”며 “정확하고 꼼꼼한 은행 업무를 했기 때문에 기록원이 적성에 잘 맞을 것 같다”고 했다. 그는 열성적인 야구팬은 아니지만 이번 수강을 계기로 제대로 된 ‘야구 공부’를 시작했다.

KBO 기록강습회를 찾은 이다경 씨가 스포츠경향과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특별한 인연으로 강습회를 찾은 수강생도 있다.

지난해 프로야구 SSG 홈구장인 SSG 랜더스필드에서 전광판 오퍼레이터로 근무한 이다경(24) 씨는 2년 연속 강습회를 찾았다. 이다경 씨는 기록위원들이 판단한 기록을 야구장을 찾은 팬들에게 전광판을 통해 전달하는 또 다른 기록원 역할을 했다.

이다경 씨는 “기록위원들의 판단 후 전광판에 상황을 표시했지만 강습회를 통해 배운 용어와 야구에 대한 이해 때문에 쉽게 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다경 씨 역시 ‘야구인’을 꿈꾼다. 그는 “기록원도 좋지만 구단 프런트나 KBO에서 근무하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이미 사회인야구 기록원으로 활동하고 있지만 바뀐 규칙이나 새로 도입된 규칙을 익히기 위해 2~3년마다 ‘보수교육’ 차원에서 정기적으로 강습회를 찾는 경력자도 꽤 많다.

수도권의 한 사회인야구 리그에서 심판으로 활동하고 있는 40대 남성은 “요즘 사회인야구 선수들의 보는 눈은 프로야구에 못지않다”며 “기록과 규정을 제대로 알아야 그들의 눈높이에 맞출 수 있어 우리도 공부가 필요하다”고 수강 이유를 밝혔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KBO 기록위원들이 직접 강사로 나선 수업의 열기는 뜨거웠다.

노쇼없이 200석의 좌석이 꽉 찼다.

수강생들은 한 시라도 단상 위에 있는 대형화면에서 눈을 뗄 수가 없다. 한눈을 팔다간 가뜩이나 복잡한 표기법을 놓칠 수 있다.

대형화면에 주자 1, 2루 상황에서 적시타가 터져 2루 주자가 득점에 성공한 장면이 송출됐다. 일부 수강생들이 이 장면을 기록하기 위해 화면에서 눈을 떼고 펜을 들었다. 하지만 상황이 끝난 게 아니었다. 외야수의 송구를 포수가 놓치는 바람에 1루 주자까지 홈으로 들어왔다. 실책이 발생한 것이다.

‘경기기록의 예’ 수업에 강사로 나선 김영성 기록위원은 “기록원은 상황이 끝날 때까지 경기장에서 눈을 떼선 안 된다”며 “섣부른 예측으로 중요한 기록을 빠뜨릴 수 있다”고 주의를 당부했다.

KBO기록강습회가 열리는 새천년관 강의실에서 전시된 1982년 삼성 라이온즈와 MBC 청룡의 프로야구 개막전 기록지. 김만석 선임기자


쉬는 시간에도 수업은 계속된다. 수강생들이 기록위원들에게 끊임없이 질문 쏟아내기 때문이다.

3일 동안 총 19시간의 수업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나머지 3시간은 지금까지 배운 것을 바탕으로 기록지 작성 실기 테스트를 한다. 일종의 시험인 셈이다. 성적 우수자에겐 수료증이 발급되는데 초보자가 통과하기엔 쉽지 않다.

모든 일정을 마친 이종훈 기록위원장은 “프로야구를 사랑하는 모든 야구팬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다”며 “더 넓은 장소를 마련해 더 많은 팬들이 강습회 찾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KBO 기록위원들이 3일 서울 건국대 새천년관에서 KBO 기록강습회가 끝난 후 단체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김만석 선임기자


김만석 선임기자 icand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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