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춥다, 겨울의 새들처럼 봄을 기다린다
그림 속 새
“봄이 오면 티파사에는 신들이 강림해서 수런거린다. 태양과 향쑥 내음 속에서, 은빛 갑옷을 두른 바다에서, 천연의 푸른 하늘에서.”
알베르 카뮈의 산문집 ‘결혼·여름’의 첫 문장이다. 실존주의 철학자에게도 봄은 이토록 찬란하다. 겨울의 끝에서 새들을 그린 두 화가가 있다. 근대의 장우성과 동시대 작가 빈우혁의 풍경 속 봄을 기다리는 마음을 들여다본다.
왜색 걷어낸 우리만의 동양화
시리다. 담백함에 마음이 맑아진다. 장우성(1912~2005)의 ‘조춘’을 본 첫 느낌이다. 지금 보니 달랐다. ‘꽤 짙고 요란하네.’ 변심의 이유를 알고 싶다. 한 쌍의 갈매기가 붙어 있다. 여유를 즐기는 걸까. ‘조춘’은 흘깃 보면 단아하다. 수줍은 듯 고개를 내민 꽃봉오리에 은은함이 배어 있다. 섬세하고 부드러운 선은 정취를 더한다. 갈매기들은 날개를 가지런히 접었다. 조용히 기다리고 있으려나. 다가올 봄을. 또렷한 눈동자에 시선이 간다. 동시에 한곳을 응시하고 있다. 알아차렸다. 울어댄다. 호기롭고 날카롭게. 피부와 깃털의 결 하나하나가 만져질 듯 실제적이다. 부리와 다리를 표현한 노란색은 도드라지게 짙다. 벌려진 부리의 움직임을 보노라면 울어대는 새소리가 들릴 듯하다. 사실적이고 정교하다. 1935년도 작품이다.
“손끝 발끝이 다 얼어붙었다.” 장우성은 1980년대 신문 칼럼을 통해 이렇게 회고했다.20대 청년은 허가증을 받고 창경원(지금의 창경궁) 동물원으로 향했다. 삼각대에 앉아서 온종일 철조망 속 갈매기를 스케치했다. 예민한 동작들이 살아나고 묘사는 충실해졌다. 코끝까지 전해지는 한기가 담긴 과정이다.
장우성은 당대 명성을 날리던 김은호의 화숙에서 처음 그림을 배웠다. 1년 만인 1932년 스무살의 나이로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입선했고 이후 여러번 수상했다. 그의 여정은 오직 하나의 구도였다. 동양적인 것에 대한 탐구와 한국적인 미학의 추구. 일제 시기에 그린 여인들의 모습에는 조선 시대의 향취가 스며 있다. 말년에 먹의 필치를 살린 산봉우리의 곡선은 유려하고 서정적이다. 동물들의 자태는 해학적이다.
장우성은 자주 새를 그렸다. ‘해빈소견’(1932)의 갈매기들이 무리 지어 있다. 생동감이 넘친다. 화가로의 길을 택한 설렘이 보인다. ‘일식’(1976) 속 까마귀는 부르짖으며 날고 있다. 다급해진다. ‘소나기’(1979)는 그저 비극적이다. 길을 잃은 새들이 애처롭다. 그가 그린 새들은 아름답지만은 않다. 두려움과 절망만을 담았을까. 갈매기는 거센 파도에도 자리를 지킨다. 의연하게. 까마귀는 세상에 적극적으로 외친다. 흠뻑 젖을지언정 곧 비가 그칠 것을 안다.
“가르치는 입장보다도 공부하는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그는 해방 뒤 1946년 서울대 미술학부 초대 교수로 임용되었다. 예술학과 미학 등에 관한 책을 치열하게 읽었다. 왜색을 걷어내고 우리만의 동양화를 찾고자 했다. 옛것의 정신을 담아내기로 했다. 선의 표현은 간결해졌다. 마음의 결은 깊어졌다. 전통을 고이 간직한 신문인화의 시작이다.
“계절이 봄이 완연하다. 시냇가 버들가지에 부풀어 오른 버들강아지를 보았다.” 6·25 종군화가 시절 전선에서 쓴 일기다. 일제 때 태어나 아흔세 해를 살아냈다. 힘겨운 시절을 지날지라도 그는 다가올 날을 늘 기대로 채웠다. 철조망을 두고 스케치를 하는 청년 장우성이 보인다. ‘조춘’ 속 갈매기의 지저귐을 가까이서 듣고 싶다. 그와 함께 봄을 재촉하리라. 곁에서 온기를 더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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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 쓸 수 없었던 화가
한파가 한창인 오후였다. 대로변과 가까운 갤러리 문을 급히 열었다. 선명한 색채를 맞이했다. 금방 몸이 녹았다. 갤러리 바톤에서 열린 빈우혁(43)의 개인전 ‘멧돼지 사냥’(Die Eberjagd)을 만난 날이다. 연못을 그린 ‘레이크 스터디 위드 레인(Lake Study with Rain) Op. 98’은 추워 보였다. 질감이 느껴지는 마티에르다. 물결의 흐름은 얕게 일렁인다. 부드럽고 섬세하다. 이 평화로운 쓸쓸함에는 이유가 있으려나. 물줄기의 보랏빛에 계속 눈길이 머문다.
“어 내 발레복 색인데?” 엉뚱한 생각은 딴 곳으로 튄다. “저체중에 근육이 하나도 없습니다.” 반드시 운동을 해야 한단다. 냉정하다. 의사는 눈도 안 마주치고 말한다. 몇년 전 수술 후 들은 말이다. 수술은 잘되었다. 회복은 느렸다. 상처는 아물다가 다시 나빠지기를 반복했다. 일어나 걸어야 했다. 조금만 움직여도 통증은 배가 되어 온몸을 찌른다. 허약한 체질은 틈을 노린 듯 존재감을 과시했다. 오리의 모습에 그때의 내가 겹쳐졌다.
“이 오리 다친 거 아니니? 비 맞고 힘들어 보이는데.” 동행한 엄마의 말이다. 엄마는 다른 작품으로 방향을 튼다. 청둥오리인가. 매혹적인 빨강이기보다 아파 보이는 붉음이다. 머리와 꽁지깃의 검정은 결국 우울함을 끌고 온다. ‘아직 겨울에 있어야 해’라고 말하듯이. 아프다. 그 장면에 함께 있고 싶다. 오리들은 불안을 떠안고도 물길을 헤젓는다. 그 여정에 속하고 싶어서다.
빈우혁은 현재 독일에서 작업한다.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전문사를 졸업했고 서울대 미술대학원 서양화과를 수료했다. 국내에서 개인전을 개최하고 자신의 작품을 티브이(TV) 드라마(‘사랑한다고 말해줘’) 속 주인공의 작업물로 선보이면서 이름을 알렸다.
“무언가를 드러내지 않는다. 보이는 것에 집중한다.” 최근 작업에 대한 설명이다. 거주지 주변 풍경에 대한 관찰과 그리는 행위에만 몰두한다. 오히려 본인의 감정을 배제한다고. 그러하다면 나는 작가의 의도에 반하는 감상자다. 연못의 물결에서 동요를 발견하고 오리의 모습에서 긴장과 차오름을 느끼기에. 그는 2014년 독일 베를린 예술가 거주 프로그램 글로가우에어(GlogauAIR)에 참여하며 베를린에 닿았다. 편안해지는 자신을 발견했다.
“고통 속에서도 움직이는 거 같네.” 엄마의 말에 나도 다시 그림을 본다. 위태로워 보이는 오리들이 헤엄친다. 어떤 위험과 공포를 맞닥뜨릴지라도. 희망이라는 거창한 단어를 쓰고 싶지는 않다. 숨지 않고 물길을 따르는 모습에서 다음날들에 대한 작은 기대를 발견한다. 겨울이면 유난히 찬 손과 발에 온기가 차오른다. 서서히.
“1년 동안 석회화 건염으로 어깨를 쓸 수 없었다.” 전시 서문을 뒤늦게 읽었다. 강제로 손을 멈추어야 했던 날들이었다. 마음이 저려온다. 베를린 티어가르텐의 공원에서 그가 보낸 지난한 시간들이 두터운 마티에르에 쌓여 있다. 그 흔적을 만져본다. 기다리고 싶어졌다. 그의 상흔이 흐려지기를. 아물지 않았던 나의 상처에도 근육이 붙기를.
기대는 때로 사치스럽다. 무언가를 바람은 내게는 주도권이 없다. 불안하고 애가 탄다. 그래서일까. 잊지 않고 다가올 봄에게 연서를 쓰고 싶다. 기다림을 모른 체하지 않기에. 여전히 춥다. 어서 봄을 만나고 싶다.
미술 칼럼니스트
예술가가 되고 싶었지만 소심하고 예민한 기질만 있고 재능이 없단 걸 깨달았다. 모네와 피카소보다 김환기와 구본웅이 좋았기에 주저 없이 한국 근현대미술사를 전공했다. 시대의 사연을 품고 있는 근대미술에 애정이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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