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구 안 보이는 전쟁, 우크라이 희생이 출구전략?

채인택 전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2024. 2. 3.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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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가 점령한 ‘우크라 17.5% 영토’가 관건
우크라이나는 탈환 부르짖지만, 서방은 종전에 무게

(시사저널=채인택 전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2월24일로 2주년을 맞는다. 곧 3년째로 접어들 전쟁 상황은 갈수록 복잡해지고 있으며,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어느 쪽에도 유리하지 않아 보인다. 그럼에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1월17일 방송연설에서 "러시아가 주도권을 쥐고 있다"며 "지금 상황이 계속되면 우크라이나는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타격을 입을 것"이라고 말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같은 날 다보스포럼에서 "포식자가 우크라이나 국경 너머 유럽으로 영토를 확장하려고 할 것"이라며 "전쟁을 지금 상태에서 얼어붙게 해선 안 된다"면서 철저한 저항을 강조했다. 전쟁 장기화가 불가피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음을 보여주는 연설이다.

1월20일 우크라이나 도네츠크 지역을 점령한 러시아 진지를 향해 우크라이나군 45포병여단 병사들이 스웨덴제 곡사포를 발사하고 있다. ⓒAFP연합

푸틴, "점령지 인정하면 종전" 미국에 제안?

유엔에 따르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한 민간인 사망자는 지난해 12월 중순 기준 최소 1만여 명에 이른다. 유엔난민기구(UNHCR)의 지난해 12월31일 집계에 따르면 세계 각지로 피신한 우크라이나 난민은 637만7100명에 이른다.

군사 상황을 살펴보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일진일퇴를 거듭하면서 전쟁은 교착상태에 빠졌으며, 장기전·소모전으로 향하고 있다. 자금 사정은 우크라이나에 불리해 보인다. 우크라이나가 올해 전비와 국가 운영 예산 부족을 겪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우크라이나가 외국의 원조를 받지 못하면 올해 예산이 400억 달러(약 53조원) 정도 부족할 전망"이라며 "앞으로 몇 달 안에 예산 고갈을 겪을 수 있다"고 1월22일 보도했다. 주로 정부 운영과 공무원·군인의 급여·연금 등에 필요한 예산이다.

유럽연합(EU) 27개 회원국은 다행히 우크라이나에 2024~27년에 500억 유로(약 73조원)를 지원하기로 2월1일 합의했다고 유로뉴스가 보도했다. 그동안엔 친러시아 성향의 오르반 빅토르 총리가 이끄는 헝가리 정부의 단독 반대로 합의가 난항을 겪은 바 있다. 

프랑스 국제방송 '프랑스24'에 따르면 러시아는 1991년 소련 붕괴 당시를 기준으로 우크라이나 영토의 17.5%를 현재 점령하고 있다. 여기에는 2014년 병합한 크림반도와 2022년 2월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장악한 우크라이나 동남부가 포함된다. 우크라이나는 주권 수호를 강조하면서 러시아가 점령한 자국 영토의 탈환이 전쟁 목표라고 강조한다.

하지만 미국을 비롯한 서방의 생각은 다른 것으로 보인다. WSJ는 "미국 행정부는 우크라이나가 그동안 잃은 영토를 수복하는 대신 러시아의 새로운 전진을 막도록 방어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지원의 무게중심을 옮기는 구상을 하고 있다"고 1월22일 보도했다. 미 국무부가 이러한 새 전략을 바탕으로 '우크라이나 지원 10년 계획'을 마련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보도에 따르면 미 국무부는 현재 의회에 계류 중인 610억 달러(약 80조원) 규모의 지원 예산 통과를 전제로 '전투-전략구축-복구-개혁'의 4단계로 이뤄진 우크라이나 전략을 마련해 올봄에 발표할 예정이다.

1월25일 블룸버그통신 보도는 이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이 통신은 크렘린궁과 가까운 복수의 인사를 인용해 푸틴 대통령이 지난 1월 중개인을 통해 미 행정부 고위 인사들에게 "(우크라이나) 관련 논의에 열려있다"는 신호를 보냈다고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러시아는 점령지에 대한 통제권을 인정받는 대신 우크라이나 중립국화 요구를 철회하고 궁극적으로는 우크라이나의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가입 반대 입장도 바꿀 수 있다는 신호를 보냈다는 이야기다. 러시아가 미국에 종전을 위한 물밑협상을 제안했다는 뉘앙스다.

물론 이 보도가 나가자 미국과 러시아 당국자는 펄쩍 뛰었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궁 대변인은 1월26일 "잘못된 보도다. 전혀 사실이 아니다"며 고개를 저었다.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에이드리언 왓슨 대변인도 "러시아의 입장이 변했다는 걸 알지 못한다"며 "러시아와의 협상 여부와 언제, 어떻게 할지는 우크라이나의 결정에 달렸다"고 말했다.

현재 미 공화당 대선후보 경선에 나선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지난해 5월 "내가 재선해 푸틴과 젤렌스키를 만난다면 24시간 안에 이 전쟁을 해결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미국의 소리(VOA)가 당시 보도했다. 자신이 백악관에 복귀하면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을 철회함으로써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에 점령당한 영토를 포기하고 평화협정에 서명하게 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우크라 배제한 채 미·러 직접 대화할 수도

러시아의 종전 제안을 언급한 블룸버그통신 보도가 사실이라면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 푸틴이 이미 트럼프 재집권을 가정하고 이에 맞춰 전쟁의 '엔드게임' 구상에 착수했다는 의미다. 둘째, 러시아는 미국의 바이든 행정부든 트럼프의 공화당 인사든 미국에 자국의 조건을 전달할 수 있는 협상 창구를 마련하고 있다는 의미다. 이는 우크라이나를 거치지 않는 직접 대화 창구를 의미한다.

우크라이나를 둘러싼 미·러 간 직접 대화 창구가 확인되면 우크라이나의 주권은 심각한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 전야에 체코슬로바키아가 사실상 동맹이던 영국·프랑스에게 버림받은 일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당시 나치 지도자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어 사용자가 많이 거주하는 주데텐란트를 '최후의 영토적 요구'라며 독일에 넘기도록 요구하자 영국·프랑스는 전쟁을 피한다는 명분으로 이를 받아들이는 뮌헨협정에 서명했다. 여기서 체코슬로바키아의 주권은 무시됐다. 협정 서명자인 영국의 네빌 체임벌린 총리는 귀국길에 환송 나온 인파 앞에서 협정서를 흔들며 "우리 시대의 평화(Peace for our time)"라고 말한 적이 있다. 하지만 그 결과는 히틀러가 전쟁을 일으킬 자신감을 키우고 전쟁 준비시간을 벌어준 것이었다는 지적이 많다.

블룸버그의 보도 내용을 두고 러시아 특유의 공작 차원에서 나온 것일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러시아가 이런 주장을 흘려 우크라이나를 자극하거나 미국을 떠보거나 유럽의 분열을 꾀하는 고도의 심리전 또는 디스인포메이션(허위 정보) 공작에 나섰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런 보도가 잇따르는 가장 큰 이유로 지지부진한 전황이 꼽힌다. 우크라이나가 서방의 전차 지원 등에 힘입어 지난해 6월 의욕적으로 시작한 반격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오히려 넉달 후인 10월부터 러시아가 다시 공세에 나섰다. 우크라이나의 얼어붙은 벌판에서 지금도 전쟁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힘을 통한 돌파구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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