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수어 공용어 8년…게이 레즈비언 등 성소수자 혐오표현 여전
(서울=연합뉴스) 김정진 기자 = 문화체육관광부 소속 기관인 국립국어원 홈페이지에는 청각장애인 등 농인을 위한 한국수어사전 코너가 있다.
이 사전에는 한국어 단어를 수어로 나타낸 동영상과 동작에 대한 설명이 자세히 소개돼 있다.
이 한국수어사전은 '게이', '레즈비언'을 어떻게 설명할까. 두 단어를 나타내는 수어를 직역하면 각각 '항문 섹스를 하는 남자', '여자와 몸을 비비는 여자'다.
트랜스젠더, 양성애자와 같은 단어는 한국수어사전에 등재조차 돼 있지 않다.
2016년 2월 3일, 한국수어는 국어와 동등한 자격을 가진 농인의 공용어가 됐다. 그로부터 8년이 지났지만 성소수자 관련 단어에 대한 논의는 제자리걸음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일각에서는 성소수자를 지칭하는 단어에 담긴 혐오표현을 빼거나 아직 정립되지 않은 표현을 정립하는 등 '대안 수어'를 만드는 움직임도 있지만 농사회(한국수어를 제1언어로 하는 사람이 만든 공동체) 다수와 국립국어원은 "널리 쓰이는 표현으로 문제가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한국수어의 날을 하루 앞둔 지난 2일 서울 은평구 인권재단 사람 사무실에서 만난 김보석(35)·우지양(34) 한국농인LGBT+ 상임활동가는 이 같은 한국수어의 현주소를 전하며 답답함을 토로했다.
이들은 2019년 12월부터 이 같은 한국수어의 문제점을 알리고 변화를 끌어내기 위한 활동을 해오고 있다.
"2019년 서울인권영화제 당시 영화제 측은 수어통역사에게 '혐오수어가 아닌 수어를 사용해달라'고 요청했다고 해요. 그런데 그렇게 바뀐 수어조차 성적인 의미에 집중한 혐오수어였죠. 이걸 계기로 농인과 성소수자, 당사자성을 가진 사람들끼리 모여 고민해보자며 만난 게 이 단체의 시작이었어요.
혐오표현을 뺀 '대안 수어'를 만들기 위한 과정은 생각보다 험난했다. 한국수어 자체가 남성과 여성이라는 성별 이분법적 사고에 기인하고 있었고 수어사전에 아예 없는 표현을 새롭게 개발해야 하는 경우도 많았다는 게 이들의 설명이다.
그러나 활동가들은 각 어휘와 그것을 둘러싼 맥락을 함께 공부해 가며 총 37개의 대안 수어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2021년에는 '농인성소수자✕한국수어: 편견과 혐오를 걷어낸 존중과 긍정의 언어'라는 제목의 책도 펴냈다.
이들이 만든 수어에서 게이와 레즈비언은 각각 '남성에게 끌리는 남성', '여성에게 끌리는 여성'이라는 의미다.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면 남성 또는 사람, 새끼손가락을 치켜들면 여성을 의미하던 기존 수어에 담긴 남성 중심성·성별 이분법적 사고를 배척하기 위해 사람을 표현할 땐 검지손가락을 치켜들기로 했다.
이듬해인 2022년 9월에는 이렇게 만들어진 대안 수어를 반영해달라며 국립국어원에 민원을 제기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국립국어원은 연합뉴스와 통화에서 "지난해 4월 한국농아인협회 등과 자문회의를 통해 논의한 결과 '널리 쓰이는 표현이므로 문제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설명했다.
대안 수어를 사전에 함께 올려달라는 요구에 대해서는 "좀 더 고민해보기로 했다"면서도 지금까지 추가 논의는 이뤄진 바 없다고 답했다.
이에 대해 김 활동가는 "국립국어원이 말한 회의에 대안수어 운동의 맥락을 이해하는 농인 성소수자는 단 1명도 없었다. 당사자가 없는 회의가 어떤 당위성을 가질 수 있느냐"며 "문제가 없다는 결론은 절대 인정할 수 없다"고 토로했다.
우 활동가도 "'다수가 그렇게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논리로 소수자의 목소리를 너무 가볍게 지나쳐버린다"고 말했다.
이들은 수어의 중요한 특성 중 하나인 도상성(기호와 의미 사이 관계가 뚜렷한 특성)을 근거로 대안 수어를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입장에 대해서도 "타당성이 없다"고 반박했다.
두 손으로 지붕 모양을 만들어 표현하는 '집'이라는 단어처럼 기호와 의미 사이의 관계가 뚜렷하지만, 모든 수어가 그렇지는 않다는 것이다.
김 활동가는 '있다'라는 단어를 예시로 들었다.
"이렇게 엄지와 새끼손가락만 편 채 엄지 쪽을 코에 대면 '있다'라는 의미예요. 어떻게 봐도 '있다'라고 보이지 않죠."
전문가들은 농인사회 자체가 가진 소수자성, 성소수자와 관련한 농인 사이의 인식 미비 등이 수어의 변화를 더디게 만든다고 분석했다.
최영주 조선대 수화언어학과 학과장은 "농인 화자들은 인구가 많지 않고 그중에 성소수자는 더욱 적다 보니 그들의 목소리를 반영할만한 통로가 활성화돼 있지 않다"며 "언어가 바뀌기 위해서는 변화의 필요성이 생기고 그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이뤄져야 하는데 수어는 시간이 더 오래 걸릴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박정근 한국수어통역사협회장도 "수어가 한국 사회에서 공용어가 된 지는 8년째이지만 아직도 비장애인들에게 접근조차 하기 어려운 구조"라며 "그중에서도 소수인 농인 성소수자가 사용하는 언어는 더 상용화되기가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우 활동가는 "큰 목표보다는 할 수 있는 작은 목표부터 차근차근 이뤄가자는 생각"이라며 "올해는 농인 성소수자가 농인 또는 청인을 직접 만나 우리의 수어를 알려줄 수 있는 자리를 만들고 싶고 함께 할 수 있는 인권활동가들도 더 많이 양성하고 싶다"고 바람을 전했다.
김 활동가도 "지금 한국 사회에는 농인 당사자가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자리가 너무 부족한 게 사실"이라며 "언젠가 진짜 농인들의 이야기를 외칠 수 있는 인권연대를 만들어보고 싶다"고 말했다.
stop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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