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 파워’가 절실한 바이든...전통 지지층 이탈에 비상 걸린 민주당
민주당 ‘집토끼’로 여겼던 흑인들 “경제 어려워” 이탈 조짐
바이든과 참모들잇따라 ‘흑심 구애’
“여러분의 목소리를 낼 준비가 됐나요? 조 바이든 대통령과 저는 당신들만 믿습니다!”
2일 오후 5시 미국 남부 사우스캐롤라이나주(州) 전통 흑인대학(HBCU·Historically Black Colleges and Universities)인 사우스캐롤라이나 주립대 야외 공연장에서 민주당 소속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이 이렇게 외치자 200여명의 흑인 유권자들이 “우리만 믿으라” 환호했다. 오는 11월 미 대선의 민주당 후보를 뽑기 위한 첫 번째 경선인 3일 사우스캐롤라이나 프라이머리(예비 선거)를 하루 앞둔 이날 저녁, 해리스는 노예 제도와 인종 차별이라는 아픈 역사를 상징하는 흑인 대학에서 조 바이든 대통령을 위한 ‘마지막 유세’를 진행했다. 미 역사상 첫 유색인종·여성 부통령인 해리스도 워싱턴DC에 있는 명문 흑인대학인 하워드대 출신이다.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 바이든 대통령의 승리는 확정적이다. 바이든을 위협할 수 있는 수준의 당내 경쟁자가 없기 때문이다. 그나마 이름이 알려져 있는 딘 필립스 하원의원(미네소타), 작가 메리앤 윌리엄슨 등은 전국 단위 여론조사에서 지지율이 한자릿수를 맴돌고 있다. 그럼에도 바이든과 참모들은 선거 막판까지 이 지역을 찾으면서 공을 들였다. 미 전역에서 흑백 인종 차별이 가장 심했던 남부 주들을 가리키는 ‘딥 사우스(Deep South)’의 대표격인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 ‘민주당 집토끼’(전통 지지층)인 흑인 유권자들에게 구애해 미 전역의 ‘흑심(黑心·흑인 표심)’을 다지겠다는 의도란 분석이다.
이번 프라이머리는 3일 현장 투표가 진행돼 최종 결과는 한국 시간으로 4일 오후에 나올 것으로 보인다.
◇지난 대선때 흑인 ‘몰표’ 받았던 바이든, 3년간 무슨일이
바이든은 지난 2020년 대선에서 흑인층의 ‘몰표’를 받았다. 당시 사우스캐롤라이나 흑인 유권자의 64%가 바이든을 지지한 것으로 집계됐다. 백인 유권자(33%) 지지율의 배에 가깝다.
이를 보답하듯 바이든은 임기 초 국방장관(로이드 오스틴), 유엔 주재 대사(린다 토머스그린필드), 백악관 대변인(커린 잔피에어), 차기 합참의장(찰스 브라운) 등 흑인을 요직에 대폭 기용했다. 임기 중 임명한 첫 대법관도 대선 공약으로 내세웠던 ‘첫 흑인 여성’인 커탄지 브라운 잭슨이었다. 이날 해리스 부통령 행사에서도 “최초의 흑인 대법관 임명” “흑인들의 요직 기용” 등의 표현이 수차례 나왔다.
바이든은 지난 50여 년간 중서부 아이오와주에서 대선 경선을 치렀던 전통도 바꿔 대선 첫 경선지를 흑인이 다수 거주하는 사우스캐롤라이나로 바꿨다. 그는 지난 2020년 대선 경선에서 초반에 고전했지만, 네번째 경선지인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 흑인 유권자의 압도적 지지를 받아 분위기를 반전시켰고, 결국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임기가 3년여 지난 현재 바이든 대통령에 대한 흑인 유권자 지지도는 급격히 떨어졌다. 지난해 11~12월 AP통신과 시카고대 여론연구센터(NORC) 여론조사에서 흑인 성인 50%만이 바이든 대통령을 지지했다. 이는 2021년 7월 조사 때의 86%과 비교해 36%포인트 급락했다.
당시 조사에서 전체 민주당원 중 절반 정도가 이번 대선에 바이든이 다시 출마하기를 원한다고 답했고, 이들 중 81%는 바이든이 후보가 된다면 ‘반드시’ 또는 ‘아마도 지지할 것’이라고 답했다. 그러나 흑인 유권자들의 ‘열정’은 더 낮았다. 이들의 41%만이 바이든의 출마를 원한다고 답했고, 불과 55% 만 대선에서 그를 지지할 가능성이 있다고 답했다.
AP는 “바이든 지지층의 핵심을 형성하고 있는 흑인 유권자들의 지지율은 이번 대선 승패의 핵심”이라며 “조지아, 미시간, 위스콘신 등 가장 경쟁이 치열하게 벌어지는 경합 주에서 이들의 지지율을 많이 잃게 될 경우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했다.
바이든은 최근 흑인층 지지율이 대폭 하락하자 이들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비상이 걸렸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달 초 총기사고가 났던 사우스캐롤라이나 흑인 교회를 찾아 백인우월주의를 비판한 데 이어, 지난달 27일에도 같은 주의 흑인 이발소를 찾아가 대화를 나눴다. NBC 뉴스는 “바이든 캠프는 최초의 흑인 대통령 버락 오바마, 흑인 유권자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던 빌 클린턴 전 대통령과 함께 기금 모금 행사도 준비하고 있다”고 전했다.
◇흑인층 연령따라 갈려…젊은 층 “경제난 불만” 노년층 “민주주의 수호해야”
무엇이 전통적으로 민주당을 지지해왔던 흑인 유권자들 상당 수를 등 돌리게 만들었을까. 사우스캐롤라이나 프라이머리를 하루 앞두고 컬럼비아·렉싱턴·오렌지버그 등 도심과 외곽 지역의 민주당 지지자들을 만나본 결과 연령대별로 바이든에 대한 호감도는 확연히 차이가 났다. 주로 50~70년 중년층은 바이든에 대한 지지세가 확고한 반면, 20~40대 청년층에선 주로 경제 문제 등으로‘바이든 이탈’ 조짐이 감지됐다.
이날 사우스캐롤라이나 주립대에서 만난 졸업반 학생 코리 코트니(22)는 “바이든의 공약이 이뤄지지 않은 것들이 많다. 실망했다”고 했다. 그는 학사 학자금 대출을 탕감받는 것이 최우선 과제다. 학자금 대출 탕감은 바이든 대통령이 ‘대선 공약’으로 내걸어 임기 초부터 최우선 사안으로 추진해왔던 사안이다. 그러나 연방대법원이 작년 6월 “행정부가 이런 막대한 자금(4300억달러·575조5500억원)에 대한 대출 탕감을 할 권한이 없다”며 제동을 걸면서 암초를 만났다. 바이든 행정부는 이후로도 탕감 규모를 대폭 줄인 후속 대책을 발표하고 있지만, 까다로운 파산 증명 절차 등으로 대출 탕감 승인이 난 경우가 많지 않다는 불만이 거세다.
코트니는 “정부가 열심히 한다는 건 알고 있다”면서도 “과연 우리가 믿었던만큼 제대로 일을 해냈는 지는 모르겠다”고 했다.
이 학교 3학션 숀 드숀(22)은 “나는 정치는 전혀 모른다. 다만 요새 물가가 많이 오르고 학자금도 많이 올라 부모님이 걱정이 많다”고 했다. 다만 그는 “바이든 대통령에게 아쉬운 점이 있어도 우리는 다른 사람을 뽑는 건 생각하기 어렵다”며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을 어떻게 뽑겠느냐”고 했다.
렉싱턴 시내에서 만난 토니 보우(45)씨는 “고금리로 집을 사기가 너무 어려워졌다. 물가도 올랐다”며 “바이든 대통령은 좋은 사람이지만 먹고 사는 게 좀 더 나아졌으면 좋겠다”고 했다.
반면 로버트 존슨(60) 목사는 “교육을 중시하고, 평등을 중시하고 배려심 있는 바이든 대통령이 우리가 뽑아야 할 사람”이라며 “그가 아니면 누가 민주주의를 수호할 수 있겠느냐”고 했다. 그는 “일부 젊은 층에서 바이든 지지율이 떨어지는 현상을 알고 있지만, 공화당 후보가 정해지면(트럼프) 이 젊은 층들이 누구를 뽑는 게 자신들의 이익에 맞는 것인지를 깨닫게 될 것”이라고 했다.
작년 중반부터 바이든과 해리스는 물론 마르시아 퍼지 주택·도시개발부 장관, 로이드 오스틴 국방부 장관 등이 플로리다주 탤러해시의 플로리다 A&M 대학과 노스캐롤라이나주의 페이엇빌 주립대학에서 각각 졸업 연설을 한 것도 흑인 2030들의 민심 이반을 막기 위한 전략이라는 분석이다.
이날 사우스캐롤라이나 주도 컬럼비아 지역에서 만난 흑인 유권자들 상당 수는 “바이든 행정부가 민간인 수천명이 희생된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이스라엘 공격이 중단되도록 당장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했다. 미국 노예제의 중심에 있었던 사우스캐롤라이나 사회에서 평생 인종 차별을 받아왔던 흑인들이 팔레스타인 난민들에 대해 강한 연대감을 느끼는 것으로 보였다. 컬럼비아 도심 지역 렉싱턴에 마련된 사전투표장에서 만난 토니 부톤(71)씨는 “이스라엘과 하마스간 전쟁에서 죄없는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고통받는 것이 남일 같지 않다”며 “왜 바이든 행정부가 죄 없이 피해받고 억압받는 사람들의 고통을 외면하는지 모르겠다. 참모들이 바이든을 잘못 이끌고 있다”고 했다. 50대 제이크씨는 “이스라엘이 민간인을 학살하고 있는데 바이든 대통령이 ‘전적인 지지’를 보낸다고 말하는 건 소수 민족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걸로 보인다”고 했다.
바이든 행정부는 흑인층의 동요를 의식한 듯 전날 요르단강 서안에서 팔레스타인 주민에게 폭력을 행사한 이스라엘인을 제재하도록 하는 내용의 행정 명령을 추가로 내렸다.
◇트럼프 ‘정면 저격’한 해리스
한편 해리스 부통령은 이날 연설에서 “트럼프의 ‘싸움’은 국민을 위한 게 아니다. 그는 자신을 위해 싸운다”며 트럼프를 직격했다. 해리스는 “트럼프는 자신이 ‘로 대 웨이드(여성의 낙태할 권리를 연방 차원에서 인정한 1973년 1월 22일 대법원 판결)’를 뒤집은 것이 자랑스럽다고 공공연하게 말한다”며 “수백만 명의 미국 여성으로부터 ‘선택의 자유’를 빼앗은 게 자랑스럽다고 한다”고 했다. 이어 “수년 동안 트럼프 전 대통령은 자신의 권력과 정치 게임을 위해 증오와 편견, 인종차별과 외국인 혐오의 불을 지폈다”며 “그는 이민자들이 우리 민족의 피를 오염시키고 있다고 비난했다”고 했다. 이어 “트럼프는 (김정은·푸틴·시진핑 등) 독재자에 대한 존경심을 공개적으로 이야기하고 취임 첫날부터 독재자가 되겠다고 맹세했다”고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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