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러 골목’에 산뜻한 벽화…퇴색해서 오히려 정겨워라 [ESC]
경기 파주 옛도심
경기도 파주에 10년 넘게 살고 있다. ‘제2의 고향’이라고 하기엔 아직 좀 어색한 부분이 있지만 그럭저럭 정이 들었다. 까마득한 남쪽 경남 김해 출신인 내가 어쩌다 먼먼 북쪽 파주까지 와서 살게 됐을까.
서울에서 볼일을 보고 자유로를 따라 파주로 돌아오는 길, 커다랗게 저물어가는 붉은 해를 보며 ‘삶은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말을 실감하곤 한다. 전자공학도였던 친구는 무역회사 사장이 됐고, 축산을 전공했던 친구는 금형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문학을 전공했던 나는 카메라를 들고 유랑하는 여행작가가 됐다. 우리의 삶은 뜻밖의 일들의 연속이다. 뜻밖의 곳에서 뜻밖의 사람을 만나, 뜻밖의 기회를 얻어, 뜻밖의 삶을 살아간다. 나는 어쩌다 이곳 파주에서 살게 됐을까.
‘뜻밖의 도시’엔 석불·대형카페가
파주라는 ‘뜻밖의 도시’를 나는 가끔 여행하곤 한다. 보광사에 가서 대웅전 앞마당을 걸을 때도 있고, 용미리 석불을 올려다보며 무언가를 빌 때도 있다. 보광사는 퇴색한 단청이 고풍스러운 절이다. 대웅보전 편액은 영조의 친필로 알려져 있다. 보광사 근처에 용미리 석불이 있다. 고려 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석불로, 천연암벽을 몸체로 하고 그 위에 목·얼굴·갓을 조각해 얹어놓았다. 파주에는 요즘 유행하는 대형 카페들이 많다. 약 5000㎡(1500평)의 실내를 온갖 식물들이 가득 채우고 있는 카페도 있고 화려한 색감을 자랑하는 도넛 카페도 있다. 떠들썩한 이 카페에서 노트북을 켜고 원고 작업을 할 때도 있다.
가끔 구도심으로 차를 몬다. 교하와 운정신도시에서 쭈욱 살고 있는 내겐 문산이며 법원·파평·조리·광산이라는 지명들이 여전히 낯설다. 오히려 합정과 을지로·종로·압구정이 더 친숙하다. 지명만큼이나 풍경도 신산하게 다가온다. 한때의 번성이 사라지고 약간은 을씨년스럽고, 조금은 퇴색한 풍경으로 남아 있는 것처럼 보이는 곳. 차를 몰고 이곳을 지날 때마다 내가 사는 파주와는 너무나 다른 풍경에 여행을 떠나 온 기분을 느낀다. 뭐라고 할까, 여행과 일상이 서로 스며들고 섞여 있는 느낌이랄까. 국수 한 그릇을 먹고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임진강으로 지는 노을 볼 때면 ‘파주 한 달 살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지난주에는 연풍리라는 곳을 찾았다. 며칠 동안 기승을 부리던 한파가 물러가고 걸을 만한 날씨였다. 어깨에 닿는 햇살이 따뜻했다. 어디를 가볼까. 지도앱을 켜고 파주 이곳 저곳을 살펴보다가 ‘연풍리’라는 예쁜 지명이 눈에 띄었다. 집에서 20㎞가 채 되지 않았다. 연풍리는 ‘연달아 풍년이 드는 곳’이라는 뜻이란다. 마을을 흐르는 갈곡천과 삼방리 쪽에서 내려오는 물이 언제나 농사를 잘되게 해준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마을 입구 주차장에 차를 댔다. ‘EBS연풍경원’이 있는데, 뽀로로와 방귀대장 뿡뿡이 등 교육방송(EBS)의 대표 캐릭터들을 한 자리에 모아 놓은 작은 공원이다. 공원에는 미끄럼틀과 그네를 타며 뛰어노는 아이들이 몇 보였다. 아이들 노는 모습을 보며 몇 걸음을 옮기니 마을길이 나온다. 길 앞으로는 개천이 흐른다. 겨울바람이 무심히 갈대를 흔들고 간다. 햇볕이 잘 드는 자리에 놓인 평상에서는 노인 두 분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파주는 한국전쟁 이후 대규모 미군부대와 휴양시설이 들어선 곳이다. 파주군이었을 당시 11개 읍면에 모두 기지촌이 들어섰다. 국내에서 기지촌이 가장 많았다. 연풍리 역시 1960~70년대만 해도 마을 전체에 미군클럽을 비롯해 각종 미군 상대 업소들로 즐비할 정도로 번성했다. 하지만 1980년대 미군기지가 동두천으로 옮겨 가면서 마을은 급격히 쇠락한다. 연풍리에 ‘연다라 문화거리’라는 곳이 있는데, 빈 업소들을 문화시설로 다시 꾸민 곳이다.
개천을 오른쪽에 두고 마을길을 따라 천천히 걷는다. 마을 사람들은 ‘뚝방길’이라고 부른다. 길 왼편으로 자리한 집들의 슬레이트 지붕은 낮다. 마을은 텅 빈 영화세트장처럼 고요하다. 대문은 금방 칠한 것처럼 색이 선명하다. 지금까지 벽화마을을 많이 보았지만, 이곳 연풍마을이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든다. 지금까지 오직 벽화를 그려야 한다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담벼락마다 벽화를 그려 넣은 마을을 자주 보았다. 대부분 비슷한 그림이었고, 대부분 지루했다. 그런데 이곳 연풍마을의 벽화는 지금까지 보아왔던 것과는 조금 다르다. 노란색과 초록색·파란색으로만 칠한 집들은 보기만 해도 마음이 산뜻해진다.
이곳에 사는 주민들은 매일 보는 풍경이라 어느 것 하나 특별하지 않겠지만, 나는 여행자라서 모든 것이 새롭고 신선하게 보인다. 카피라이터 박웅현씨가 이렇게 말했다. “파리가 아름다운 것은 여행 중이니까. 사흘밖에 보지 못하기 때문에 아름다움이 더 크다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일상에서 견문을 넓히고 감동을 받기 위해서는 안테나를 세우고 살아야 하는데, 그러려면 이 삶이 여행지다라고 생각하는 겁니다.”(그의 저서 ’여덟 단어’)
문화극장·화신약국·뉴서울클럽…
나는 여행작가라는 직업을 약간은 지긋지긋하게 생각하고 있지만, 그래도 가끔 이 직업을 갖게 된 것에 대해 감사할 때가 있다. 내가 경험하는 대부분의 것들을 아름답게 볼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나는 이것을 두고 ‘여행자의 시선’이라고 이름 붙였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저마다 각자의 시선을 가지고 살아간다. 사업가에겐 사업가의 시선으로, 고고학자는 고고학자의 시선으로, 화가는 화가의 시선으로 이 세상을 본다.
십수년 전, 라오스 루앙프라방을 여행하다가 나는 앞으로 여행자의 시선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며 살아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타인의 생활에 너무 깊숙이 개입하지 않는 시선, 내게 온 우연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시선, 되도록이면 이 세상을 낭만적으로 해석하는 시선…. 그 정도면 이 세상을 그럭저럭 아름답게 느끼며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떤 이는 이런 내게 무책임한 것이 아닐까, 하고 뭐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나라는 인간이 원래 그런 인간인데 어쩌겠습니까, 하고 그냥 어물쩍 넘기고 만다. 이제는 싸워 봐야 서로의 생각을 바꿀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다. 논쟁을 하면 서로의 감정만 상할 뿐이다. 내 생각을 말할 뿐이지 누군가를 설득하려는 시도는 괜한 에너지 낭비일 때가 많다. 누군가 내 생각이 틀렸다는 식으로 말하면 그 말이 맞다고 하고 슬그머니 빠져나온다.
길바닥에는 사방치기를 비롯해 갖가지 놀이를 할 수 있는 재미난 그림들이 있다. 42년 전, 그러니까 내가 10살 때만 해도 이런 놀이를 하며 오후 시간을 보냈다. 스마트폰도 닌텐도도 없었다. 해가 질 무렵, 골목 어디선가 “집에 와서 밥 먹어!” 하는 소리가 들리면 우리는 하나둘씩 각자의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쯤이면 집집마다 굴뚝에 새하얀 연기를 피워올리곤 했다. 문득 자신이 늙었음을 깨닫는 순간이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처음 흰머리를 발견했을 때일 수도 있고, 감기가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는 걸 느낄 때일 수도 있다. 아마도 어떤 풍경 앞에서 아득한 옛일을 떠올리거나 더 이상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도 자신이 늙었다는 것을 깨달을 때가 아닐까 싶다. 나는 어디선가 어머니의 “밥 먹고 놀아”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서쪽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연다라 문화거리에는 볼 것이 많다. 옛 골목의 정취를 그대로 담은 다정한 벽화가 그려져 있어 발걸음을 느리게 한다. 이 골목은 한때 ‘달러 골목’으로 불리기도 했다.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어마어마한 양의 달러가 유통됐기 때문이다. 아침에 청소하던 사람들이 골목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달러를 쉽게 주울 수 있었다고 한다. 이곳의 ‘지나가는 개’는 ‘만원짜리 지폐’가 아니라 ‘달러’를 물고 다녔다. 마을은 작았지만 돈이 돌면서 집 옆에 새 집이 붙고, 또 집이 붙고 하면서 커졌다. 지금이야 시골마을의 가게 같지만, 1962년 개관한 문화극장은 서울을 제외하고 수도권에서 가장 먼저 생긴 극장이었다. 미군 위문공연 등이 이루어졌다. 화신약국은 파주 최고의 약국이었고, 대광상회는 뒤로 빼돌린 미제물건을 팔았다. 평화의원은 지금은 할머니 경로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뉴서울클럽과 대광이발소 등이 그 시절 번성을 가늠하게 한다. 옛 상점 곳곳은 현재는 공방과 전시실 등으로 문을 열고 있다. 무인문방구도 있다. 쫀드기와 같은 불량식품도 팔고 ‘철권’을 해볼 수 있는 오락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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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책선 앞에서 라떼 한잔
파주는 참 묘한 도시다. 신도심에는 젊은 부부들이 많이 산다. 출판단지가 있어 에디터와 작가들도 많이 살고 있다. 구도심에는 옛 도시 풍경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실향민들도 있고 이주노동자도 많다. 온갖 문화가 어우러진 곳이 파주다. 그래서 파주에 가면 약간은 ‘이상한’ 여행을 해볼 수 있다. 베트남 쌀국수도 먹을 수 있고 천년고찰도 있다. 요즘 유행하는 출렁다리도 있다. 출판단지에서는 세계적인 거장의 건축물도 만날 수 있다.
다양한 음식도 맛볼 수 있다. 구시가에도 맛있는 집이 많다. 아주 오래된 부대찌개집이 있는데 특이하게 쑥갓이 들어간다. 맛이 한결 개운하다. 금촌시장에는 베트남 며느리가 운영하는 쌀국수집이 있다. 양념한 돼지고기를 밥에 올려 먹는 껌스언느엉과 곱창볶음인 롱파라우, 족발쌀국수인 분리오후에 등이 있는데, 베트남에서 먹던 딱 그 맛이다. 문산에는 노부부가 운영하는 아주 오래된 중국집이 있다. 새알처럼 생긴 난자완스와 군만두가 맛있다. 걷다 보니 배가 출출하다. 점심은 돼지갈비다. ‘단골집’은 연탄에 구운 돼지갈비를 맛볼 수 있는 곳이다. 고기에 배어 있는 은은한 불향이 좋다. 이 집의 ‘오징어초무침’도 별미. 깻잎에 싸먹으면 맛있다.
돼지갈비를 먹고 연풍마을을 나와 자유로를 타고 끝까지 간다. 그렇게 닿는 곳은 임진각이다. 이곳 철책선 앞에 통유리로 된 카페가 있다. 유리상자 같은 심플한 건물은 철책선 앞에 보초처럼 우두커니 서 있다. 실내는 미니멀하다. 커다란 탁자와 벤치 두 개가 전부다. 딴짓하지 말고 커피를 마시며 열심히 창밖이나 내다보라는 카페의 친절한 배려가 아닐까. 이 집은 라떼가 맛있다. 부드러운 라떼를 마시며 철책 너머를 바라본다.
오늘은 뜻밖의 여행을 했다. 나쁘지 않은 여행이었다. 별 기대 없이 나선 길이었는데 예상외로 좋은 시간을 보냈다. 삶은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듯, 여행도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는다. 중2 때의 꿈으로 사는 사람이 없듯, 애초에 설계한 경로대로 여행하는 사람은 드물다. 어제의 실수가 오늘 뜻밖의 결과가 될 수도 있고, 어제의 고통이 오늘의 기쁨이 될 수도 있다. 이 예측할 수 없음이 우리의 삶을 어딘가로 데리고 간다. 여행도 마찬가지다. 작은 호기심에 문득 나선 문밖이 새로움으로 가득한 들판으로 펼쳐질 줄 누가 알겠는가. 그러니 일희일비하지 마시길. 그게 삶이고 여행이라 여기며 덤덤히 문을 나서 보시길. 희로애락이 모두 삶이고 여행일 것이니 말이다.
연풍마을 인근 맛집들
단골집(031-952-4850) ‘진짜’ 돼지갈비를 맛볼 수 있는 곳. 예약은 필수다. 새콤달콤한 오징어초무침도 맛있다. 매장은 정오부터 오후 3시까지만 운영하고 이후에는 포장만 가능하다.
문산 덕성원(031-952-2230)은 화교 부부가 운영한다. 난자완스·고기튀김·간짜장이 맛있다. 광탄면 가는 길에 있는 뇌조리 국수집(031-946-2945)은 ‘갈쌈국수'로 유명하다. 잔치국수나 비빔국수를 불향이 지그시 배인 돼지고기와 함께 먹는다. 문산 읍내의 삼거리부대찌개(031-952-3431)는 50년 내공의 부대찌개집이다.
포비DMZ(070-7774-6552)는 임진각 평화누리공원 안에 있는 카페다. 임진각 평화누리 공원 주차장으로 들어가야 한다.
글·사진 최갑수 여행작가
시인이자 여행 작가다. 여행을 하고 글을 쓰고 사진을 찍는다. 지은 책으로는 ‘어제보다 나은 사람’, ‘음식은 맛있고 인생은 깊어갑니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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