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로 시작된 새 경험…삶의 연결선이 풍성해졌다
은퇴 이후 재발견
은퇴 전과는 다르게 살겠다는 생각에 저는 사외이사·초빙교수 자리를 다 그만두었습니다. 하지만 새 길은 뚜렷하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때 한겨레로부터 글을 써보면 어떠냐는 제안을 받았습니다. 학술 논문과 사업제안서만 쓰던 제가 할 수 없는 낯선 일이라 처음엔 거절했습니다. 청년에게 도움 되는 이야기를 쓸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은퇴한 사람의 사회적 책임 아니겠느냐는 끈질긴 설득이 이어졌습니다. 결국 저는 새로운 일에 도전하기로 했습니다. 처음엔 10시간 이상 글을 쓰며 몸살을 앓았지만 조금씩 나아졌습니다. 지인들과의 대화 속에서 글의 소재를 찾고 또 혼자 블로그를 만들어서 단상들을 수시로 메모한 덕분입니다. 독자들과 연결되는 즐거운 경험이 하나둘 쌓여갔습니다.
방송에 내 얼굴이 나온다는데…
최근 시사기획 창 ‘어떤 가족―고립을 넘다’의 출연도 칼럼이 출발이었습니다. “오랫동안 한겨레 칼럼을 통해서 선생님을 알아왔기에, 저는 이미 오랜 지인처럼 느껴집니다.” 지난해 11월 한국방송(KBS) 기자가 출연 요청 문자메시지를 보내왔습니다. 외로움 속에 살고 있는 청년·중년·노년을 인터뷰하고 내레이션까지 해달라는 제안이었지요. 또 망설였습니다. 지상파 방송에 내 얼굴이 나오는 것도 부담스럽고 무엇보다 전혀 해보지 않은 새로운 것을 한다는 게 자신 없었습니다. 며칠을 고민하다가 생각했습니다. ‘노년의 외로움을 감당하며 살고 있는 내가 다른 사람의 외로움 속으로 들어가볼 수 있다는 건 참 의미 있는 일 아닐까?’
‘외로움 연결로’, 그것은 어려서부터 경험하고 생각했던 제 오랜 삶의 화두이기도 하거든요. 이번에도 하기로 했습니다. ‘이 나이에 새로운 경험을 하는 건 행운’이라고 주문을 외우면서요. 그렇게 두달 반에 걸친 대장정(!)이 시작됐습니다.
첫 인터뷰 대상자는 서울 영등포 고시원에서 생활하는 50대 김태선씨였습니다. 제작팀이 꼼꼼히 취재해 넘겨준 그분의 생애사를 여러번 읽었습니다. 그래도 부담감이 몰려왔습니다. 나를 불편하게 느끼지 않을지, 어떻게 연결고리를 만들며 다가갈 수 있을지. 그분이 새벽 청소일을 하는 영등포문화원이 가까워지자, 영화 ‘아바타’의 주인공 제이크 설리를 바라보며 나비족 네이티리가 했던 말이 문득 떠올랐습니다. “아이 시 유!”(I see you, 내가 널 보고 있어) 그러니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그분의 존재를 내가 보고 느끼고 있다는 기운만 보내면 되겠구나, 그럼 나머지는 저절로 풀릴 거야.’ 굴곡진 삶을 살아온 김태선씨는 자신을 분명하게 표현하는, 참으로 정중하고, 품위를 가진 분이었습니다. 편안하게 맞아주셔서 감사하다는 마음이 일었습니다.
두번째로 청년 최성희씨를 만나며 저는 지방자치단체가 1인가구 지원센터를 운영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외형적 경제 발전 속에서 세대를 불문하고 늘어나는 1인가구를 지방정부가 나몰라라 하지 않고 지원한다는 게 다행스럽게 여겨졌습니다. 그러면서 최근 사회서비스원 등에 대한 예산이 삭감되었다는 소식이 생각났습니다. 양극화가 심해져 배제와 고립을 겪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좌절과 불안이 커지게 되면 기득권·부유층에게도 악영향을 미칠 텐데 어쩌려는 건지 걱정이 앞섰습니다.
혹독한 어린 시절을 보내고 가출한 뒤 그룹홈에 살면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에 진학한 청년 박인경씨. 그를 만나러 가면서 저는 여러해 전부터 인연을 맺어온 한 부부를 떠올렸습니다. 그분들은 20여년 전부터 그룹홈을 운영하고 자립준비청년들 주거를 돕는 사단법인을 만들었습니다. 그 인연이 박인경씨를 이해하는 데 조금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박인경씨는 케이크를 교재도구로 활용해 수업을 재밌게 하려고 제빵 학원까지 다닐 정도로 적극적이며, 솔직하고 긍정적인 청년이었습니다. 여러 좋은 분들로부터 긍정적인 영향을 받은 덕분이라고 말하는 그의 모습이 마음에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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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전해서 만날 수 있었던
광주광역시 청춘발산마을에서 만난 70대 신삼영씨는 촬영 전에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와 연배가 비슷한 동생분을 만나게 되겠구만. 나는 공부를 못 한 한이 많은데 미국 유학 다녀오셨다니 얘기 나눠보면 참 좋겠다.” 경로당 회장인 그를 만나면 “회장 형님!”이라고 인사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삼영 ‘형님’과는 카메라가 없는 곳에서도 얘기를 많이 나누었습니다. 형님은 힘들었던 어린 시절을 지나 검정고시로 고등학교를 마치고 50살에 재수 끝에 대학을 들어간, 당당하고 마음이 젊은 분이셨습니다.
청춘발산마을은 정말 특별했습니다. 과거 달동네 우범지대로 여겨졌던 이곳에 청년 사업가들이 자리잡고 만든 협동조합이 큰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원주민 노인들과 매일 점심을 경로당에서 함께 나누며 일상을 공유했습니다. 그야말로 청년과 노년이 어우러져 같이 일하고, 같이 노는 사회적 가족이 그곳에 있었습니다.
인터뷰한 분들 중에 가장 연장자인 80대 홍정자씨는 자녀와 재산이 없는 안타까운 처지지만 강원 원주시의 ‘사회적 처방’을 받고 경로당 회장으로 일하며 누구보다 열심히 사는 분이라고 제작진에게 전해 들었습니다. 촬영 전 “잘나고 배운 사람이 나를 만나 뭐 할 얘기가 있겠어?”라고 말씀하셨다기에 마음이 쓰였습니다. 정자씨는 평안북도가 고향이었습니다. 저희 외가도 평안북도라는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첫인사를 나누며 “평안도 억양이 반갑고 정겹습니다”라고 했더니 금세 표정이 밝아지셨습니다. 대화 중에는 몇번이고 “나는 배운 것이 없어서”라고 말씀하시더니, 친척들과 교류하지 않고 사는 이유가 “왜 혼자 사느냐, 시집 안 가느냐” 얘기를 듣기 싫어서라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저는 딸 얘기를 꺼냈습니다. “비혼인데 저는 지금까지 단 한번도 딸에게 결혼 얘기를 꺼낸 적이 없어요. 잘했지요?” 홍정자씨의 얼굴이 환해지면서 맞장구치셨습니다. “정말 잘했어요. 그런 소리 자꾸 하면 집에도 안 와요.” 깊고 큰 삶의 지혜가 느껴졌습니다.
전문가 좌담회에서도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청소년 계층에서 과도한 경쟁 문화가 외로움의 중요한 원인 중 하나”라는 최영준 연세대 교수의 말이 가슴 깊이 와닿았습니다. 그는 “(청소년들이) 어릴 때부터 사교육을 많이 받고 부모와 학교로부터 어떤 기대를 받으면서 삶의 다양한 선택지들을 받지 못하는 것”이라며 “다양한 삶의 경로가 있다는 것을, 기존의 경로를 벗어나서도 행복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가 받아들였으면 한다”고 했습니다.
글쓰기, 방송 출연 등 새로운 일에 도전하지 않았다면 만나지 못했을 사람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내 삶의 연결선들이 훨씬 풍요로워졌습니다. 특히 생전 처음 해본 내레이션에 대해 지인들이 좋은 피드백을 해줬습니다. 돌이켜보니 저는 고등학교 때 문예반에서 시를 썼고 음악 선생님의 눈에 띄어 교내 음악회에서 독창도 했었네요. 직업인이 되기 전 제가 갖고 있었던 재능이 은퇴 후에 재발견됐다는 느낌이 듭니다. 노화를 겪으면서도 그 안에서 성장한다는 것은 어쩌면 내가 나 자신과 다시 만나서 원래 내가 가졌던 관심, 호기심, 그리고 재주들을 되살려내고 그것들을 남들과 나누어야 가능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삶을 배우는 사람
2016년 엘지(LG) 인화원장으로 퇴임한 뒤 삶의 방향을 ‘느리고 조용히 심심하게’로 바꿨다. 은퇴와 노화를 함께 겪으며, 그 안에서 성장하는 삶을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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