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다리 자르지마" 지뢰 밟은 24살 군인…세계 최초 '태권도 7단'

남형도 기자 2024. 2. 3.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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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의족 장애인으로 처음 '태권도 7단' 경지 도달한 김형배씨(65)
1983년, 제대 한 달 남기고 비무장지대 수색 중 지뢰 폭발, 왼쪽 다리 자르고 '의족' 달아
막막함에 3년 동안 술만 마셔, 마흔 살에 태권도 다시 시작 후 '태권도 7단' 승단, 마라톤 풀코스도 완주
"인간은 훈련을 통해 만들어진다는 걸 느낍니다"
비무장지대 최전방을 지키던 군인이 우연히 지뢰를 밟았다. 왼쪽 다리는 의족이 됐다. 원래 태권도 사범이 꿈이었던 김형배씨(65)는, 의족을 찬 발을 들어올렸다. 도복을 입고 높은 각도로 발차기를 뻗었다. 그는 누군가의 '처음'이 되고 있다. 그러기 위해 수십년간 역무원으로 일하면서도, 하루 300번씩 발차기를 했다./사진=김형배씨 제공

"내 다리, 다리는 자르면 안 됩니다. 절대 안 됩니다."

1983년, 강원도 철원 최전방서 근무하던 군인이 고래고래 소릴 지르고 있었다. 군인은 당시 24살이었고 병장이었다. 응급 이송을 위해 서울로 가는 헬기에 탄 뒤로는 정신을 잃었다.

비무장지대 수색을 하다 지뢰를 밟은 거였다. 군대 말년이니 훈련도 빼준다는데, 가만히 있어 뭐 하겠느냐며 나갔던 훈련. 쾅 소리와 함께 지뢰가 폭발하며, 그의 왼쪽 무릎 아래가 날아갔다. 그 순간에도 군인은 북한과 교전이 벌어졌나 생각했다. 자신이 아픈 것도 잊은 채.

최전방에서 근무하던 군대 시절 김형배씨 모습./사진=김형배씨 제공

주변에서 뛰어와 다릴 묶었다. 언뜻 보니 다리가 너덜너덜했다. 앞날이 창창했던 청년은 엄마 생각밖에 안 났다. 아들 면회 한 번 오기도 어려울 만큼 외진, 진주 시골에서 고생하며 농사짓는 엄마. 억장이 무너졌다.

헬기 타고 도착한 곳은 서울 수도통합병원(현 국군수도병원). 거기서 군의관이 다릴 잘라야 한다고 할 때, 다친 군인은 무의식중에도 안 된다고 필사적으로 거부했다. 군인은 엄마 생각을 했다. 엄마에게 절대 연락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제대하기까지 한 달. 그 시간 안에 회복해 나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42년이 흘러, 텅 빈 태권도장에 의자 두 개를 놓고 앉아 듣던 얘기는 그리 애달팠다. 그때의 그 군인, 김형배씨(65). 나이보다 한참 젊어 보이던 맑은 얼굴, 기합 소리에서 뿜어져 나오던 기운, 손님을 맞으려 말끔하게 정장을 차려입은 사람.

왼쪽 다리에 '의족'을 끼우고, 20년을 넘게 태권도를 수련해 '7단'이란 경지까지 오른 형배씨. 그를 만나러 부산에 와 있었다.

태권도 도장서 아이들 가르치는 게 좋아…그게 꿈이었었다
군대에 있을 당시 김형배씨 모습./사진-김형배씨 제공
"태권도를 좋아해서, 가르치는데 취미가 좀 있더라고요. 애들 가르치는 게 행복했어요."

군대에 가기 전 꿈은 '태권도 사범'이었단다. 3단까지 따서, 도장에서 아이들을 가르쳤었다. 한 번은 '원술랑' 연극 대본을 구해 연습시키기도 했다. 분장도 하고 무술 영화처럼 선보이기도 했다. 부모님들 반응이 너무 좋았다며, 형배씨가 해맑게 웃었다. 그 당시 청년의 표정이 잠시 떠올랐다.

입대를 위해 신체검사를 했다. 키가 160㎝ 정도로 왜소한 편이었다. 최전방 철책 경계를 서는 부대에 갔다. 형배씨가 수색대에 배치되자, 소대장이 의아해했다. 덩치도 작고 몸도 약한데, 명단이 뭔가 잘못된 것 같다고. 되돌려보내려 했다.

그때 이등병 형배씨는 원초적인 뭔가가 속에서 끓어올랐다. 저도 모르게 외쳤다.

군대에 있을 당시 김형배씨 모습./사진-김형배씨 제공

"수색대에 근무하고 싶습니다!"

말이 끝나자마자 뺨을 맞았다. 돌아가라면 돌아갈 것이지 말대꾸한다고. 그러니 오기가 생겨 눈물이 확 쏟아졌다. 수색대에 근무하고 싶다고 반복해서 외쳤다. 강단 있는 형배씨를 멀리서 본 중대장이 눈여겨봐서, 수색대에 근무하게 됐다.

훈련은 생각보다 더 고됐다. 50㎏ 몸무게에 10㎏ 완전 군장을 하고, 아침저녁으로 구보를 10㎞씩 했다. 형배씨는 뛰기 힘들어 "내 좀 죽여주십시오"를 외치며 끌려오다시피 견뎠다. 옆에 덩치 큰 선배 하나도 입에 흰 거품을 물고 정신을 잃었다. 그리 버티며 한두 달이 지나자 어느 샌가부터 몸이 가뿐해졌다. "인간은 진짜, 훈련하면서 만들어진다." 그걸 배웠다.

지뢰 사고로 '의족' 끼우고…3년을 술 먹고 방황, 죽고 싶었다
인터뷰를 하던 도중 찍은 형배씨의 다리. 왼쪽 무릎 아래 부분이 의족이다./사진=남형도 기자
비무장지대. 최전방에서 북한을 바라보면 시골 노인이 소 몰고 농사짓는 것까지 보일 만큼 가까웠던 곳. 경계 근무하다, 깨진 철모를 보며 까까머리 학도병이 우는 모습을 떠올리며, 상념에 잠기기도 했던 그 곳. 그 곳에서 지뢰가 터졌고, 그걸 밟은 게 하필 형배씨였고, 피투성이가 된 채 병원으로 가게 되었다.

계절도 하필 한여름이었다. 다친 다리가 썩어들어 갔다. 간호사가 세숫대야에 알코올을 받아 왔다. 형배씨 입엔 수건을 물렸다. 하루 한 번 드레싱을 할 때마다 고통에 몸부림쳤다. 1년, 2년씩 병실 생활을 하는 이들을 보며 형배씨는 포기했다. 보름을 치료하고 다릴 자르기로 결정했다.

수술에 동의가 필요해 부모님에게 연락했다. 전화도 없을 때라 '생명 위독'이라고 전보를 쳤다. 형배씨 어머니는 보리타작하다 말고 올라와, 병원에서 울기만 했다. 군의관 말대로 왼쪽 무릎 아래는 잘라내는 수술을 했다. '의족'을 맞춰 끼우기로 했다.

통증은 사라졌으나 절망이 차올랐다. 내가 미친 짓을 했구나 싶어 매일 자책했다. 예전에 다녔던 체육관은 근처도 못 갔다.

기분 좋은 웃음을 지녔으나, 태권도복을 입으면 눈빛부터 달라진다./사진=남형도 기자

"인연을 다 끊어버렸지요. 내 마음이 완전히 피폐해졌어요. 태권도도 못하지, 이제 앞으로 뭘 하며 살아가야 하나. 낙심을 엄청나게 했어요."

3년은 술을 먹고 방황했다. 죽고 싶을 때도 있었다. 그 와중에 소중한 경험 하나가 떠올랐다.

형배씨가 병원에 있을 때, 초등학생들 위문편지에 정성껏 답장을 해준 적이 있었다. 그때 2명이 면회를 와서 노래도 불러주고, 율동도 해줬단다. 그는 그때 마냥 행복했다. 다릴 다쳤기에 또 이런 행복한 경험을 할 수 있는 거라고, 아무 의미가 없는 게 아니라고. 그리 또 희망을 품었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 죽으려고 결심까지 했을 때마다 어머니를 생각했단다. 내가 없으면 우리 어머니가 어떻게 살아가겠나, 그게 또 힘이 되었다.

마흔살에 '태권도' 다시 시작…중심 안 잡혀 포기하고 싶었지만
얼마나 많이 포기하고 싶었을지, 또 얼마나 많이 그걸 넘어서 또 도장으로 향했을지. 짐작하기 어려운 시간들./사진=김형배씨 제공
형배씨는 방황을 마치고 대학에 들어가 졸업했다. 부산 지하철 역무원으로 일했다. 당시엔 잡상인이 많아 단속도 잦았다.

하루는 퇴근하던 길에 잡상인을 보고 "여기서 이러면 안 됩니다. 다음 역에서 내리세요"라고 단속했다. 덩치 큰 이가 욕설하며 형배씨에게 달려들었다. 마침 지나가던 직원 도움으로 겨우 제압했다.

일터에서 이리 자존심 상했던 경험들이 있었다. 형배씨는 태권도를 다시 배워야겠다 마음먹었다. 동네 체육관에 가서 상담하니 열쇠를 주며 "편하게 와서 언제든 운동해도 좋다"고 했다.

형배씨의 발차기. 빠른 속도가 주특기다./사진=김형배씨 제공

워낙 오랜만에 입은 도복이었다. 발차기 등을 해봤으나 의족 때문에 중심 잡기도 힘들었다. 포기하고 싶었다. 포기하고픈 맘을 잡은 건 외려 '비참함'이었다. 포기하는 게 더 부끄러워서. 그냥 되든 안 되든 꾸준하게만 했다. 하다 보니 어느 순간에 '좀 된다'는 느낌을 받았다.

당시 부산에서 제일 잘 가르친단 태권도 감독을 찾아갔다. 사정을 얘기하고, 전문적으로 훈련 받고 싶다고 했다. 젊은이들과 앞차기, 돌려차기 등을 하며 훈련했다. 도저히 따라가기가 힘들었다.

"그날 버스 타고 집에 오는데 너무 쪽팔리더라고요. 근데 내일 안 나가려니 그것도 할 짓이 아닌 거라. 그만두라고 할 때까지 다녀보자, 그랬지요."

석 달 지나자 '뻥' 하고 들어가…하루도 안 거른 '발차기 300번' 훈련
승급 심사 중 겨루기를 하고 있는 형배씨./사진=김형배씨 제공
의족이 있는 발은 중심 잡기 힘든 한계. 포기와 부끄러움을 넘어 석 달이란 시간이 흘렀다. 그때까지 형배씨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발차기를 300번씩 했다. 훈련을 멈추지 않았다. 운동을 잘하기 위해 마라톤 풀코스도 수차례씩 뛰었다.

어느 날엔가, 형배씨와 다른 사람이 '겨루기'를 할 때였다. 그 전엔 한 번도 발차기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형배씨가 자리에서 일어나 동작까지 취해가며, 신난 표정으로 이리 말했다.

"딱 이러면서 발로 딱 때려버리니까 '빵' 하는 소리가 나는 거예요. 그때 느낌이 딱 오더라고요. 그래서 '이제 됐구나' 싶었지요. 그때부터는 운동이 재밌더라고요."

젊은이들과 뒹굴고 훈련하고 그러면서 2002년 전국 체전 부산시 선발전(일반부)에 나가 준우승까지 했다. '의족 태권왕'이라 해서, 지역 신문에도 크게 났단다.

24살까지 태권도 3단. 왼쪽 다리에 의족을 끼운 뒤 16년간 사라졌던 태권도 사범의 꿈. 형배씨는 이제, 4단 승단 심사에 도전했고, 비로소 따냈다.

태권도 공인 9단도 "발차기 엄청나게 빨라, 잘한다"…세계 최초 '의족 태권왕' 기네스 도전
태권도 자세를 취한 채 환히 웃어보였던 형배씨. 넉넉한 표정과 묵직하게 울리는 기합이, 묘하게 어우러져 좋은 기운이 전해져왔다./사진=태권도 파란띠까지 하고 그만둔 남형도 기자
4단에서 5단으로 가려면 4년, 5단에서 6단으로 가려면 5년, 6단에서 7단으로 가려면 6년이 걸린단다. 옆에서 인터뷰를 듣고 있던, 송화수 동아대부산태권도체육관 관장(공인 9단)에게 물었다. 단수를 넘어가는 게, 어떤 게 제일 힘드냐고. 그가 대답했다.

"체육관 하는 사람은 계속 운동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관리가 엄청 힘들거든요. 1년에 1㎝씩 발차기 높이가 떨어진다고 해요. 40년이면 40㎝잖아요. 그걸 유지하기 위해선 엄청 해야 하는 거지요."

그리 태권도 7단을 땄다. 6단에서 7단으로 올라가는 데 성공하는 비율은 0.1%에 불과하다.

제일 힘들었던 건 훈련할 때 중심이 잘 안 잡혔던 것. 옛날엔 의족도 좋지 않아 통증이 심하고 상처가 났다. 상처 나고, 아물고, 또 훈련하고, 그리 오래 하다 보니 아예 굳은살이 됐다. 송 관장은 형배씨를 보며 "태권도 심사를 볼 때 보는 게 있는데, 형배씨는 비장애인보다도 발차기도 빠르고 더 잘한다. 평균 60점이면 합격, 그것도 나오기 힘든데, 형배씨는 냉정하게 심사해도 60점이 나온다"고 했다.

막기 자세를 취해보이는 김형배 7단./사진=김형배씨 제공

지하철 역무원을 은퇴한 뒤 형배씨는 개인택시를 하고 있다. 가끔은 대학생 등 젊은이들을 태울 때도 있다.

"의족을 차고 태권도 7단이라고 하면 놀래요. 살아온 얘길 쭉 해주지요. 자신감도 없고 힘들어하는 친구들이 많잖아요. 좋은 영향을 미치는 거지요."

공인 7단 인증서를 받아들고 환히 웃는 김형배씨./사진=김형배씨 제공

기네스북은 특별하고 대단한 사람만 하는 건 줄 알았다던 형배씨. 의족 장애인이 태권도 7단까지 딴 사례는 없다고 해, 기네스북에도 도전하고 있다. 그 또한 쉽지 않은 일. 왜 하필 기네스 도전일까. 형배씨가 웃으며 이리 말했다.

"대한민국 상이군인(전투나 군사 공무 중 몸을 다친 군인)이 이 정도는 한다, 그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하하."

잘 되든, 안 되든, 그냥 꾸준히 하는 것. 때론 대단한 비결보다 단순한 우직함이 더 크게 나아가게 하는 힘일 거라고./사진=남형도 기자

그리고 이리 덧붙였다.

"제가 다리 다쳤을 때 태권도를 하는 사람이 있었으면, 그 사람을 보고 했을 거예요. 그런데 없어서 더 힘들었거든요. 그러니 태권도를 하는 것도 약간 사명감 같은 게 생깁니다. 제가 '처음'이 되면, 누군가가 저를 보고 힘을 낼 테니까요."

요즘은 택시 기사가 된 김형배씨의 택시를 탔다는 이가 남긴 글. /사진=유튜브 화면 캡쳐

에필로그(epilogue).

"어제 정말 너무 지쳐서 집에 가는데 택시가 안 잡혀 서럽기까지 하더라고요. 어렵게 잡은 택시 기사님이 영상의 주인공이신 김형배님이셨어요."

'세상에 이런 일이'에 출연한 영상에 남겨져 있던 댓글 하나. 추웠다고 힘들었다고 푸념했을 때 "한 달 된 새 차입니다. 이제 집까지 편안하게 모실게요"라고 말할 줄 아는 사람. 그게 승객 마음에 큰 위로와 힘이 되었단다.

택시 기사가 된 뒤에도 위안을 주는 사람. 다리가 의족이든 아니든, 형배씨는 변함없이 좋은 삶이었을 거다. 내 안의 본질이 변하는 게 아니므로.

그러니 이 글도, 불행을 겪었던 누군가 이야기로 위로를 삼길 바라는 게 아니라, 세상엔 다양한 삶이 있고, 누구든 우연히 소수가 될 수 있고, 그 모든 게 존귀하며, 글을 읽는 이들 역시 그렇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서 썼다. 그러나 형배씨 삶엔 이런 의미가 더 있다고 말해주고 싶다. 좋아하는 책의 문장을 옮긴다.

나와 닮은 누군가가 등불을 들고 내 앞에서 걸어주고, 내가 발을 디딜 곳이 허공이 아니라는 사실만이라도 알려주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사라지지 않고 계속 나아갈 수 있다는 걸 알려주는 빛. 그런 빛을 좇고 싶었는지 모른다.

최은영 소설가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남형도 기자 human@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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