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미남 후배 그놈, 죽을 만큼 싫었어"…男 결국 벌인 일이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
추저분한 천재 미켈란젤로와
'완벽 초인 꽃미남' 라파엘로
두 천재의 한판 승부
“어딜 가나 패거리를 몰고 다니네. 자기가 무슨 깡패 두목인가? 허허.”
추저분한 남자는 길을 걷다 마주친 ‘꽃미남’과 그의 친구들에게 이렇게 시비를 걸었습니다. 누가 봐도 그 말을 한 자신이 훨씬 더 깡패 두목처럼 생겼는데도 말이지요.
추저분한 남자와 꽃미남은 많은 점에서 정반대에 가까울 정도로 달랐습니다. 추저분한 남자는 인상이 험악한 데다 잘 씻지도 않아 냄새가 났습니다. 성격도 지독하게 나쁘니 가까이 가려는 사람이 없었고요. 반면 꽃미남은 멋진 외모와 깔끔한 매너, 온화하고 관대한 성격으로 누구에게나 인기 폭발이었습니다. 하지만 둘에게는 단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둘 다 인류 역사상 최고로 꼽히는 천재 예술가라는 것.
그래서 그 추저분한 남자, 미켈란젤로(1475~1564)는 자기보다 여덟 살 어린 꽃미남 라파엘로(1483~1520)가 죽을 만큼 싫었습니다. 숙명의 라이벌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수제자인 그놈. 내 작품의 핵심을 순식간에 간파하고 자기 것으로 만드는 애송이. 예술을 제외한 모든 걸 다 버린 자신과 달리, 반질반질한 얼굴로 연애나 하고 다니는 바람둥이. 그러면서도 천재적인 재능으로 내 ‘세계 최고 예술가’의 자리를 위협하는 그놈. 미켈란젤로의 마음에서는 증오심이 불타올랐습니다.
그 순간, 라파엘로가 빙그레 웃으며 이렇게 받아쳤습니다. “아, 안녕하세요? 저도 선배님을 보고 놀랐습니다. 누가 혼자 무서운 얼굴로 걸어가길래 사형 집행인인 줄 알았거든요.” 멋진 반격에 라파엘로의 친구들 사이에서는 폭소가 터져 나왔습니다.
왁자지껄한 웃음소리와 함께 멀어져 가는 라파엘로와 친구들을 보며, 미켈란젤로는 입술을 깨물었습니다. ‘반드시 저놈을 밟아버리겠어. 10년 전 다 빈치가 나를 볼 때 이런 마음이었겠지.’ 르네상스 거장 시리즈의 마지막.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의 대결 이야기를 지금부터 시작합니다.
‘꽃미남 완벽 초인’, 라파엘로
당시 사람들의 기록에 나오는 라파엘로의 인상은 ‘꽃미남 완벽 초인’입니다. 어딜 보나 ‘얼굴은 잘생겼고 성격은 천사 같았다’고 적혀 있거든요. 기품이 몸에 배어 있어서 ‘마치 왕자 같았다’는 언급, 항상 겸손한 자세로 다른 사람의 충고를 경청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심지어 새들과 들짐승들까지 라파엘로를 잘 따랐다네요. 그만큼 그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모든 사람을 안 좋게 평가하기로 유명한 독설가들조차 라파엘로를 평가할 때는 좋은 말만 썼으니까요.
이탈리아 중부 도시 우르비노에서 태어난 라파엘로는 시작부터 좋았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우르비노를 다스리는 귀족의 전속 화가로, 초상화를 잘 그리기로 유명했습니다. 라파엘로는 어릴 때부터 귀족 자제들과 함께 교육받으면서 아버지의 ‘화가 영재 교육’도 받았지요. 어린 시절부터 천재적인 실력을 보여서, 쟁쟁한 예술가들이 많은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에서 불과 17살의 나이로 직업 화가로 데뷔할 수 있었습니다.
실력이 뛰어나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라파엘로에게 그림 주문이 밀려들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라파엘로는 ‘잘 나가는 화가’에서 만족할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는 주문받은 그림을 그리면서도 틈틈이 자신이 접한 대가들의 그림을 공부하고, 비결을 흡수해 자기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예컨대 라파엘로는 ‘피에타’를 비롯한 미켈란젤로의 조각에서 작품을 극적으로 만드는 표현법과, 젊은 남자의 근육질 몸을 표현하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그중에서도 라파엘로가 가장 많이 참고한 작가는 바로 다 빈치였습니다. 다 빈치의 그림을 통해 그는 인물의 표정으로 분위기를 만들고 이야기를 전하는 법, 구도를 균형 있게 잡는 법, 여러 인물을 아름다우면서도 빈틈없이 배열하는 법을 익혔습니다. 특히 다 빈치의 걸작 모나리자는 라파엘로의 초상화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래서 미술사학자들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라파엘로는 미켈란젤로에게서 몇몇 기법을 배웠지만, 다빈치에게는 그림 그 자체를 배웠다.”
라파엘로는 실제로 이 두 거장을 만나 가르침을 받은 적도 있습니다. 다빈치와 미켈란젤로가 피렌체 정부청사의 벽화 하나씩을 각각 맡아 실력대결을 벌이던 때였습니다. 다빈치는 공손하고 예의 바른 후배 라파엘로에게 자신의 스케치를 보여주며 여러 ‘꿀팁’을 알려줬습니다. 놀라운 건, 성격 더럽고 자기 그림 안 보여주기로 유명한 미켈란젤로조차 라파엘로에게 자신의 스케치를 보여주며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는 겁니다. 라파엘로가 얼마나 호감이 가는 사람이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하지만 라파엘로의 우아한 외모와 사람 좋은 웃음 속에는 엄청난 열정과 야심이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다빈치와 미켈란젤로의 대결이 여러 사정으로 인해 싱거운 무승부로 끝났을 때, 그 본색은 드러났습니다. 라파엘로가 “미완성으로 남은 피렌체 정부청사 벽을 내가 완성하겠다”고 피렌체에 제안한 겁니다. 라파엘로가 아무리 천재라도 당시 그는 스무살을 갓 넘은 일개 유망 작가. 명성과 평가는 다빈치와 미켈란젤로의 발끝에도 못 미쳤지요. 피렌체는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하지만 이 사건은 라파엘로가 속으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내가 더 잘할 수 있다. 내가 최고야.’
그림을 보다가 이런 생각을 하시는 분도 계실 겁니다. 사실 꽤 자주 나오는 반응입니다. 하지만 이는 라파엘로의 그림 실력이 그저 그래서가 아닙니다. 반대로 너무 뛰어났기 때문입니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고요. 이렇게 설명해보겠습니다. 시간과 날짜라는 개념(시계와 달력), 숫자 ‘0’의 개념(수학의 발달), 종이와 문자(지식의 저장과 전달), 뉴턴의 운동법칙(물리학의 기초) 같은 위대한 발명을 생각해 봅시다. 인간이 처음 떠올렸을 때는 그야말로 혁명적인 아이디어였고, 인류의 삶을 영원히 바꿔놓을 정도로 거대한 변화를 초래했지만, 그래서 지금은 너무나도 당연하게 우리 생활의 일부가 돼 ‘원래 있었던 것처럼’ 여겨지는 것들입니다.
라파엘로의 그림 양식도 그렇습니다. <서양미술사>를 쓴 에른스트 곰브리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라파엘로 그림의 단정한 선과 형태, 명료한 색상, 기품 있는 인물의 자세 연출, 배치와 구도는 서양 미술에서 이상적인 아름다움으로 여긴 ‘우아한 아름다움(Grazia)’의 원형(元型)이 됐다.”
설명을 바탕으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라파엘로의 그림은 화가들의 ‘교과서’가 돼 이후 수백 년간 나온 모든 서양 미술에 영향을 줬다. 그래서 우리가 보는 거의 모든 미술 작품에는 라파엘로의 영향이 녹아 있다. 우리도 모르게 ‘라파엘로스러운’ 작품을 수없이 많이 본 셈이다. 그러니 그 원본, 라파엘로 그 자체를 보면 당연하게 느껴지고 싫증이 날 수도 있다.
실제로 라파엘로가 그린 ‘그리스도의 변용’은 1900년대 초반까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으로 300여년간 군림해 왔습니다. 라파엘로는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를 뛰어넘는 르네상스의 독보적인 ‘1등 예술가’로 대접받았고요. 다만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의 업적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지면서, 지금과 같은 ‘3대 거장’ 중 한명이라는 지위로 내려왔습니다.
참고로 지금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은 다 빈치의 ‘모나리자’입니다. 모나리자가 라파엘로의 그림을 제친 건 1911년 있었던 도난 사건의 영향입니다. 당시 도난 사건이 국제적인 화제가 되면서 모나리자는 단숨에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고, 그 영향은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미켈란젤로와 나란히 서다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의 경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건 1508년. 라파엘로가 교황의 부름을 받아 로마 교황청의 화가가 되면서였습니다. 라파엘로가 스물다섯 살, 미켈란젤로가 서른세 살 때의 일이었습니다. 라파엘로는 미켈란젤로의 공방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만큼 가까운 곳에 숙소를 잡았습니다. 당시 미켈란젤로는 한창 ‘천지창조’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시스티나 천장화에 몰두할 때였습니다. 그 옆에는 라파엘로에게 주어진 무대, ‘서명의 방’이 있었습니다.
라파엘로가 오기 전까지 교황청은 서명의 방을 장식하는 벽과 천장 그림을 여러 화가에게 나눠 맡기고 있었습니다. 화가들끼리 경쟁시키기 위해서였지요. 라파엘로가 맡은 부분은 그중 일부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라파엘로는 곧바로 탁월한 실력을 보여줘서 경쟁자들을 전부 쫓겨나게 만듭니다. 라파엘로의 그림에 큰 감동을 받은 교황은 한술 더 떠서, 경쟁자들이 그렸던 그림을 모두 긁어내라고 지시했습니다. 라파엘로의 ‘캔버스’를 마련해주기 위해서였지요. 잔인한 처사였지만 라파엘로의 실력은 그만큼 압도적이었습니다.
이듬해 라파엘로는 교황청에서의 대표적인 걸작 중 하나인 ‘성체 논쟁’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가로 길이 7.6m에 달하는 이 작품에는 무려 66명이 등장합니다. 각 인물의 키는 1m를 넘기는 크기로 묘사된 대작이지요. 하지만 천재 라파엘로라고 해서 이 작업이 쉬웠던 건 아닙니다. 그에게도 이런 규모의 작업은 처음. 라파엘로는 그림의 구성을 고민하고 세부 스케치를 끝없이 그려보며 반년이라는 세월을 보냈습니다.
300장 넘게 남아있는 그의 스케치를 보면 라파엘로가 얼마나 고민하고 힘들어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배치를 바꿔보고, 구도를 이리저리 바꿔 보고, 그러다 전부 포기하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 흔적들이 보이거든요. 완성한 스케치를 벽에 옮기는 데에도 여러 기술적인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결국 교황이 만족하는 걸작을 만들어냈습니다. 등장인물이 살아있는 듯한 생생함과 고상함, 세밀함을 조화로운 구도로 표현한 작품이었습니다. 그림 자체만 놓고 보면, 미켈란젤로가 몇 달 전에 완성한 천장화 그림 ‘홍수’ 이상의 완성도였습니다.
1510년 그리기 시작한 ‘아테네 학당’ 역시 유명한 걸작입니다. 그리스의 철학 거장들과 학생들을 함께 그린 이 작품에서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유클리드 등 50여명의 인물이 등장합니다. 손가락 하나, 주름살 하나까지 섬세하게 묘사된 이 인물들은 저마다 다른 감정을 품고 있습니다. 예컨대 유클리드를 둘러싼 네 명의 제자는 서로 다른 자세와 표정으로 감탄, 집중, 호기심, 이해를 상징합니다. 그러면서도 그림 전체에는 세련된 통일감이 있지요. 작품은 1511년 완성됐습니다.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천장화를 최초로 대중에 선보인 것도 마침 이 무렵입니다. 사람들은 자연히 두 그림을 비교하게 됐습니다. 보는 사람을 압도하는 임팩트, 규모, 웅장함은 미켈란젤로가 훨씬 위였습니다. 하지만 라파엘로의 그림에도 확연히 뛰어난 점이 있었으니, 우아함이었습니다. 평평한 벽에 그린 라파엘로의 그림과 달리 미켈란젤로는 천장을 올려다보며 곡면에도 그림을 그려야 했고, 라파엘로의 그림은 가까이서 볼 수 있는 반면 미켈란젤로의 그림은 15m 위로 올려다보게 되는 작품이니 세밀함보다는 강렬함이 중요하다는 차이점은 감안해야겠지만요.
‘이거 큰일인데…. 마음에 안 들어.’ 미켈란젤로는 깨달았습니다. 예전에는 귀여운 애송이에 불과했던 후배가, 어느새 자신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커버렸다는 사실을요. 다빈치를 비롯한 다른 라이벌이 될 만한 거장들은 이미 쇠퇴했거나 세상을 떠난 상태. 유일하게 신경쓰이는 상대인 라파엘로를, 미켈란젤로는 이 때부터 집중 견제하기 시작합니다. 글 맨 첫부분에 있었던 다툼도 이 무렵 있었던 일입니다.
반면 라파엘로도 시스티나 천장화를 보고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미켈란젤로를 자신의 그림 속에 넣기로 결정합니다. 그림 속 위대한 철학자이자 그림의 중심인 플라톤의 얼굴에 존경하는 스승인 다빈치의 얼굴을, 그림의 맨 오른쪽 구석에 있는 제자들 사이에 자기 얼굴을 숨겨뒀던 것처럼요.
그리고 라파엘로는 혼자서 뭔가를 미친 듯 휘갈겨 쓰고 있는 괴짜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를 그린 후 미켈란젤로의 얼굴을 그려 넣었습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뛰어난 지성만큼이나 심술궂은 성격으로도 유명한 인물. 라파엘로는 이 부분을 통해 미켈란젤로의 예술혼에 대한 존경, 그리고 변변찮은 인간성에 대한 비웃음을 동시에 표현한 듯합니다. ‘어이, 거장 양반. 당신의 실력은 정말이지 위대해요. 그런데도 조바심이 드나 보죠? 나한테 너무 심하게 구는 것 같은데.’
죽도록 이기고 싶었다
‘vs 놀이’는 언제나 즐겁습니다. 인터넷 커뮤니티는 자주 ‘메시와 호날두 중 누가 축구를 잘하나’, ‘마이클 조던과 르브론 제임스 중 누가 농구를 잘하나’ 같은 주제로 뜨거운 논쟁을 벌이니까요. 16세기 이탈리아 사람들도 vs 놀이를 좋아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들에게 최고의 주제는,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 중 누가 더 훌륭한 예술가인가’ 였지요.
두 거장이 각각 자신의 걸작(시스티나 천장화와 아테네 학당)을 완성했을 때, 객관적인 평가에서 앞선 건 미켈란젤로였습니다. 일단 미켈란젤로는 라파엘로보다 이룬 게 훨씬 많았습니다. 그림뿐 아니라 조각에서도 탁월한 실력을 보여줬지요. 초대받은 몇몇 특권층만 볼 수 있는 라파엘로의 그림과 달리, 미켈란젤로의 천장화는 많은 이들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실력을 널리 알리기에 유리하기도 했고요. 그림으로만 봐도 미켈란젤로의 육체 묘사는 라파엘로를 훨씬 뛰어넘는 수준이었습니다.
하지만 라파엘로 역시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습니다. 라파엘로의 그림에는 미켈란젤로가 갖지 못한 탁월한 구성 능력과 섬세함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때까지 쌓아온 경력이나 조각 실력은 라파엘로가 떨어져도, 그림 실력만큼은 두 명이 최소한 동급이야. 그 섬세한 색채를 보면 사실 그림에서는 라파엘로가 미켈란젤로보다 낫다고 볼 수 있지.”
이런 얘기를 듣는 미켈란젤로의 속은 뒤틀렸습니다. 확실히 사람들의 말대로 라파엘로의 색채 감각은 탁월했고, 그림은 미켈란젤로의 전공 분야가 아니었습니다. 이대로는 그림 실력에서 뒤떨어진다는 평가가 굳어질 수 있는 상황. 미치도록 이기고 싶었던 미켈란젤로는, ‘용병’을 고용합니다.
그 용병이란 베네치아에서 로마로 막 건너온 스물여섯 살의 화가 세바스티아노 델 피옴보였습니다. 미켈란젤로는 세바스티아노의 그림에서 베네치아 화파 특유의 섬세하면서도 화려한 색채 감각을 발견했습니다. ‘꽤 쓸 만하군.’ 그리고 세바스티아노에게 제안했습니다. “우리 일 하나 같이 하지.” 다른 젊은 예술가들처럼 미켈란젤로를 존경했던 세바스티아노는 하늘 같은 선배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습니다.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에서 이런 협업은 의외로 드문 일이 아니었지만, 미켈란젤로의 ‘급’과 성격, 자존심을 생각해보면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2인조는 라파엘로와 일감을 놓고 본격적인 경쟁을 시작합니다. 미켈란젤로는 특유의 천재적인 감각으로 콘셉트와 구성을 짰습니다. 그러면 세바스티아노는 이를 완성품으로 만들면서 미묘한 색조로 배경을 처리했습니다. 이 둘의 첫 합작품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비통해하는 성모마리아’. 미켈란젤로는 자신의 작품 ‘피에타’를 닮은 예수의 몸과 성모의 모습을 통해 극적인 요소를, 세바스티아노는 배경에 있는 안개가 자욱한 밤공기의 색조를 통해 비극적인 요소를 강조했습니다. 반면 라파엘로도 걸작들을 계속 발표하며 맞섰습니다. 이런 식의 경쟁은 10년 가까이 이어졌습니다.
그렇게 경쟁이 고조되던 1520년. 라파엘로는 갑자기 병에 걸려 37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공교롭게도 그의 인생 최고 걸작인 ‘그리스도의 변모’를 막 완성한 뒤였습니다. 라파엘로는 이 그림에서 화면을 천상과 지상으로 나눈 뒤 두 세계를 자연스럽게 연결했습니다. 오른쪽 먼 배경의 온기와 그 아래 소년을 비추는 달빛의 대비, 빛과 색의 조화, 살아 숨 쉬는 입체감, 극적인 몸짓과 표정 등 이 작품에는 그가 평생 쌓아온 모든 기술이 담겨 있었습니다. 장례식 내내 이 작품은 유작으로서 관 위에 걸려 있었고, 그렇게 라파엘로는 전 이탈리아의 애도를 받으며 향후 수백 년간 ‘전설의 걸작’으로 불리는 작품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라파엘로가 죽자 미켈란젤로가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미켈란젤로는 세바스티아노와의 관계를 일방적으로 끊었습니다. 이제 자신에게 대적할 사람이 없어졌으니, 다른 사람과 동맹을 맺을 이유도 없다는 이유였겠지요. 세바스티아노는 미켈란젤로와의 관계가 끊기자 매우 아쉬워했지만, 괜찮은 화가로 행복한 삶을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미켈란젤로는 그 후로도 오랫동안 살며 ‘최후의 심판’ 등 여러 걸작을 남겼습니다. 다른 즐거움도 취미도 없이 예술에만 몰두하며 수도승 같은 삶을 살았기 때문인지, 그는 당시로서는 경이로운 수준인 88세까지 장수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동시대 사람들에게 ‘르네상스의 주인공이자 최고의 예술가’로 인정받았습니다. 다만,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는데도 라파엘로와의 경쟁은 이탈리아 사람들의 기억 속에 선명히 남아있었나 봅니다. 그의 장례식 추도사 중에서는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만일 미켈란젤로가 없었다면, 세계 최고 미술가는 라파엘로였을 겁니다.”
다빈치·미켈란젤로·라파엘로, 승자는?
르네상스 3대 거장의 삶과 경쟁을 살펴보고 나니 이제 마지막 질문이 남습니다. 결국 누가 제일 훌륭한 예술가라는 걸까요?
수백 년간의 토론을 거쳐 나온 지금의 결론은 “한 명만 고를 수 없다”는 겁니다. 하지만 각자의 특징과 강점은 다릅니다. 종합해보면 다빈치는 천재 과학자이자 만능 지식인으로서의 면모가 돋보인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순수한 예술가로서의 업적과 역량으로 따지면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가 앞선다는 얘기가 지배적이고요.
둘 중에서 미켈란젤로는 조각과 회화를 아우르는 다재다능하면서도 집념 어린 예술혼이, 라파엘로는 정교함과 색채가 돋보이는 화가의 능력이 돋보인다는 분석이 많습니다. 한편 18세기 영국의 정치인이자 문필가였던 에드먼드 버크의 분석은 지금까지도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의 차이를 잘 설명합니다. “인간에게 감동을 주는 건 두 가지, ‘아름다움’과 ‘숭고함’이다. 미묘하고 부드러운 색조, 유연하면서도 우아한 형상을 갖춘 것은 아름답다. 반면 거대하고, 이해하기 어렵고, 위협적이고, 거칠고, 충격적인 경탄과 공포심을 일으키는 건 숭고하다. 미켈란젤로는 숭고하고, 라파엘로는 아름답다.”
위대한 예술가들의 경쟁은 이렇게 여러 걸작과 이야깃거리를 비롯해, 예술이 인간에게 감동을 주는 이유는 무엇인지 등 심오한 질문의 씨앗들을 남겼습니다. 덕분에 인류의 삶은 전보다 더 풍요로워졌습니다.
하나 더, 이 세 거장의 이야기에서 얻을 수 있는 작은 위안이 있습니다. 이들은 경쟁자들 때문에라도 자신의 천재성에 안주하지 않았습니다. 끊임없이 서로의 존재를 의식했고, 다른 사람의 장점을 적극적으로 배우며 성장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이들은 때로 길을 헤맸고, 자신감과 확신을 잃기도 했고, 질투심과 열등감에 사로잡히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좌절하지 않고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자신이 가진 힘과 가능성을 한계까지 밀고 나갔습니다. 지금 힘든 시간을 견디고 있는 분이라면, 인류 역사상 최고의 천재들조차 자신의 길을 개척하기가 이렇게 힘들었다는 사실이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기를 바랍니다.
때때로 삶은 성장하기 위해 고통의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누구에게나 예외는 없습니다. ‘르네상스 3대 천재’들에게조차 삶은 거저 주어지지 않았으니까요. 힘든 시간을 견딜 수 있는 용기가 함께하기를 기원합니다.
세 거장의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다음 주에는 또 다른 화가로 만나 뵙겠습니다. 좋은 주말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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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 사람들>은 미술과 고고학, 역사 등 과거 사람들이 남긴 흥미로운 것들에 대해 다루는 코너입니다. 토요일마다 연재합니다. 쉽고 재미있게 쓰겠습니다. 네이버 기자 페이지를 구독하시면 5만여명 독자가 선택한 연재 기사를 비롯해 재미있는 전시 소식과 미술시장 이야기를 놓치지 않고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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