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제차 후드 위에 쇳덩어리 조각상…근데 그거 뭐지? [그거사전]

홍성윤 기자(sobnet@mk.co.kr) 2024. 2. 3. 0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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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사전 - 13] 고급 승용차 후드에 튀어나와 있는 ‘그거’

“그거 있잖아, 그거.” 일상에서 흔히 접하지만 이름을 몰라 ‘그거’라고 부르는 사물의 이름과 역사를 소개합니다. 가장 하찮은 물건도 꽤나 떠들썩한 등장과, 야심찬 발명과, 당대를 풍미한 문화적 코드와, 간절한 필요에 의해 태어납니다. [그거사전]은 그 흔적을 따라가는 대체로 즐겁고, 가끔은 지적이고, 때론 유머러스한 여정을 지향합니다.
다양한 후드 오너먼트들. 괄호 안은 명칭. 첫째 줄 왼쪽부터 메르세데스-벤츠(삼각별), 마이바흐, 캐딜락(크레스트), 코드社 1931년식 L-29, 피어스-애로우社 실버 애로우, 다임러 DK400 스타더스트 리무진(댄서 마스코트) , 듀센버그 모델 X 보트테일 로드스터, 재규어(리퍼), 부가티 (춤추는 코끼리), 링컨 (그레이하운드), 팩커드社, 벤틀리(플라잉 B) [출처=각 사]
명사. 1. 후드 오너먼트(hood ornament), 모터 마스코트【예문】친구는 술에 취하면 주차된 차의 후드 오너먼트를 떼어 오는 나쁜 버릇이 있었다. 청담동에서 거나하게 취한 채 외제 차들 사이로 홀연히 사라진 게 그 친구의 마지막 모습이다.

후드 오너먼트다. 오너먼트는 장식품이란 뜻으로, 크리스마스 트리에 다는 알록달록한 장식품도 오너먼트라고 부른다. 후드 오너먼트는 단어 뜻 그대로 자동차의 후드(보닛) 위를 장식하는 물건 되겠다. 한국에서는 후드 장식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차량 전면의 그릴이나 후면 트렁크 문에 붙어있는 제조사의 로고는 엠블럼이라고 한다. 하지만 여기에 더해 롤스로이스나 재규어 같은 몇몇 고가 브랜드는 차 후드 위에 입체적인 엠블럼, 후드 오너먼트를 장착한다.

차량 후드에 달린 보이스 모터미터(오른쪽)와 당시 제품 광고(왼쪽). 라디에이터 캡에 온도계를 달아 냉각수 온도와 라디에이터 과열 여부를 확인할 수 있었다. 클래식 자동차 덕후들이 워낙 많다 보니 최근에도 중고 매물이 종종 거래된다. [사진 출처=Bernard Spragg. NZ 플리커]
후드 오너먼트의 시작은 실용적인 용도였다. 초창기 자동차는 라디에이터 캡이 후드 위로 노출돼있었는데, 캡에는 온도계가 달려 있어 냉각수의 온도와 라디에이터의 과열 여부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었다. 보이스 모터미터사(社)가 1912년 특허를 내고 생산한 보이스 모터미터(Boyce MotoMeter)라는 장치가 그것이다. 여기에 이런 저런 장식이 가미되며 후드 오너먼트로 자리 잡게 됐다. 1930년 운전석 계기반에 장착되는 온도계가 등장하면서 모터미터는 사라지고 후드 오너먼트만 남게 됐다. 주객전도 그 자체.

대표적인 후드 오너먼트로는 메르세데스-벤츠의 삼각형 별, 재규어의 앞으로 도약하는 재규어 ‘리퍼’, 벤틀리의 날개 달린 알파벳 B 등이 있다. 하지만 가장 유명하고 아름다운 후드 오너먼트를 꼽자면 단연 롤스로이스의 ‘환희의 여신상(Spirit of Ecstasy)’이다. 상체를 앞으로 숙이고 두 팔은 뒤로 쭉 뻗은 여성과 바람에 휘날리는 드레스를 형상화해 ‘플라잉 레이디’ ‘실버 레이디’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거 왜 이래. 나 옵션 가격 500만원부터 시작하는 환희의 여신상이야.” 최저임금 기준으로 2달 꼬박 일해도 못 산다. 하지만 롤스로이스 뒷문에 수납된 장우산의 가격이 옵션에 따라 100만~400만원 수준인 점을 생각해보면 나름 납득이 되는 점이 무섭다. [사진 출처=롤스로이스]
환희의 여신상은 영국의 유명 조각가 찰스 사익스(1875~1950)의 작품이다 - 라고 무미건조하게 설명하고 넘어가기에는 아쉬운, 다소 애틋한 사연이 있다. 이야기는 한 자동차광 귀족에서 시작한다. 존 더글라스 스콧 몬태규 경(1866~1929)은 영국의 귀족이자 자동차 전문잡지 ‘더 카 일러스트레이드’를 창간할 정도로 내로라하는 자동차 애호가였다. 1909년 롤스로이스 1세대 팬텀 모델인 ‘실버 고스트’를 구입한 그는 자신과 절친했던 조각가 사익스에게 차량 보닛에 부착할 후드 오너먼트 제작을 부탁한다.

문제는 모델이 내연녀였다는 점이다. 몬태규 경은 서로 열렬히 사랑했지만 신분의 격차로 이뤄지지 못한 연인(이라고 포장했지만 실상은 내연 관계였고 둘 사이엔 아이도 있었다) 자신의 비서 엘리노어 벨라스코 손튼(1880-1915)의 모습을 본뜬 후드 오너먼트를 원했고, 이때 만들어진 것이 환희의 여신상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위스퍼’다. 손가락을 입술에 갖다 댄 매혹적인 여인의 모습인데 ‘누구에게 말할 수 없는 은밀한 사랑’을 은유하는 듯하다. 어쨌거나 내연녀를 본뜬 여신상을 차에 떡 하니 붙여놓고 달린 유부남의 패기가 놀라울 뿐이다.

1909년 찰스 사익스가 제작한 위스퍼. 엘리노어 벨라스코 손튼의 모습을 본뜬 후드 오너먼트는 (인정받지 못한) 연인의 롤스로이스를 장식했다. 니켈로 도금한 청동 재질이다. [사진 출처=본햄스 경매]
런던 사교계의 명사이자 귀족, 자동차광의 롤스로이스를 장식한 위스퍼가 화제가 된 것은 당연지사. 이후 다른 롤스로이스 소유주들이 “나, 나도 저런 거 갖고 싶어!”라며 요청하고 또 제각각 만든 후드 오너먼트를 달고 다니자 아예 롤스로이스 측에서 사익스에게 브랜드를 대표할 수 있는 후드 오너먼트 제작을 요청했다.

이에 사익스는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된 승리의 여신 니케 조각상에서 얻은 영감과 기존 위스퍼의 특징을 잘 버무려 1911년 환희의 여신상을 만들었다. 롤스로이스는 홈페이지에서 환희의 여신상 탄생 비화를 소개하고 있는데, 내연 관계니 불륜이니 하는 것들은 쏙 빼놓고 ‘뮤즈 엘리노어로부터 영감을 얻어 제작된…’ 이런 식이다. 왜 그러니 내뮤남불(내가 하면 뮤즈 남이 하면 불륜)이니.

1915년 12월, 금지된 사랑은 비극으로 끝난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인도 주둔 영국 군부대의 검열관 직책을 수행하던 몬태규 경은 SS 페르시아호를 타고 비서이자 뮤즈이자 연인(이지만 부인은 아닌) 엘리노어와 함께 인도를 향하고 있었다. 크레타섬 인근 해역에 당도했을 무렵 독일 유보트로부터 무차별 공격을 받은 배는 피격 5분 만에 침몰하고 만다. 승선자 519명 중 343명이 사망한 참혹한 사고였다. 이때 몬태규 경은 36시간 만에 천운으로 구조돼 생존했지만, 차디찬 겨울 바다 속으로 사라진 엘리노어는 사망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미완으로 끝난 두 사람의 로맨스는 이후 110년을 넘도록 이어지는 ‘불멸의 아이콘’이 됐다.

존 더글라스 스콧 몬태규 경(왼쪽)과 그의 뮤즈(라고 쓰고 불륜이라고 읽는다) 엘리노어 벨라스코 손튼. 비록 둘의 ‘끝사랑’은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후드 오너먼트를 남겼다.
아무튼 호사스러움의 끝판왕 롤스로이스다 보니 환희의 여신상 역시 비싸다. 스테인리스 스틸로 만든 기본 여신상의 가격은 500만원 정도(2021년 기준)다. 구매자의 옵션이나 모델에 따라 금이나 은으로 도금하거나 보석으로 장식할 수도 있고 폴리카보네이트, 크리스털로 만들 수도 있다. 순금 도금 여신상의 옵션 가격은 수천만 원에 달한다. 보행자 사고의 피해를 줄이고 파손이나 도난을 방지하기 위해 충격이 가해질 경우 자동으로 후드 안으로 숨는 기능이 있다. 2023년에 출시된 롤스로이스 최초의 전기차 모델인 ‘스펙터’에는 새로운 디자인의 여신상이 부착됐는데 공기역학 성능을 고려해 몸을 더 숙인 자세로 만들었다고 한다. 공기역학을 고려할 생각이라면 빼라고.

고급차의 상징인 후드 오너먼트는 점차 사라지는 추세다. 보행자 사고 시 치명적일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미국에서는 1968년 이후 시판되는 신차에 고정형 후드 오너먼트의 사용을 금지했고, 유럽에서도 1974년부터 금지했다. 2010년 고급차 브랜드 벤틀리는 자사 차량의 후드 오너먼트가 자동으로 접히는 기능이 부품 부식 등으로 인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수 있다는 이유로 미국을 비롯해 전 세계에 판매된 차량 1400여 대를 리콜하기도 했다. 이러한 흐름이 계속되자 메르세데스 벤츠의 삼격별은 뒤로 접히는 형태로 바뀌었다가 후드 위에서 그릴 엠블럼으로 이사했고, 재규어의 리퍼 후드 오너먼트 역시 포효하는(하지만 평평한) 재규어 ‘그롤러’ 엠블럼으로 바뀌었다.

후드 오너먼트는 확실히 시대착오적이다. 위험하고, 과시적이며, 성능이나 효율 따위 와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시대착오적이니까 로망 아니겠는가. 이제는 자동차 박물관에나 가야 만날 수 있는 구시대의 산물, 후드 오너먼트가 테슬라 사이버트럭의 매끈한 후드에서는 느낄 수 없는 매력을 전하는 이유다.

롤스로이스의 시대착오적인 로망은 언제까지 계속될까. 감히 예측하건데 최후의 후드 오너먼트는 환희의 여신상일 것이다. 롤스로이스의 자율주행 콘셉트카 103EX의 후드 오너먼트. 크리스털 혹은 폴리카보네이트로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 출처=롤스로이스]
  • 다음 편 예고 : 문 안 닫히게 고정해놓는 그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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