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와인] ‘법도 원칙도 없이’ 로케이션즈 캘리포니아 레드
프랑스인에게 와인은 특별하다.
바게트·치즈와 함께 식탁 위 삼위일체(三位一體)로 각별하게 여긴다. 세계 최고 와인을 만든다는 자부심도 대단하다.
2014년 프랑스 서적 ‘비노 비즈니스(Vino business)’는 이런 프랑스 와인업계 자존심을 무참히 무너뜨렸다.
기자 출신 저자 이사벨 사포르타는 “프랑스에서 그랑 크뤼(최고급 와인) 등급을 평가할 때, 실제 와인 맛이 차지하는 비중은 30%에 불과하다”고 폭로했다.
대신 “와이너리(양조장) 방문자용 주차장과 회의실이 얼마나 넓고 편한지, 건물 연식(年式)과 건축 기법 같은 말도 안 되는 기준들이 등급 판정에 영향을 준다”고 주장했다.
이른바 와인업계 일부 ‘큰손’이 와인 등급 판정을 왜곡하고 있다고 사포르타는 말했다. 그는 “이전에 가족 단위 소규모로 운영하던 와이너리들이 지금은 대형 투자자 손에 넘어갔다”며 “이들이 좋은 등급을 받기 위해 자기들 마음대로 와인 판정 기준을 정하고 있다”고 적었다.
이 책은 출간 한 달 만에 프랑스 아마존 베스트셀러 목록에 이름을 올렸다.
이후 프랑스를 넘어 전 세계 와인 업계에서는 ‘과연 어떤 와인이 좋은 와인이냐’는 근본적인 질문이 오갔다. 소비자들은 평론가들이 좋은 와인이라 극찬했던 와인이 그만한 자격이 있는지 의심했다.
유명 와인 메이커 데이비드 피니(David Phinney) 역시 이 지적에 공감했다.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는 와인을 가업으로 삼는 경우가 많다. 부모님이 와이너리를 운영하면 자녀 가운데 한 명이 뒤를 잇는다.
피니는 정 반대였다. 와인과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살다가 와인 업계에 불현듯 빠져들었다.
그는 미국 애리조나대학교에서 정치학과 역사학을 전공했다. 대학 졸업 후 로스쿨에 진학할 예정이었지만, 한 학기 동안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유학을 하다 와인에 매료됐다.
곧 미국으로 돌아와 로펌 대신 와이너리에 이력서를 넣으면서 제 손으로 진로를 바꿨다. 그런 그에게 세계적으로 명성이 높은 로버트 몬다비 와이너리가 손을 내밀었다.
피니는 이곳에서 포도 재배와 와인 양조 경험을 차곡차곡 쌓았다. 그리고 1998년 캘리포니아에 아버지와 어머니 이름을 따 본인 와이너리를 열었다. 국내에서도 유명한 오린 스위프트다.
이 와이너리는 20년 넘게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소비자에게 명료한 선택지를 주진 않았다. 오린 스위프트는 레드 와인 종류만 얼추 30종에 달한다. 한 가지 포도로, 한 밭마다 다른 이름을 붙여 팔았다.
다른 와이너리도 마찬가지였다. 무수히 쏟아지는 와인, 심오한 평가 앞에 와인 소비자는 흔들렸다.
미국 와인 매장 앞에는 2010년대 후반 들어서도 결정장애로 고민하는 소비자가 넘쳤다. 이들은 ‘좋은 점수를 받은 와인은 많은데 이상하게 ‘내 입맛에 맞는 와인’은 막상 찾으면 잘 보이지 않는다’고 불평했다. 단지 가격만 보고 사자니, 비싼 와인이 취향과 어울리지 않을까 염려했다.
일부는 복잡한 와인 대신 맥주나 하드셀처(Hard Seltzer·도수가 낮은 탄산 주류)를 찾아 떠났다.
피니는 이들을 붙잡으려면 맥주만큼 쉬운 와인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미묘하고 복잡한 여운 대신 직관적으로 맛있는 와인을 만들기 위해 전 세계를 떠돌았다.
로케이션즈는 피니가 만든 무(無)국적, 무규범 와인이다. 피니가 직접 프랑스와 미국, 스페인, 이탈리아, 뉴질랜드를 떠돌면서 만든다. 한 와이너리에서 지긋이 자리를 지키지 않기 위해 여러 밭에서 여러 해에 걸쳐 키운 포도를 섞어 만든다.
어떤 품종 포도를 사용했는지, 어느 지역 와인인지, 심지어 몇 년도 와인인지 여부도 밝히지 않는다. 홈페이지로 찾아가 양조 노트를 직접 살펴봐야 알 수 있다.
로케이션즈 캘리포니아 레드에는 캘리포니아를 뜻하는 두 글자 ‘CA’만 새겼다. 피니는 이 와인을 만들 때 오로지 하나의 법칙만 염두에 뒀다고 강조했다.
‘와인 규칙과 상관없이,
관습을 따지지 않고
그저 맛있는 와인을 만든다.’
유명 와인메이커가 창의력을 발휘해 만든 이 와인은 2023 대한민국 주류대상 신대륙 레드와인 부문에서 대상을 받았다. 수입사는 롯데칠성음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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