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여성 엔지니어 근속 지원하는 ‘HP’… 신은숙 책임 “70세 할머니 될 때까지 일하고 싶다는 꿈꿔”

최지희 기자 2024. 2. 3.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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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대한민국 여성과학기술인대회 ‘올해의 멘토상’ 수상자
신은숙 HP프린팅코리아 책임연구원
회사가 대외 활동 조력… HP “다양성은 혁신의 엔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주최 '2023 대한민국 여성과학기술인대회’에서 ‘올해의 멘토상’을 받은 신은숙 HP프린팅코리아(HPPK) 책임연구원./HPPK 제공

‘10명 중 2.5명’

국내 대학 공학계열에 진학한 여학생 비율(2021년 기준)이다. 한국여성과학기술인육성재단의 남녀 과학기술인 인력 현황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10년간 공학계열 여학생 비중은 3.8%포인트(P) 늘어나는 데 그쳤다. 여성의 이공계 진학이 지지부진한 상황에서 여성 과학기술 인력 수급은 한계가 분명하다. 보고서 집계에 따르면, 국내 정규직 과학기술 인력 20여만명 중 여성은 3만6000여명으로 18.2%에 불과하다.

여성 과학기술인 육성을 국가적 과제로 산정한 정부는 매년 ‘대한민국 여성과학기술인대회’를 열고 이들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지난해 말 열린 이 대회에서 여성 과학기술인 양성에 기여한 현직자에게 주는 ‘올해의 멘토상’을 받은 신은숙(43) HP프린팅코리아(HPPK) 책임연구원은 지난 1일 조선비즈와 만나 “여성 엔지니어를 키우는 것은 기업 경쟁력을 강화하는 핵심이다. 회사 차원에서도 이를 매우 중요하게 보고 있다”고 말했다.

신 책임연구원은 매년 이공계 여학생 3명의 ‘인생 코치’가 돼 이들의 진로를 함께 고민한다. 진로 상담부터 면접 스킬 전수까지 조언 범위는 방대하다. 그의 멘티들은 모두 전공을 살려 국내외 대기업과 스타트업에 들어갔다. 신 책임연구원의 경력 발자취를 따라 HPPK에 엔지니어로 입사한 멘티도 있다.

이공계 학생들의 ‘든든한 언니’로 활약 중인 신 책임연구원의 숨은 조력자는 회사다. HPPK는 사내 여성 엔지니어들에게 후배 양성 프로그램을 적극 소개하고 있다. 신 책임연구원은 “회사가 여성 임직원들이 대내외 다양한 네트워크를 쌓아 더 성장할 수 있도록 전폭적으로 밀어준다”고 말했다. “다양성이 혁신의 엔진”이라고 강조하는 HP는 전 세계 법인·지사에 여성, Z세대, 장애인, 성소수자, 다인종 등 다양한 커뮤니티를 조성하고 활동하는 것을 정책적으로 지원한다.

HP는 직원들의 이런 활동이 회사에 대한 소속감은 물론이고 업무 효율을 높인다고 본다. HP 측은 “여성을 비롯한 많은 직원이 대내외 활동을 하면서 시야를 넓히는 건 회사의 생산성을 높이는 데 큰 도움이 된다”며 “나와 다른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역량을 나누면 업무 이해도와 고객 이해도가 자연스럽게 상승한다고 회사는 굳게 믿고 있다”고 설명했다.

신 책임연구원은 광운대 컴퓨터공학과를 졸업한 후 2006년 삼성전자 프린팅 사업부에 입사해 프린팅 개발 엔지니어로 18년간 일했다. 2017년 HPPK로 회사가 인수된 후 프린터 소프트웨어 개발과 이미지를 프린터로 전송하는 파이프라인 설계를 맡고 있다. 2020년부터 한국여성과학기술인육성재단의 글로벌 멘토링 활동을 시작했고, 사내 ‘여성 영향력 네트워크’ 단체에서 공동 의장을 맡았다. 다음은 신 책임연구원과 일문일답.

—회사 차원에서 멘토링 프로그램을 어떻게 지원한 건가.

“회사에서 사내 여성 엔지니어 약 20명에게 의사를 물었다. 회사가 밀어주니 멘토들은 여성 임원 강연부터 회사 투어까지 여러 프로그램을 짜서 멘토링을 진행했다. 여성 임원의 강연을 듣고 감동해 우는 이공계 멘티 학생도 있었다. 학생들이 열정은 많은데 막상 진로를 정하려니 막연해 무력감을 느낀다. 조금만 코치해 주고 고민을 나누면 학생들은 금세 쑥쑥 성장한다. 이런 활동이 직원들에게도 활력이 돼 HP뿐 아니라 GM에도 전파됐다. 현재 많은 글로벌 회사가 여기에 참여하고 있다.”

—이런 활동이 여성 인력 이탈을 막는 데도 도움이 된다고 하는데.

“당연하다. 동료 여성 엔지니어들을 보면 각자 인생의 주요 시기에 어쩔 수 없이 회사를 그만두는 경우가 많다. HP가 지원하는 각종 프로그램은 동료가 힘을 모아 으쌰으쌰하고 리더십을 발휘하도록 하는 걸 목표로 한다. 나 역시 두 아이를 낳고 회사에 돌아와 소속감도 떨어지고 마치 1인분의 몫을 하지 못하는 것 같은 자괴감이 들 때가 있었다. 하지만 다양성을 강조하는 회사 기조와 이를 뒷받침하는 여러 프로그램 덕에 오히려 빠르게 성취감을 느끼고 업무 효율을 높일 수 있었다. 최근엔 제2의 인생에 대한 고민이 많았는데, 이공계 대학생 멘토링을 하면서 ‘70세 할머니가 될 때까지 이 분야에서 일하고 싶다’는 꿈을 다시 꾸게 됐다.”

—전사적으로 여러 직원이 업무 외 다양한 프로그램에 활발하게 참여한다고 들었다.

“업무와 당장 직접적인 관련이 없더라도 새로운 활동이 직원 역량을 높인다고 봐 누구에게나 이런 활동을 장려한다. 가령 앉아서 코딩만 하다 보면 실제 프로그램을 쓰는 사용자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질 수 있다. 그래서 여러 사람을 만나고 오면 시야가 넓어질 수밖에 없다.

내 매니저는 외부 멘토링 활동을 하고 온 내게 ‘자랑스럽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직원들도 회사와 집만 오갈 때보다 역량 계발에 도움이 된다는 걸 느끼니 마음 편하게 회사 눈치 안 보고 대외 활동을 한다. 이는 성과와 생산성, 업무 효율을 최우선으로 고려하는 HP 문화 덕분이다. 생산성을 높일 수 있다면 직원들의 자율성을 최대한 존중하는 것이다.”

—삼성전자에서 HP로 인수되고 난 후 문화 차이가 커 적응이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이제 5년이 지났는데, 초반엔 혼돈 그 자체였다. 이곳은 거의 모든 게 자율이다. 출퇴근도 따로 간섭하지 않고, 새벽에 업무를 시작해 아침에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와 일을 이어서 해도 아무 문제가 없다. 성과에만 차질이 없게 하면 된다. 처음엔 이게 너무 적응이 안 되더라.

‘관리의 삼성’ 시절엔 퇴근시간 게이트 앞에서 시간 재고 있다가 이른바 ‘초치기’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완전히 다른 세상이 펼쳐진 거다. 자율이 불안해 자발적으로 액셀에 출퇴근 시간을 써넣는 직원도 있었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직원들도 깨달았다. 공정한 평가를 기반으로 하는 자율이 얼마나 업무 효율을 높이고 ‘일하기 좋은 회사’를 만드는지. 지금은 평생 여기서 일하고 싶다는 직원들이 많다.”

—여전히 많은 기업은 자율적인 문화를 도입하지 못하고 있다.

“가장 중요한 건 공정한 평가다. 여기선 직원들이 자신의 평가를 담당하는 매니저와 수시로 진척 상황을 공유하면서 성과를 관리한다. 회사가 직원 개개인별 성과를 정확히 평가하면 직원들은 일을 안 할 수 없게 된다. 반대로 단순히 연차가 찼다고 승진시키거나, 실력이 없는데도 위에서 밀어주면 ‘일해봤자 뭐해’라는 분위기가 팽배하고 서로를 못 믿게 된다. 투명하게 수시로 성과를 서로 확인하면 의심이 아닌 신뢰가 쌓이고, 신뢰를 바탕으로 자율은 극대화된다.

공정한 평가를 위해 회사는 매니저의 역량 강화를 중시한다. 직원 상담 방법부터 개인별로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매니저 교육 프로그램이 촘촘하게 짜여있다. 매니저들도 회사에서 함께 성장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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