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돌, 파도, 바람의 ASMR···신선이 노닐던 큰 섬, 거제
자율감각쾌락반응, ASMR. 뇌에 쾌감을 주는 자극으로 불리는 ASMR은 10여년 전 유튜브에서 유행하며 생겨난 신조어다. 인위적으로 만든 소소한 자극이 뇌를 행복하게 해준다는 것이다. 그런데 ASMR이란 단어가 만들어지기 전부터 이미 우리 곁에는 ASMR이 존재해왔다. 바로 자연의 소리다.
경남 거제는 자연의 ASMR을 다채롭게 만날 수 있는 곳이다. 바다가 몽돌을 어루만지며 자글거리는 소리, 노을이 섬과 바다에 부서지며 황금빛 가루를 퍼뜨리는 장관, 파도가 해안에 부딪혀 빚어낸 절경…. ‘크게 건넌다(巨濟)’는 뜻의 거제는 큰 만큼 아름다운 비경을 그득 담고 넉넉한 쉼을 내어주고 있다.
유배지→조선업 중심지→현대인의 휴양지
거제는 큰 섬이다. 국내에선 제주 다음으로 크다. 그런데 거제를 돌아보다 보면 제주만큼 크게 느껴진다. 본섬 해안선의 길이(328㎞)만 따져봤을 때 제주(308㎞)보다 길기 때문이다. 역사 유적지가 포진한 북쪽부터 해안 절경을 품은 남쪽까지 모두 돌아보려면 하루가 부족하다.
거제는 육지와 다리로 이어지기 전까지 물길에 가로막힌 오지였다. 거제는 신라시대 상군(裳郡)으로 불렸다. 치마를 뜻하는 ‘상’이 붙은 이유로 고대에는 섬을 ‘두루(빙 둘러 있다)’라고 불렀기 때문이라는 설이 가장 설득력 있다. 최남선은 <동경통지>에서 비가 올 때 걸치는 ‘두룽이’가 치마를 뜻하는 속어로 쓰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돌다’에서 파생된 두루, 두룽이 등에서 ‘상군’ 이름이 탄생했다는 것이다. 거제는 ‘유배지’로도 악명 높았다.
고려 무신정변으로 의종이 유배된 곳도 거제였다. 조선시대 유배지로 가장 많이 거론된 곳은 제주, 거제도, 진도, 흑산도 순이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유배지는 문명과 멀고 자연과 가까운 곳이다. 현대인이 꿈꾸는 휴양지로 제격이다.
1971년 거제와 통영을 잇는 거제대교가 생겼다. 이후 조선소들이 터를 잡으면서 거제는 ‘조선업 중심지’로 떠올랐다. 조선업 호황이 정점을 찍던 2010년 거제시 1인당 지역내총생산(GRDP)은 4146만원으로 국내 최고 수준이었다. 거제가 절경을 품고도 관광지로 홍보를 굳이 할 필요가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삼성중공업 인근 장평동·고현동, 대우조선해양 근처 옥포동·아주동 중심으로 상권이 발달했다. 도심에 편의시설이 갖춰져 있어 섬 여행이지만 고되지 않다.
이제 거제는 해양관광도시로 변신을 꾀하고 있다. 조선업 경기에만 기댈 수 없어서다. ‘거제로 올 거제?’ 타이틀을 내걸고 식물원인 거제정글돔, 남해를 조망하는 케이블카 등 겨울에도 즐길 수 있는 여행 코스를 만들었다.
금가루 흩뿌린 다도해 노을···케이블카로 만나는 윤슬
거제는 큰 품으로 푸른 바다를 끌어안고 있다. 파도는 절벽을 깎아내 기암괴석을 조각했다. 바다는 해안의 모난 돌들을 어루만져 둥글게 빚어냈다. 해안도로를 달리다 보면 이 모든 절경이 차창에 스친다. 드라이브를 즐기다 마음이 끌리는 곳에서 잠시 쉬어가도 좋다.
거제 해안의 묘미는 몽돌해변이다. 30개가 넘는 해수욕장 중 21곳이 몽돌해수욕장이다. 우리 땅 동쪽은 하천 길이가 짧아 퇴적물이 빨리 쌓이고 센 파도가 암석을 모래로 만들어낸다. 강원 고성부터 부산 앞바다까지 모래 해변이 즐비한 이유다. 하지만 남해의 파도는 동해보다 침식작용이 약한 반면 급속 조류가 해안가의 모래를 빨리 앗아간다. 모래가 아닌 몽돌이 바다를 지키는 연유다. 거제 사람들은 바닷물을 머금은 몽돌이 마치 흑진주처럼 반짝인다며 ‘흑진주 몽돌해변’이라 칭했다.
몽돌해변이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건 몽돌과 파도가 자아내는 소리 때문이다. 바닷물이 몽돌을 빠져나갈 때마다 “자그르르”하며 자연의 이중주를 만들어낸다. 2021년 미국 미시간대 환경지속가능연구소의 애런 아구라왈 박사 연구팀은 미 국립공원에서 발생하는 자연의 소리를 경험한 사람들의 변화를 관찰한 결과 자연의 소리에 노출된 이후 스트레스, 분노, 통증 수치가 낮아졌다고 밝혔다. 심박수와 혈압도 안정적으로 변했고, 인지 능력이 향상되기도 했다. 몽돌해변의 소리에 귀 기울이자 심신이 회복되는 느낌이 들었던 건 과학적 근거가 있는 것이었다.
학동흑진주몽돌해변은 국내 최대 규모의 몽돌해변이다. 몽돌해변이 1.2㎞에 걸쳐 펼쳐진다. 이곳에서 해안도로를 따라가면 도장포마을에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는 커다란 바위가 있다. 신선이 머물던 곳처럼 보여 ‘신선대’라 불린다. 맞은편엔 ‘바람의언덕’이 있다. 풍차와 풀밭이 어우러져 이국적인 풍광을 자아낸다. 다만 바람의언덕 입구에서 주민이 차를 가져온 방문객에게 현금으로 주차비를 받아 간다. 무료관광지가 아닌 셈이다. 절경을 품은 여차~홍포 해안도로를 지나면 근포마을이 나온다. 일본군이 굴착해놓은 근포땅굴은 바다와 어우러져 예술 사진을 만들어낸다.
최근 거제의 진면모를 만나는 방법이 하나 더 늘었다. 학동고개에서 노자산 전망대까지 1.56㎞를 오가는 거제 파노라마케이블카다. 바닥까지 투명한 특수유리로 제작된 케이블카는 올라갈 때부터 짜릿함을 선사한다. 상부 전망대에 서면 한려수도 비경에 압도당한다.
전망대 이름은 ‘햇빛이나 달빛에 비치어 반짝이는 잔물결’을 뜻하는 ‘윤슬’ 전망대다. 특히 일몰이 아름답다. 이 때문에 거제 케이블카는 일몰 이후까지 운행된다. 보석 같은 섬들 사이로 금가루가 흩뿌려지는 해넘이 장관을 보고 있노라면 거제 전체가 신선이 노닐던 큰 섬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스친다. 거제의 신선들이 지금도 몽돌, 바람, 섬, 바다를 버무려 자연의 ASMR을 빚고 있는 것만 같다.
☞알고가세요
수도권에서 거제까지 차를 몰고 가면 5시간 정도 걸린다. 기차를 타고 현지에서 공유차를 이용하면 여독을 한결 줄일 수 있다. 부산역 바로 앞에 공유차를 이용할 수 있는 ‘쏘카존’이 있다. 공유차로 거가대교를 넘으니 바로 거제에 다다랐다. 쏘카 앱에서 KTX를 예약하면 기차요금과 공유차 이용료를 할인받을 수 있다. 사천공항 주차장에도 쏘카존이 있어 짐이 많은 여행객도 편하게 이용할 수 있다. 사천공항에서 차로 1시간이면 거제에 닿는다.
거제|글·사진 | 이윤정 기자 yyj@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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