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타니 열풍 앞선 ‘한국 오타니’도 있었다 [K스포츠 레전드 열전]
1982년 10승, 13홈런, 타율 0.305, 10도루
"오타니와 달리 난 시대가 투타 겸업 만들어"
이종범vs이정후? 내 선택은 당연히 이종범
매일 1시간30분 자전거 타기로 활력 유지
편집자주
현역 시절 뛰어난 활약을 펼쳤던 스포츠 스타들의 과거와 현재를 집중 조명하는 코너입니다. 종목을 막론하고 대한민국 스포츠사에 뚜렷한 발자국을 찍어낸 전설들의 화려했던 전성기 시절과 현재의 삶을 조명하고 은퇴 후 제2 인생을 살아가는 모습, 그리고 자신만의 건강 관리법 등을 함께 들어봅니다.
현재 세계에서 가장 인기 많은 야구 스타는 오타니 쇼헤이(LA 다저스)다. 두 개의 칼을 지닌 ‘이도류(二刀流)’로 만화에서나 볼 법한 투타 겸업을 현실로 이뤄냈다. 아울러 잘 던지고, 잘 치기까지 하면서 메이저리그의 전설적인 인물 베이브 루스의 100여 년 전 대기록 10승-10홈런을 소환하기도 했다.
이때 빠지면 섭섭한 전설이 국내에도 한 명 있다. 한국의 오타니로 통하는 김성한(66) 전 KIA 감독이다. 김 전 감독은 프로야구 원년인 1982년 해태 유니폼을 입고 투수로 10승, 타자로 13홈런을 때린 ‘야구 천재’다. 이는 아직까지도 한국프로야구 사상 유일무이한 기록이다. 오타니보다 앞서 투타 겸업 열풍을 일으킨 그를 한국일보가 만났다.
22평 광주 아파트값 받고 해태 입단
김 전 감독의 투타 활약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군산상고 시절부터 투수로 이름을 날린 그는 ‘역전의 명수’ 주역이 됐고, 동국대에 입학했다. 대학에서도 마운드에 올라 공을 계속 뿌렸으나 결국 탈이 나고 말았다. 1학년 이후 타자에 집중하며 은행 실업야구팀에 취업하는 꿈을 키웠다. 김 전 감독은 “고등학교 때부터 꿈은 은행에 들어가 가능하면 야구를 빠르게 그만두고 업무를 익히는 것이었다”고 털어놨다. 실제 3학년 때 한일은행 입단 제의를 받았는데, 이듬해인 1982년 프로야구 출범 소식이 전해졌다.
호남 지역을 연고로 창단하는 해태냐, 은행이냐를 두고 고민에 빠졌다. 프로는 대우가 확실한 대신 은퇴하는 순간 실업자가 된다. 반면 은행은 안정된 직장 생활이 가능하다. 그는 “프로에 가겠다는 마음이 있었지만 한편으로 은행원이라는 평생의 꿈이 무너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다”고 밝혔다.
결국 고심 끝에 선택은 프로행이었다. 기대주답게 당시 계약금 1,200만 원, 연봉 1,200만 원에 도장을 찍었다. 김 전 감독은 “그때 친구들이 은행에 갔는데 월급 36만 원 정도를 받았다”며 “광주 지역 22평형 아파트 시세가 1,500만 원이었다는 걸 감안하면 적은 돈이 아니었다”고 설명했다. 그렇게 한국 야구 전설의 프로 생활이 시작됐다.
시대가 만든 ‘한국 오타니’
김 전 감독의 프로 데뷔 시즌은 화려했다. 중심 타자로 80경기에 모두 나가 타율 0.305에 13홈런 69타점 10도루를 기록했다. 선수단이 15명뿐이라 투수가 부족한 팀 사정 때문에 마운드에도 26차례 올라 10승 5패 1세이브 평균자책점 2.79를 찍었다. 투수 분업화가 이뤄지지 않을 때라 선발과 불펜을 오가며 규정이닝을 훨씬 넘긴 106.1이닝을 소화했다.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한 투타 겸업인 것이었다. 그는 “아마추어 야구를 해왔기 때문에 당시엔 선수단 15명이면 충분하다는 생각을 했는데, 지금 보면 말도 안 되는 일”이라며 “고등학교 야구처럼 투수하다 야수로 빠지고 위기에 다시 투수를 했던 상황이라 혹사될 수밖에 없었다”고 돌아봤다. 후회는 없다. 김 전 감독은 “그때는 당연히 그렇게 하는 건 줄 알았다”면서 “전혀 불평불만을 갖지 않고 그저 즐거움에 경기를 나갔던 것 같다”고 말했다.
공 스피드나 신체 조건은 오타니가 훨씬 우위지만 불굴의 정신만큼은 김 전 감독이 낫지 않을까. 그는 “오타니보다 내가 나은 점은 하나도 없다”고 고개를 가로저으며 “팀에 대한 헌신, 정신력도 그땐 시대적인 상황, 즉 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등판을) 거부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라 던졌던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지금은 시대가 바뀌었는데, 어떻게 선수에게 강요할 수 있겠나”라며 “오타니는 처음부터 투타 겸업을 하고 싶었던 것이고, 난 팀이 어렵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했다는 게 차이점”이라고 덧붙였다.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연봉도 두 배?
1982년 5월 15일 광주에서 열린 해태-삼성전 소식을 다룬 한국일보 지면에 실린 제목은 ‘김성한 혼자 북치고 장구치고’다. 이 경기는 인생 경기 중 하나다. 삼성에 0-2로 뒤진 6회초 구원 투수로 등판한 김 전 감독은 7회말 동점 2점 홈런을 터뜨렸고, 연장 11회말 끝내기 안타까지 쳤다. 마운드에서도 무실점으로 막아 팀의 3-2 승리를 오로지 자신의 손으로 책임졌다. 그는 “구원 투수로 위기를 막아 승리 투수가 되고 결승타까지 때렸던 경기가 있다”면서 한국일보 신문에 실린 제목 타이틀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1983년 6월 8일 삼미와의 홈경기 기억도 아직 선명하다. 팔꿈치 상태가 안 좋아 투수를 쉬고 있었던 김 전 감독은 경기 당일 아침 김응용 감독에게 “오늘 선발투수 해라”라고 지시를 받았다. 갑작스러운 등판에도 그는 임무를 완봉승으로 120% 수행했다. 당시 한국일보 신문에는 ‘에이스 김용남의 고장으로 고심하던 해태 마운드에 구세주 김성한이 나타났다’며 ‘타자로서의 길을 고집하던 만능스타 김성한은 해태 선발로 등판, 삼미 타선을 5안타, 2포볼, 삼진 4개로 잠재우고 금년 시즌 투수 데뷔전을 완봉승으로 장식했다’고 전했다. 김 전 감독은 “계속 1위를 달리고 있었던 삼미와 광주 3연전이었는데 투수가 바닥나 감독님이 선발로 던지라고 했다”며 “이때 3연전을 모두 진 삼미는 이후 곤두박질을 쳤고, 우리가 한국시리즈에 올라 우승까지 했다”고 떠올렸다. 투타 활약에 주위에서 연봉을 타자 따로, 투수 따로 받아야 한다고 부추겨 구단에 얘기해봤다는 김 전 감독은 “용납 안 하더라. 그냥 받던 대로 받았다”며 웃었다.
오리 궁둥이, 짬뽕의 추억
김 전 감독은 누가 뭐래도 최고의 타자 중 한 명이다. 골든글러브 6회, 홈런왕 3회, 최우수선수(MVP) 2회, 타점왕 2회 등 수상 경력이 화려하다. 실력만큼 유명했던 게 독특한 타격폼이었다. 엉덩이를 뒤로 쭉 뺀 타법에 ‘오리 궁둥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프로에서 보다 잘 치고 싶었기에 딱 맞는 타격폼을 찾다 보니 완성된 것이다. 그는 “선수 시절 이 타법을 하면서도 폼이 너무 우스꽝스러워 스스로 만족하지 못했다”면서 “하지만 이 폼을 하지 않으면 제대로 된 타격이 안 나오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가져가게 됐다”고 했다. 이어 “엉거주춤한 폼으로도 타석에서 홈런을 빵빵 때려내니까 팬들이 더 좋아하지 않았을까”라고 덧붙였다. 다만 후배들은 단 한 번도 이 폼을 따라 하지 않으려고 했다고 한다. 김 전 감독은 “요즘 여성 팬들이 많아 선수들이 엉거주춤한 폼을 좋아할 리가 없다. 심지어 타격 코치를 할 때도 선수들이 안 하려고 했다”며 “나 같으면 폼이 엉성하더라도 성적을 위해 택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짬뽕은 그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음식이다. 선수 시절 자주 즐겨 먹는 음식이 짬뽕이라, 경기 전에도 많이 먹었다. 때마침 잠실 경기를 앞두고 짬뽕 먹는 모습이 취재 기자에게 포착됐는데, 이날 홈런을 2개나 터뜨린 것이다. 김 전 감독은 “그날 ‘짬뽕타’, ‘짬뽕 홈런’이라고 대서특필 됐다”며 웃었다. 보도 후 부산 원정 때는 한 팬이 짬뽕 먹고 오라며 돈을 건네기도 했다고 한다. 그는 “팬분이 꼬깃꼬깃한 만 원 돈을 손에 쥐여주면서 너무 좋았다고 오늘도 짬뽕 먹고 홈런 쳐달라고 했다”며 “돈을 받기가 좀 그래서 내 돈으로 사먹겠다고 하며 돌려주려는데 꼭 이 돈으로 사먹어야 된다고 하더라. 팬분의 얼굴이 기억이 잘 안 나는데, 팬분은 기억하고 있지 않을까. 그날 결국 짬뽕 먹고 홈런 쳤다”고 고마워했다. 짬뽕과의 인연은 은퇴 후 중식당을 운영하면서 아직까지도 이어오고 있다.
바람 가문 이종범vs이정후, 그의 선택은
평생 ‘타이거즈맨’으로 현역 생활을 했던 김 전 감독은 ‘바람의 가문’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바람의 아들’ 이종범은 타이거즈의 후배고, ‘바람의 손자’ 이정후(샌프란시스코)는 광주 서석초등학교에 다닐 때부터 지켜봤다. 그래서 한국 야구 역사에 큰 획을 그은 부자 중 한 명을 감독 신분으로 뽑아야 한다면 누굴 선택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고민할 시간이 필요해 보였지만 의외로 답은 바로 나왔다. 이종범이다. 그는 “(이)종범이는 공격과 수비, 주루를 다 갖췄다”며 “이정후도 발이 늦지는 않지만 타격, 장타력, 안타 생산 능력, 팀이 어려울 때 한 점 승부에서 성공시킬 수 있는 도루 능력 등 모든 걸 보면 이종범을 선택하겠다”고 답했다. 이정후가 서운해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말엔 “돈 많이 벌었으니까”라며 미소 지었다.
1995년 은퇴한 김 전 감독은 이종범의 최전성기를 동료로 경험했다. 이종범은 특히 1994년에 타율 0.393에 196안타를 치고 84도루를 기록했다. 즉 출루만 하면 무조건 뛰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김 전 감독은 “정말 타 팀에서 이종범을 보면 주눅들 수밖에 없었다”며 “도루는 아웃 카운트에 관계없이 하니까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해태가 여러 번 우승을 한 이유”라고 치켜세웠다. 아버지가 경험하지 못한 메이저리그 진출 꿈을 이뤄낸 이정후에 대해선 성공을 확신했다. 그는 “아버지보다 100배는 더 성실한 것 같다”며 “야구를 사랑하는 마음, 열정이 꼬마 때부터 대단했다. 그런 정신을 갖고 가면 메이저리그에서 충분히 성공할 것이다. 더 열심히 해서 아버지보다 낫다는 소리를 들었으면 좋겠다”고 응원했다.
은퇴 후 건강 비결은 스트레스 제로
김 전 감독은 어느덧 60대 중반에 접어들었지만 아직도 에너지가 넘친다. 광주 지역방송에 고정 출연하고, 시즌 때는 KIA 경기의 편애 해설을 한다. 왕성한 활동을 하고 다양한 사람을 만나면서 인상도 푸근해졌다. 그는 “운동도 매일 꾸준히 하지만 무엇보다 평소에 스트레스 없이 지내는 게 최고의 건강 비결”이라며 “선수 때는 아주 날카롭고 강한 이미지였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모든 사람들을 만나면 배려하고, 건전하고 좋은 대화를 나누려고 한다. 만나서 처음부터 끝까지 웃음을 잊지 않고 헤어지면 속병도 없어진다”고 설명했다.
가장 즐기는 운동은 자전거다. 한때 등산에 심취한 적이 있었지만 이제 무릎이 아파 몸에 큰 부담이 가지 않는 선에서 다양한 운동을 한다. 그는 “아침에 천변으로 나가 1시간 반 정도 매일 자전거를 타고, 골프도 가끔씩 친다”고 밝혔다.
광주 = 김지섭 기자 oni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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