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천석 칼럼] 김정은 核 공갈, ‘Talk less·Do more(말은 아끼고 대비는 철저히)’
전 인구 1.5%뿐
김정은 핵폭탄과
대통령 부인 디올백 사이
夢遊病者처럼 헤매서야
내게 누이가 있었다는 사실을 안 건 거의 스물이 다 돼서였다. 우연히 중학교 5학년(현재의 여고 2학년) 때 누이와 한 반이었다는 누이 친구를 만나고서다. 어머니 대답은 한마디였다. ‘어디서 들었냐. 6·25 때 죽었다.’ 누이의 죽음이 나와 관계가 있다는 것, 정확히는 나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그 후 스무 해가 더 흘러서다. 여러 사람들 기억을 끌어모아 맞춰본 그날 그림은 대강 이러했다.
‘1948년 7월에 태어난 내가 두 돌을 맞기 전 6·25가 터졌다. 숲속 마을로 피란을 갔으나 모두가 궁(窮)한 시절이라 친지라 해도 오래 의지하기 어려웠다. 국군과 유엔군의 반격이 시작될 무렵이었다. 적 치하(治下) 도시엔 간간이 공습 사이렌이 울렸고 사람들은 일제강점기 주민을 동원해 파놨던 작은 방공호에 몸을 피했다.
그날은 가만있어도 땀범벅이 될 만큼 지독히 무더웠다고 했다. 비좁은 방공호에 수용 능력 몇 배가 넘는 사람들이 몰려 다들 앉지 못하고 선 채로 폭격이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거기서 숨이 막혔던지 징징대던 내 울음소리는 시간이 흐를수록 까무러칠 듯 더 커졌다. 모두가 신경이 곤두선 상태였다. 결국 어머니는 폭격이 그친 듯하자 나를 안고 밖으로 나왔고, 누이가 따라 나섰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폭탄 하나가 떨어져 지붕이 내려앉고 불길이 솟았다. 동네 사람들이 달려왔을 때 어머니는 나를 몸으로 덮고 있었고 누이는 어머니 위에 쓰러져 있었다고 한다. 누이는 숨이 끊어졌고, 대들보에 깔린 어머니는 허리를 크게 다쳐 혼절(昏絶)했으나, 나는 무사했다. 누이의 주검은 집안일을 돕던 친척 한 분이 수레에 실어 도시 경계선 밖 야산 자락에 묻고 돌 더미로 표시를 해뒀다고 했다. 그러나 한 달 만에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된 어머니가 그분을 앞세워 딸이 묻힌 곳을 찾았으나 그분은 이곳저곳 헤매다 끝내 묻은 곳을 찾지 못했다.’ ‘나의 6·25′가 이랬다.
잿더미가 된 집에 사진 몇 장이 남았다. 그중 하나가 도민증(道民證) 비슷한 데 붙은 엄지손톱 크기 누이 사진이다. 어머니는 타지(他地)에 출타할 때 그 사진을 지갑에 넣어 다녔고, 집에선 머리맡에 두었다. 그러면서도 딸 이야기를 한 번도 꺼내지 않은 채 46년을 더 사셨다.
이건 한국인이면 서너 집 건너 한 집은 품고 산 전쟁의 파편이다. 나는 6·25를 기억하지 못한다. 내 기억은 뒤에 들은 이야기로 짜 맞춘 간접 체험이고 간접 기억이다.
전쟁 당시 열 살, 초등학교 3~4학년은 됐어야 자기 기억이 있다. 현재 나이로 여든다섯 이상이다. 그런 분이 이 나라에 77만7432명(2022년 통계)이 생존해 있다. 지금은 더 줄었을 것이다. 전 인구의 1.5% 정도다. 그분들은 전쟁을 일으켰던 자의 포악(暴惡)과 국민을 보호하는 데 속수무책(束手無策)이었던 정치의 무능(無能)을 잊지 않고 있다. 대한민국엔 이제 이런 기억이 소멸(消滅)됐다.
북한 GDP는 245억달러, 대한민국은 1조7000억달러 가깝다. 김정은은 대한민국 경제력의 60분의 1밖에 안 되는 나라에서 작년 20차례 넘게 각종 미사일을 발사했고, 올해 들어선 더 잦아졌다. 러시아에 무기를 팔아 돈이 조금 돈다지만, 경제와 민생(民生)에는 엄청난 부담일 것이다. 말은 더 포악해졌다. ‘핵무기로 대한민국을 평정(平定)하겠다’고 한다.
워싱턴에선 김정은이 ‘최소한 국지전(局地戰)은 도발할 작정’이라는 설과 ‘공갈과 협박으로 그칠 것’이란 주장이 엇갈리고 있다. ‘아시아에서 미국의 전쟁 억지력(抑止力)이 약화됐다’는 건 양측이 인정한다.
윤석열 대통령은 1960년생. 그 옆에서 감 놔라 대추 놔라 하는 이재명 대표가 1964년생이다. 전쟁 기억이 없는 세대다. 김정은은 1984년생이다. 6·25 때 미국의 개입, 특히 그 공군력에 밀려 코앞에 온 통일 기회를 놓쳤다고 교육받았다. 핵폭탄과 미사일에 대한 병적(病的) 집착의 한 원인이다.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에서 1000만 명이 전사, 800만 명이 행방불명, 2000만 명이 부상했다. 그러고 20년 후 5000만 명이 사망한 제2차 세계대전(1939~1945)을 벌인 게 어리석은 인간이다.
한국은 더 이상 김정은 핵폭탄과 대통령 부인 디올백 사이를 몽유병자(夢遊病者)처럼 헤매선 안 된다. 대통령이 정리를 해야 한다. ‘Talk less(말은 아끼고) Do more(대비는 많이 하라)’. 제1차 세계대전이 유럽인에게 남긴 교훈이다. 지금 우리는 그렇게 가는가, 거꾸로 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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