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영옥의 말과 글] [340] 기억과 기록
오래전 일기를 펼쳐 보는 버릇이 있다. 가끔 일기 속 내용이 내 기억과 달라 곤혹스러울 때가 있다. 일본의 ‘아오모리’는 사과로 유명하지만 내겐 눈의 도시로 각인돼 있다. 눈이 내리면 항상 그곳이 생각나는데, 무릎까지 쌓인 눈을 헤치고 아오모리 미술관까지 헤맸던 시간이 아득했기 때문이다. 결국 헤매다 미술관에 들어가지 못했지만 그날 마신 핫 초코와 메밀 우동의 맛은 미슐랭 별이 아깝지 않았다. 이것이 내가 지금 기억하는 아오모리다. 하지만 실제 그날 내 노트의 기록은 맹추위와 폭설로 미끄러지며 엉덩방아를 찔 때마다 잘못된 버스를 타고 중간에 내린 내 실수에 대한 자책만 빼곡했다. 어디에도 아름다운 눈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경험하는 자아와 기억하는 자아는 이처럼 다르다.
인간은 영화를 돌려보듯 과거를 기억하지 못한다. 비트로 기억하는 컴퓨터와 달리 우리의 뇌는 이야기 단위로 기억하고, 그 과정에서 압축과 인과를 사용한다. ‘왕이 있었다, 왕비가 있었다’ 사이에 ‘왕비가 그 비통함에 죽었다’라는 인과를 꿰어 이야기를 압축하는 식이다.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기억의 오류가 일어난다. 겉보기에 명백한 사건이 사건 당사자의 기억에 따라 확연히 달라지는 과정을 보여주는 영화 ‘라쇼몽’의 주인공들처럼 말이다.
우리에게 과거는 끝없이 재해석된다. 시간이 지나며 생긴 기억 속 모호함은 자신의 현재 상황과 감정에 의해 재편집되어 새로운 과거, 즉 추억으로 등재된다. 그러므로 과거의 기억을 너무 맹신해선 안 된다. 우리가 기억하는 그때의 상황과 실제가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아오모리에서의 내 기억은 눈으로 아름답게 채색됐지만 그때 내가 경험한 진짜 가치는 어쩌면 폭설로 순식간에 사라진 길 위에서 현명히 대처하고, 버스 안내도를 제대로 읽는 법을 배우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추억은 방울방울 아름답지만 우리는 종종 기억의 가치를 높이 평가해, 경험하는 순간의 가치를 과소평가하는 과오를 저지른다. 이것이 때로 기억보다 기록이 더 가치 있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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