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강석우 “식구로 북적이던 그 시절, 집은 좁아도 온기로 따뜻했다”
[‘아무튼, 봄’ 희망 편지] (5)
세월 참 빠르다. 고대부터 수많은 인류가 예외 없이 말해 귀에 딱지가 앉은 그 말을 나까지 보탤 건 없겠지만 ‘세월 정말 빠르구나’ 하는 생각이 불현듯 스미는 건 어쩔 수 없다. 지금 느끼는 속도라면 10년 세월도 훌쩍 흐를 터…. 이대로 사는 게 옳은지 아니면 규모나 삶의 모습을 바꿔야 할지 생각이 많아지면서도, 기미조차 안 보이는 자식들 혼사를 생각하면 가는 세월 붙잡아두고 싶기도 하다.
아들·딸과의 대화 자리에서는 될 수 있으면 민감한(?) 결혼 얘기는 안 하리라 작심을 하고 있는데도, 슬쩍슬쩍 묻게 되는 건 어쩔 수가 없다. 궁금하니까. 자식들이 결혼해 일가를 이루면 ‘이제 부모 역할은 다 했구나’ 싶을 것 같으면서, 또 어떤 며느리 어떤 사위를 만나게 될까 기대도 되지만, 정작 바라는 것은 ‘손주’다.
얼마 전 엄마와 밥을 먹는 서너 살쯤 돼 보이는 어린 여자아이와 식당 옆자리에 앉게 됐다. 할 말이 뭐 그리 많은지 연신 종알대는 아이, 밥 한 술 먹이기 힘들 텐데도 예쁜 말로 ‘끝까지’ 상대해주는 엄마의 아름다운 광경. 그 모습이 얼마나 이쁜지 물끄러미 바라보다 우리 딸의 모습이 떠올랐다. 시집가 아이가 생기면 내 딸도 저런 모습이겠지. 미래의 내 손주와 재미있게 얘기 나누며 밥 먹는 나를 상상하며 미소가 지어졌다. 그 아이 엄마와도 두어 번 눈이 마주쳤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내 마음과 달리 불편했을 수도 있었겠다.
보문동 살던 시절. 외할머니와 부모님, 그리고 1남 4녀. 넓지 않은 오래된 한옥에는 냉장고·재봉틀·장식장 등으로 사람 하나 겨우 지날 만한 자그마한 마루 거실이 있었는데, 겨울에는 한가운데 연탄난로까지 놓였다. 집은 더욱 비좁아졌지만 그 난로는 우리에게 사랑과 소통, 수많은 추억을 남겨 주었다. 난로를 설치할 때부터 냉골인 마루 거실에 훈기가 돌 생각에 우리는 들떴다. 연통을 밖으로 뽑고 연탄을 피워 하얀 연기가 하늘로 퍼져 나가면 ‘리비아 대수로 공사’를 마친 듯 흡족해하시던 아버지 모습이 떠오른다. 겨우내 연통 위에서는 널어놓은 양말과 수건 등이 말라갔고, 난로 위에는 언제나 들통의 물이 끓고 있었다. 아침마다 찬물에 섞어 얼굴을 씻고 머리를 감는 데 쓰일 소중한 물이었다.
가끔 난로 위에 가래떡을 구워 먹을 때는 덮개의 위생 따위는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꿀과 조청은 없어도 참기름 한 방울 떨어뜨린 간장에 떡을 찍어 먹는 것만으로도 우리 가족은 즐거웠다. 가끔 녹화 끝나고 밤늦게 귀가하는 길에 장충동에 들러 외할머니께서 유난히 좋아하시던 족발 한 접시를 사 들고 가면, 할머니는 뺐던 틀니를 다시 찾아 끼우시고, 잠자리에 든 식구들은 형광등을 켜고 일어나 좁은 거실 난롯가에 옹기종기 모여 즐겁게 먹었다. 그 시절 ‘우리 집 사전’에 다이어트라는 단어는 없었다.
어려울 때 ‘딴딴하게’ 뭉치는 가족의 힘. 떡 한 덩이, 과자 한 조각, 과일 한 쪽에도 반드시 출처(?)를 묻는 습관. 그리고 감사하는 마음. 보문동 한옥에서 대가족으로 살던 소중한 기억은 귀한 추억이 돼 지금의 나를 지탱해 주고 있다. 할머니·할아버지의 존재로 느낄 수 있던 가족이라는 장엄한 역사의 흐름. 그 안의 사랑과 ‘위아래’ 구별하는 예절…. 이미 구시대의 유물이 돼 사라져간 지 오래다.
이제 후대는 그들만의 세상을 살게 될 것이다. 혼자 사는 인구가 늘고, 결혼은 해도 아이는 갖지 않겠다는 젊은이들을 보며, 자식들 결혼에 관해 대세에 밀려 전전긍긍하는 나를 돌아보게 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 하지만 되돌아갈 수는 없는 걸까. 식구로 북적이던 그 시절이 그리운 건 왜일까. 몸이 늙는 만큼 미처 늙지 못한 기억이 문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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