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뱅쇼’라고요? 따뜻한 ‘아아’인가요?
[한은형의 밤은 부드러워, 마셔] 뱅쇼
지중해풍 음식을 하는 식당에 갔다가 뱅쇼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뱅쇼를 마시고서였다. ‘차가운’ 뱅쇼였다. 뱅쇼를 많이 먹어보지는 않았지만 이런 건 처음이었다. 차가운 뱅쇼라니. 프랑스어로 Vin은 ‘와인’, Chaud는 ‘따뜻한’이라는 뜻이라 말 그대로 따뜻한 와인이 뱅쇼인데 말이다. 따뜻한 아(이스)아(메리카노) 같은 건가? 누군가가 내게 따뜻한 아아 같다고 했던 말도 떠올랐다.
나는 주문한 음식과 함께 뱅쇼와 올리브오일이 병에 담겨 나온 걸 보고 어리둥절했다. 주문한 게 아닌 데다 ‘차가운 뱅쇼’였기 때문이다. 올리브오일은 뭘까 싶었다. 그때 주인으로 보이는 분이 오시더니 작은 고블릿 잔에 뱅쇼를 따른 후 올리브오일을 따랐다. 뱅쇼가 5라면 올리브오일은 1의 비율로 된 고블릿 잔의 단면은 상당히 생소했다. 무지개떡의 단면처럼 색이 다른 술을 층층이 쌓아 만드는 칵테일처럼 보였는데 정작 그런 칵테일을 마셔본 적도 없고 이름도 모르기 때문이다.
잔에서 섞지 말고 입에서 섞으라며, 주인분은 입술을 오물오물하며 오일 풀링하는 입모양을 보여주었다. 좀 요란하게 와인 테이스팅하는 모습일 수도 있겠다. 처음 먹는 음식에 거부감이 거의 없고 색다른 조합도 환영하는 나지만 당황했다. 베를린에서 야생동물 간(肝)으로 만든 경단만이 가득 든 맑은 수프를 마주했을 때만큼은 아니지만 말이다. 녹말기 없는 간 옹심이가 이런 건가 싶어 간이 오그라들었다. 올리브오일을 얹은 차가운 뱅쇼는 의외로 맛있었다. 여기에서 ‘의외로’란 ‘조금’이란 뜻이 아니라 ‘뜻밖의 맛’이라는 뜻이다. 주인분보다는 소극적으로 입을 오물오물했는데도 그랬다.
뱅쇼를 만들어 본 적은 없다. 밖에서 여러 번 마시기는 했지만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아서 그랬을 거다. 그냥 마셔도 좋은데 왜 굳이 설탕과 과일을 넣고 와인을 끓여야 하나 싶었고, 끓이면 알코올이 휘발된다는 것도 못마땅했던 듯하다. 뱅쇼란 술은 내게는 지나치게 달기도 했다. 디저트도 그렇지만 술이 단 건 특히 사절이다. ‘입에서 달다’라고 할 때의 그 단맛은 좋지만 당도가 높아 단 술은 맛있는지 모르겠다.
그랬었는데 말입니다. 차가운 뱅쇼를 먹고 돌아와 뱅쇼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산뜻한 느낌을 다시 느끼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 정도면 상당한 전환이 일어난 거다. 연말에 만들어 보고자 뱅쇼 키트를 사두기는 했었지만 내가 만들 것 같지는 않았다. 연말은 어느새 지나버렸고, 뱅쇼 키트에도 관심이 식었다. 레드 와인으로 할지 화이트 와인으로 할지 고민하기는 했었다. ‘정통의 레드’냐 아니면 ‘참신한 화이트’냐를 두고 머뭇거렸다.
음식을 만들 때 늘 갈등하게 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오리지널 레시피를 따를 것이냐 내 식대로 변형할 것이냐의 갈등이다. 안전과 모험 중에서 고민하다가 70퍼센트의 확률로 모험을 택하는 편이다. 그런데 차가운 뱅쇼를 마시는 바람에 결정이 이루어졌다. 레드 와인으로 만들어 차갑게 마시겠다는 것으로. 나는 차갑게 마시는 레드 와인을 좋아하는 것 같다. 차갑게 먹는 레드 와인 같은 거 좀 이색적이지 않나? 볼로냐에서 며칠 지내며 매일같이 마셨던 람부르스코와의 만남이 강렬해서 그러는 걸 수도 있지만.
최근에 시칠리아 레드 와인 중에 차갑게 먹는다는 품종을 마시면서 람부르스코 생각을 했다. 람부르스코는 레드 와인인데 탄산이 있고, 차게 마신다. 단 것도 있지만 안 단 람부르스코도 있다. 따라주시는 분이 잔이 넘치도록 콸콸 따르면서 ‘람부르스코’라고 하셔서 ‘뚜또 베네’와 비슷한 결의 행복을 축원하는 볼로냐의 인사말인 줄 알았다. 차가운 레드도 좋았지만 볼로냐의 목소리, 원기가 흘러넘쳤던 그 목소리가 떠올라 차가운 뱅쇼가 좋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뱅쇼를 만들지 않았던 또 하나의 이유가 떠올랐다. 어느 레시피를 채택해야 할지 몰랐다. 정보가 넘쳐나는 이 시대에 뭔가를 선택하는 것도 에너지가 드는 일이라 대충 하기보다는 아예 하지 않는 편이다. 중학교 때 샀던 요리책(내가 산 최초의 요리책이다)의 저자가 뱅쇼 키트를 판매하는 걸 발견하지 않았더라면 사지 않았을 수 있다. 그 요리책 저자를 C라고 하자. 그 후로 무수한 요리책을 사면서 나는 C의 내공이 어마어마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C가 적은 레시피는 어딘가가 달랐고, 한 끗이 있었다. 뱅쇼를 만들고 싶었다기보다는 C의 레시피로 된 뱅쇼를 만들고 싶었다고 해야겠다.
스타아니스와 정향, 카다멈, 시나몬, 그랑 마니에르에 절인 오렌지 껍질, 비정제 각설탕 11알, 바닐라빈으로 이루어진 키트였다. 그리고 티백 주머니가 있었다. 좋은 품질의 향신료였고, 그랑 마니에르에 절인 오렌지 껍질이 그녀의 한 끗이라는 게 느껴졌다. 나는 그제야 C가 적어둔 뱅쇼의 레시피를 보기 시작했다. 설탕과 바닐라빈을 제외한 모든 걸 티백 주머니에 넣으라고 했다. 750ml 레드 와인 한 병과 오렌지나 오렌지 주스를 준비해야 했다. 생 오렌지즙을 짜도 좋고, 오렌지 주스 150ml도 좋다고 C는 설명했다. 뚜껑을 열고 끓여야 하고 가장 중요한 거는 불 조절이었다.
1. 티백에 설탕과 바닐라빈을 제외한 재료를 넣는다. 2. 와인 750ml와 설탕, 바닐라빈, 티백을 넣고 센 불로 끓인다. 3. 끓으면 중약불로 줄여 5분 더 끓인다. 3. 오렌지즙이나 오렌지 주스와 그랑 마니에르에 절인 오렌지 껍질을 넣는다. 4. 약불로 30분 더 끓인다. 5. 체에 거른다. 6. 밀폐용기에 넣는다. 하루 정도 숙성하면 더 좋다는 말이 있었다. 나는 모든 과정과 디테일을 충실히 따랐는데, 따르지 않은 건 하나였다. “따뜻하게 데워 드세요”라는 말. 나는 차가운 뱅쇼로 먹기 위해 뱅쇼를 만든 거니까.
막 만들었을 때, 그리고 중간중간 맛을 보기 위해 먹을 때는 따뜻하게 마셨지만 말이다. 체에 거른 뱅쇼를 병에 담다 알게 된 사실은 엄청나게 양이 줄어든다는 것이다. 와인이 750ml, 오렌지 주스가 150ml, 다해서 900ml였던 냄비 속의 액체는 700ml로 줄어들어 있었다. 40분쯤 되는 시간에 200ml가 증발했다니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는 에인젤스 셰어(Angel’s Share) 아닌가.
위스키를 증류할 때 1년에 2% 정도 증발되는 걸 ‘천사의 몫’이라며 에인젤스 셰어라고 한다. 40분간의 냄비 안에서 10년치 이상의 에인젤스 셰어가 격렬하게 일어났다고 생각하니 뱅쇼가 심오하게 느껴졌다. 증발된 200ml는 집안에 냄새로 스며들었다. 진짜 감미로운 한숨 쉬게 되는 향기였다. 뱅쇼의 가장 큰 미덕이 증발에 있었다는 사실, 아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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