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끈한 카키소바에 굴 꽃이 활짝 피었다
[양세욱의 호모 코쿠엔스] 서울 양재천 ‘미우야’
서울 양재천에는 계절이 흐른다. 관악산에서 발원해 서초구와 강남구를 가로질러 탄천과 한강으로 흘러드는 양재천 주변만큼 계절의 변화가 뚜렷한 곳이 서울에는 드물다. 양재시민의숲역을 나와 윤봉길의사기념관 뒤편으로 뻗은 미로 같은 숲길을 걷다 보면 좌우로 양재천이 시원스레 펼쳐진다. 봄 벚꽃이 흐드러지던 카페 거리는 가을 낙엽으로 뒤덮인다. 여름 수영장이 있던 수변공원은 지금 눈썰매를 지치는 아이들의 함성이 한창이다. 소바와 우동 전문점 ‘미우야’는 눈썰매장 바로 맞은편이다.
최근 양재시민의숲역 부근에 출장이 잦았다. 연구 과제 관련 회의가 있는 한국연구재단 서울청사, 학술대회가 열리는 더케이호텔이 역사에서 멀지 않다. 소바와 우동, 덮밥, 카레가 두루 훌륭한 일식당 미우야는 근처 출장 때마다 먼저 떠오르는 식당 후보다. 오가는 숲길에서 만나는 계절의 변화는 미우야를 찾는 덤인 셈이다. 지금 미우야에는 이 계절에만 맛볼 수 있는 한정 메뉴 가케소바(1만7000원)가 있다. 겨울이 제철인 굴(카키)과 미역, 채 썬 파를 함께 얹은 온소바다. 미식을 찾아 나선 출장 아닌 출장을 다녀왔다.
점심시간을 피해 방문했는데도 식당 앞은 장사진이다. 대기 공간이 따로 마련되어 있지만, 전화번호를 입력하고 바로 옆 양재도서관에서 신문을 뒤적이며 호출을 기다렸다. 식당 앞 긴 줄 말고도 맛집에는 여러 공통점이 있다. 안내를 받아 들어선 식당에서는 음식에 집중하고 있는 손님들의 나지막한 웅성거림이 들려온다. 20대부터 70대까지 연령대도 다양하다. 천장에는 음식을 돋보이게 만드는 은근한 황열등이 실내를 밝힌다. 너무 밝지도 어둡지도 않다. 검은 제복을 차려입은 직원들의 몸놀림은 민첩하면서도 눈에 거슬리지 않는다. 옥수수차의 온도는 알맞고 메뉴판은 자상하다. 도자 식기는 두툼하고 수저의 그립감마저 최적의 상태다.
“여자를 위해 남자가 먹는다. 남자를 위해 여자가 먹는다.” 여러 페이지에 걸쳐 빼곡한, 익숙한 메뉴들의 유혹을 물리치고 가케소바를 주문하면서 어느 천재가 만든 이 광고 문구를 떠올렸다. 동서와 고금에 넘쳐나는 굴에 대한 찬사들 가운데 가히 압권이랄 수 있겠다.
이성을 위해 다른 이성이 챙겨 먹는, 먹어야 하는 굴은 어느 철에든 만날 수 있지만, 이 계절이 아니면 싱싱한 굴에서 우러나오는 제대로 된 풍미를 즐기기 어렵다. 소바의 제철도 햇메밀이 출하되는 이 계절이다. 두툼한 면기 안에 어우러진 두 제철 식재료는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흐뭇하다. 햇메밀과 살이 부풀 대로 부풀어 오른 우윳빛 굴의 조화는 오묘하다. 갓 제분한 메밀가루를 특별한 노하우로 삶아낸 면이 아니고서는 뜨끈한 국물에 만 메밀에서 이런 향과 찰기를 유지하기 어렵다.
소바의 천국은 일본이다. 에도 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소바에 대한 일본인들의 열정은 메밀 성분과 함량, 조리법, 부재료에 따라 천변만화하는 방대한 소바의 세계를 창조했다. 한때 규슈부터 홋카이도까지 답사를 빙자한 소바 맛집 탐방만으로도 일본 여행 비용이 아깝지 않던 시절이 내게도 있었지만, 지금은 국내에서도 미우야처럼 제대로 뽑고 제대로 말아낸 전문점들을 만날 수 있다.
‘미쉐린가이드 서울’에도 여러 소바집들이 이름을 올렸다. 광화문의 터줏대감이자 70년 노포인 ‘미진’처럼 전통적인 자루소바와 가케소바를 내는 식당 말고도 이색적인 토핑을 얹은 창의적인 소바로 명성을 얻고 있는 전문점들이 있다. 메밀 함량 30%의 소바로 ‘고등어구이 온소바, 성게알 냉소바, 가지튀김 냉소바, 붕장어튀김 냉소바’를 내는 신사역의 ‘미미면가’, 메밀 함량 80%의 소바로 ‘우니·마구로·이쿠라 소바(우니는 성게알, 마구로는 참다랑어, 이쿠라는 연어알), 스키야키 소바’를 선보이는 교대역의 ‘미나미’, ‘등심튀김 메밀, 오리 메밀’로 명성을 얻은 방배역의 ‘스바루’ 등이 소바가 간절할 때마다 찾아 나서는 단골이다.
남녘에서는 벌써 매화 소식이 들려온다. 내내 무표정하던 양재천 나무들에도 머지않아 생기가 돌기 시작할 터이다. 이 계절이 지나가면 다시 한 해를 기다려야 하는 음식들을 두루 살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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